#227 결사대 (3) - 팔문금쇄진
“헉!”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폭발하는 활화산에 가본 게 아니라면, 자신을 향해 용암이 용암이 밀려오는 걸 겪어본 사람은 없으리라.
밀려오는 용암은 순금을 용광로에 녹인 것처럼 눈부신 황금색이었고, 홧홧한 열기가 훅 끼쳤다. 저기 휩쓸린다면 목숨을 잃거나 큰 화상을 입을 게 자명했다.
“빙정을 섭취하세요!”
차은비가 외치자, 일행들은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빙정을 꺼내 삼켰다.
빙정은 간단한 섭취형 아이템으로, 화기를 잘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한건우는 통로를 타고 파도쳐 오는 용암을 노려보았다.
‘흙으로 된 병마를 거의 물리쳤더니, 갑자기 용암?’
임수호가 굳은 표정으로 스태프를 앞으로 내밀었다. 스태프의 끝에는 각성자가 운용하는 마력을 증폭하는 전륜성왕의 구슬이 빛나고 있었다.
[특성 발동 : 빙정난류]
샤아아아-
허공에서 우박이 몰아치고, 얼음의 벽이 만들어졌다.
쐐기꼴 모양으로 용암을 갈라 전진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임수호가 쏘아낸 얼음의 벽은 기세 좋게 나아갔지만.
용암 가까이 가자 벽의 두께가 눈에 띄게 얇아졌다.
임수호는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으윽!’
파아아!
얼음의 벽이 용암과 맞닿았다.
막았다고 생각한 순간. 얼음의 벽은 수증기로 기화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아···!”
임수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수호, 물러나!”
임진호가 임수호의 뒷덜미를 잡고 잡아당겼다. 열기가 훅 끼쳤다.
다른 일행들은 용암의 파도를 피해서 물러날 곳을 찾았다.
토병들이 서 있던 전장 한가운데, 큰 누각이 있었다.
가장 밑의 단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피라미드 형상의 계단식 누각이었다.
누각의 윗부분은 네모지고 평평하게 깎여 있었다.
수십 명이 동시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 위에 올라가면 모두 용암의 파도를 피할 수 있을 성싶었다.
그걸 발견한 박이경이 외쳤다.
“저기 누각 쪽으로 올라가!”
사람들이 그쪽으로 급히 이동했다.
한건우는 용암이 밀려오는 가운데, 주변 공간을 주시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건우 씨!”
이비현이 의아해하며 그를 불렀다.
한건우는 이 흐름이 꺼림칙했다.
‘착륙 지점에 모이자마자 땅이 꺼지면서 추락하고··· 땅밑의 유일한 통로는 병마용으로 통하고. 병마들을 막 해치우려는 참에, 전장으로 용암이 밀려온다? 그것도 우리가 왔던 통로에서?’
정신없이 토끼몰이를 당하는 듯했다.
공중에서 진법의 형상을 보았다던 차은비의 말이 생각났다.
‘이건 유도당하는 거야.’
한건우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누각으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멈춰!”
지하 공간에 한건우의 외침 소리가 메아리쳤다.
사자후, 아니 드래곤 피어를 연상케 하는 외침이었다.
모든 이들이 오금이 저려 바짝 굳었다. 박이경도 마찬가지였다.
‘이 내가?’
박이경은 스스로 큰 충격을 받았다.
한건우라는 각성자는 정말 대단했다.
‘고작 목소리 하나로 이 많은 상급 각성자들을 제압한다니?’
누각을 타고 올라가던 사람들이 엉거주춤 멈추고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한건우가 있는 곳으로 황금색의 용암이 철썩. 파도를 치며 밀려왔다.
한건우는 공중으로 날아오르지 않았다.
도리어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전장을 네모지게 둘러싼 수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건우 씨?”
이비현을 비롯한 일행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펄펄 끓는 용암이 한건우의 바로 코앞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특성 발동 : 금속 조작]
터어엉!
수로를 흐르던 수은의 강이 한번에 높이 일어섰다.
은빛을 띄는 금속의 장벽이 수 미터 높이로 전장 주위를 에워쌌다.
쿠르르- 철썩!
황금색 용암의 파도가 금속 장벽을 때렸다.
두터운 금속 장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용암의 일부가 튀어 넘어올 뿐이었다.
금속 조작 특성으로 제방을 만들어 용암을 막은 것이었다.
“마, 막았어?”
“우리 마스터가 수은의 강을 움직였어.”
사람들이 탄성을 뱉었다.
‘수은도 금속이니까.’
금속 조작 특성으로 수은을 못 움직일 이유는 없었다.
한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누각 위쪽을 돌아보았다.
불길한 감각이 닥쳐왔다.
그 순간.
드르르르···.
콰아앙!
“억!”
엄청난 충격파가 공중을 울렸다.
그 충격은 높은 누각 쪽에서 난 것이었다.
“저게 뭐지?”
“더 높아졌는데?”
“아니야. 천장에서 내려왔어!”
높은 누각의 위.
동굴 천장에서 내려온 새로운 누각이 고스란히 얹혀져 있었다.
“...!”
거울을 갖다댄 것처럼 정확히 반대 모양.
맨 아래쪽은 좁고 위로 갈수록 넓어지는 누각이었다.
두 개의 누각이 쌓여있어, 옆에서 보면 모래시계와 같은 형상이었다.
두 개의 누각은 백짓장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맞닿아 있었다.
마치 거대한 도장을 찍은 듯했다.
“저 위에 올라갔으면... 죽을 뻔했어.”
“분명히, 전부 다 피하지는 못했겠지···.”
한건우가 말리지 않았다면, 두 누각 사이에 끼어서 납작해졌을 터였다. 일행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거, 계속 이런 식이군.”
“무슨 말씀이시죠?”
이비현이 다급히 물었다.
“북경에 착륙하고 나서부터,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함정이 나오고 있어. 이동 동선을 예측해서.”
“함정이요?”
한건우는 차은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은비 씨, 아까 진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위에서 내려올 때 팔문금쇄진의 형상이 보였어요.”
“팔문금쇄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한건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건 실체가 없는··· 중국 고사에서 전해져 오는 전설 아닙니까?”
“아니에요. 팔문금쇄진의 도식을 본 적이 있어요. 마방진을 응용한 거죠. 너무 규모가 커서 못 알아볼 뻔했는데···.”
차은비는 손끝으로 허공에 자신이 본 지형을 다시 따라 그렸다. 은빛의 실이 공중에 떠올라 진형을 그려냈다.
중심부로 이르는 8개의 루트가 복잡하게 엉켜있는 모습이었다. 차은비가 손을 튕기자, 진형은 살아있는 것처럼 규칙을 가지고 움직였다.
“저도 이론으로만 아는 거지만, 팔문금쇄진의 무서운 점은 진 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움직임에 맞춰서 유기적으로 진이 변화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복잡한 진형을 보고 심각해졌다.
한건우가 한 지점을 짚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쪽. 거대한 팔문금쇄진의 한복판인 것으로 봐야겠군요.”
“이렇게 큰 규모로 진형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의문이지만요.”
“좋습니다. 이 진형을 돌파해서 탈출하는 방법은 뭡니까?”
그런데 차은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아는 방법은 하나예요. 이 문으로 들어와서, 이쪽으로 나가면 되는데···.”
차은비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사람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건··· 우리가 들어온 통로 방향인데?”
“게다가 방금 용암이 밀려와서 막혀버렸어요.”
차은비는 차마 다음 말은 하지 못했다.
일행이 들어온 문은 진형의 이론상 ‘사문’으로, 그쪽으로 진입한 사람은 무조건 죽게 된다는 것이었다.
우르르르···.
또다시 지하 동굴 어딘가에서 지형지물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한편, 차은비가 그린 진형을 살펴보던 박이경이 지하 벽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저기 저쪽 끝에 틈 보여.”
“?”
박이경이 너클의 가죽끈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말했다.
그가 차은비가 그린 도식 위에 경로를 죽 그었다.
“저쪽 틈으로 이동해서 이렇게 나가면, 진형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 아냐?”
“...아니, 그렇게 맘처럼 쉽게 풀 수 있는 줄! ...어?”
차은비가 박이경의 등을 때리려다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그랬다.
자신이 이론으로 알던 진형과 달리, 실제 주위의 지형지물에는 틈이 보였다.
그 틈이 다른 경로로 이어진다면, 박이경의 말대로 진형을 뚫고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모두 박이경을 쳐다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한건우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 길뿐인 것 같군요. 빨리 돌파해 나갑시다.”
한건우는 <금속 조작>을 통해 사람들이 뒤따라올 수 있는 구름다리를 만들었다. 물결치는 황금색 용암 위로 금속으로 된 다리가 생겨났다.
한건우는 드래곤에 올라탔다.
그런데 박이경이 말한 틈은 좁았다.
드래곤이 날개를 최대한 몸에 붙여야 가까스로 통과할 듯했다.
“용인 형태로 변하는 게 낫겠어.”
[안돼, 아빠.]
드래곤이 한건우의 말에 대놓고 반기를 든 건 처음이었다.
드래곤은 날개를 예민하게 퍼덕이면서 어두운 공중을 한 바퀴 돌기만 했다.
“왜 그래?”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 순간. 한건우의 심장도 크게 두근거렸다.
이 느낌은 분명히···.
‘뇌룡의 심장 조각이 반응하는 거야.’
그때 한건우는 깨달았다.
“이런.”
이 완벽한 팔문금쇄진에 오류처럼 보이는 틈새가 있는 이유를.
그 틈새를 이용하는 생명체가, 하나 더 있는 것이다.
한건우가 급박하게 외쳤다.
“빨리 나가!”
“!”
일행들이 속도를 재촉했다.
비행 마수들도 은설아의 지시를 따라 빠르게 틈새를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이비현이 주춤하고 있자, 한건우가 손짓했다.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 금방 따라갈게.”
쿠구구구···.
불길한 울림 소리가 가까워졌다.
굳어가는 황금색 용암을 헤치고, 거대한 괴물체가 다가왔다.
호수를 헤엄치는 뱀처럼.
용암 밑에 뱀 같은 물체가 헤엄쳐 오고 있었다.
아직 형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길이만 수십 미터에 이르렀다.
가공할 만한 마기가 지하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한건우는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그 이름을 알 수 있었다.
“황룡.”
쿠과과과과과-
그 이름을 부르자마자.
황금빛 용암을 흩뿌리면서 황룡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용암이 매끄러운 비늘을 타고 흘러내렸다. 용암보다 더 반짝이는 금색 비늘이 드러났다.
드래곤보다는 동양적인 용에 가까웠다.
짧은 다리가 4개 달려있을 뿐, 거대한 뱀에 가까웠고, 날개가 보이지는 않았으나 자연스럽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드래곤은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처음 만나서인지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나와 비슷한데, 달라.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어.]
황룡이 두 눈을 번쩍이며 드래곤 쪽을 노려보았다.
폭군과 같이 난폭한 눈빛이었다.
황룡의 머리 근처, 날카로운 비늘이 솟았다.
서늘한 남자의 목소리로, 거친 용언이 들렸다.
[죽어라, 침입자.]
선명한 적대감이 밀려왔다.
상대는 완전히 자란 성체.
한건우의 드래곤보다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나 한건우의 드래곤은 오히려 냉정을 되찾았다.
[아빠, 여기서 싸워? 너무 좁은데.]
한건우를 아빠라고 부르는 드래곤을 보고.
황룡은 거칠게 으르렁댔다.
[어린 계집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섬기다니!]
한건우는 전장을 한 바퀴 돌면서 둘러보았다.
‘황룡은 용암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게다가 뱀처럼 길쭉하고 날개 없이도 움직일 수 있으니 비좁은 곳에서 싸우는 게 더 유리해.’
그와 반대로, 한건우의 드래곤은 몸통이 두껍고 여러 개의 날개로 비행했다.
이 좁은 지하공간에서의 전투가 불리할 것이 뻔했다.
‘황룡을 유인해서 밖으로 나가야겠군!’
황룡은 한건우의 생각을 읽은 듯.
한건우의 일행이 나간 틈새를 몸으로 막으며 또아리를 틀었다.
쉬이익-
[네놈은 살려놓으라고 하더군. 누구 마음대로? 너희들은 이곳을 살아서 나갈 수 없다.]
황룡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한건우는 황룡을 맞서 노려보았다.
‘전장이 불리하면, 조건을 바꾼다.’
한건우는 차은비가 그렸던 진형의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