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225화 (225/238)

#225 결사대 (1) - 시작일 뿐

살면서 종종 연설을 해야 하는 때가 있었다.

부하들의 사기를 돋우거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한건우는 원래 필요한 순간에는 달변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쉽게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재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건우는 마음을 가다듬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저는 곧 이 사태를 일으킨 원흉과 싸워서, 그를 없앨 겁니다. 그자는 중국의 정보조직 ‘천망’의 수장이기도 하고, 그 밖에도 큰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

한건우는 최대한 담백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자는 단순히 부와 권력을 얻으려는 자가 아닙니다. 인류를 멸망시키고 자기 뜻대로 세상을 바꾸려 하죠. 한국이 겪은 비극은 시작일 뿐입니다.”

드넓은 인공 균열 안.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고, 한건우의 낮은 목소리만이 울렸다.

“...제가 이쯤에서 그를 막지 못하면, 결국 모든 건 그의 뜻대로 흘러갈 겁니다.”

분명히 실패할 가능성이 있었다.

한건우는 그걸 숨기려 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정확한 진실을 알려주어야 하니까.

“그래서 저는, 목숨을 걸고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그게 저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건우는 운명론자는 아니었지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시간을 거슬러온 건, 이 소명을 위해서가 아닐까?’

세상을 두루 지켜보는 신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가 모용황의 음모를 막기 위해 자신을 돌려보낸 것은 아닐까?

그때 박이경이 씩 웃으며 두 주먹을 두드렸다.

까앙- 너클의 금속 부위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형님, 아까부터 무슨 마지막 인사처럼 서운한 소리를 하십니까. 형님과 함께 있으면 멋진 싸움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데요. 앞으로도 절 떼놓고 다닐 생각은 하지 마쇼.”

박이경이 껄껄 웃자, 뒤에 선 알파스 길드원들도 따라 웃었다.

‘나 참, 목숨이 걸린 일이건만.’

참으로 박이경다웠다.

아니, 사실 그렇지만은 않았다.

‘박이경도 참 많이 변했어. 내가 알던 인물이 아니야.’

박이경은 괴력과 반골 기질, 거침없는 성격으로 최상위 각성자들과 반목했고, 뒤로는 범죄 조직과 어울리며 정부에 삐딱선을 탔다.

지금의 박이경은 말투만 빼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딱 보니 이번엔 진짜로 위험해질 것 같지만··· 마스터도 보좌해야 하고, 저 곰탱이도 챙겨야 하니 어쩔 수 없죠!”

차은비가 팔짱을 끼고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얄미운 태도와는 달리, 한건우를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소리였다.

한건우가 전 상사인 태일제를 죽인 이후, 길드의 사람들은 차은비의 반응이 어떨지 주목했다.

아무래도 과거 고용 관계였으니, 심경에 변화가 있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차은비는 그런 시선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 일했다니 부끄럽네요!’

더 말하자면 입이 아플 따름이지만, 차은비도 정말 딴사람이 되었다.

남에게 관심 없고, 오직 자기만 알던 차은비가 여기까지 함께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니.

그 와중, 아레스 길드의 1, 2, 3호 영입 멤버.

은설아와 임수호, 임진호가 나란히 서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심전심인 것을 알고서, 임진호가 대표로 앞장섰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으니, 모두의 앞에서 말할게.”

침착한 임진호의 목소리에는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열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건우 형이 아니면 지금 살아있지도 못했어. 지옥 같은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죽었겠지. 그리고 우리처럼 형에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잘 알아.”

임진호는 담담하게 선언을 이어갔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행운아야. 미약하나마 형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그러니 뭐든지 할 수 있는 일을 말해줘.”

이어서 이비현이 말했다.

“저 이비현, 그리고 우리 솜브라는 한건우 플레이어 덕분에 다시 생명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어요. 저희 솜브라는 끝까지 한건우 플레이어와 뜻을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미등록자들까지?”

한건우의 부하와 동료들이 하나둘씩 발언하는 걸 보고, 정부 각료들이 술렁거렸다.

그때 이능력 특수전단의 권석진 대장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힘이 다할 때까지 진정한 군인으로 살다 죽을 수 있다면 그만한 영광은 없습니다. 이미 많은 국민을 지키지 못했습니다만···. 대통령 각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우리 이능력 특수전단은 최선을 다해 한건우 플레이어의 작전을 돕겠습니다.”

권석진 대장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가족은 1차 파동 초기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 비극을 겪은 건 권석진 대장만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가족과 친지를 떠나보냈고, 실종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은 수두룩했다.

정남준 대통령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의 존폐가 달린 문제 아닙니까? 제가 허락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도움 드릴 게 없어 말을 꺼내기도 부끄럽습니다만··· 돌파구가 보인다면 모두가 힘을 합쳐야지요.”

도움 드릴 게 없다니.

한건우는 정남준 대통령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생존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구심점이 바로 그였으니까.

한건우는 이 점을 분명히 했다.

“대통령님. 만일 제 임무가 성공한다면, 그 후의 세상에서 대통령님은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

“상처 입은 나라를 추스르고,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그리고 각성자와 비각성자 간에 무의미한 갈등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

“아....”

이 사태가 진정된다 해도 여론이 어떻게 흐를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각성자와 비각성자는 서로 믿지 못하고 반목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걸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모두의 신뢰를 받고 있는 정남준 대통령뿐이었다.

끝까지 한건우를 돕겠다는 선언이 끊이지 않았다.

한명 한명의 눈빛을 보고, 한건우는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오르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드래곤이 비늘을 쭉 세우며,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용언을 발했다.

[이번엔 나만 빼놓고 가면 안 돼, 알겠지?]

“으헉!”

용언을 처음 듣는 이들, 주로 정부 각료들이 자리에서 펄쩍 뛰며 놀랐다. 진중해졌던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모든 게 과거와는 달랐다. 주변에 많은 이들이 함께한다는 것을, 한건우는 체감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한건우는 먼저 아레스 길드원들을 향했다.

길드 매니저인 금해준이 씨익 쪼개듯이 웃고 있었다.

어느새 아레스 길드의 길드원만 해도 200여 명.

금해준은 그동안 길드를 건실하게 운영하며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해 왔다.

최고 수준의 훈련, 그리고 장영표가 만든 최고급의 장비.

아레스 길드에서는 C급도 B급에 버금가는 전투력을 낸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 점을 고려하며, 한건우는 그룹을 나누었다.

“먼저 한국 땅을 지켜줄 사람들이 필요하겠군요.”

소소의 말에 따르면 상태이상에 걸린 각성자들은 곧 제정신을 찾을 거라고 했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혼란이 일어나는 건 매한가지야.’

한건우는 혼돈과 공포로 가득하던 아프리카 땅을 떠올렸다. 치안에 공백이 생긴 걸 알면, 범죄자들이 기승을 부릴 것이다.

혹시나 그중에 상위 등급 각성자라도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걸 막기 위해서는 숙련된 부대가 필요했다.

그뿐인가. 균열이 다시 터지기 시작하면, 그걸 공략해줄 인원도 필요했다.

“이능력 특수전단 부대원 여러분. 모두 한국에 남아서 대통령님과 임시 정부를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는 걸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권석진 대장은 아쉬움을 삼키고 대답했다.

한건우를 따라가서 싸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대의를 위해서 한건우의 지시가 맞다고 느꼈다.

“아레스와 알파스 길드의 C급 이하 각성자 역시, 한국에 남아서 이능력 특수전단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

등급으로 기준을 나누자, 길드원들의 표정에서 희비가 갈렸다.

“그리고 B급 이상의 길드원 중에서 희망하는 인원만 저와 함께 가겠습니다. 일종의 특공대죠. 다시 강조하지만,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임무입···.”

“전 가겠습니다!”

“함께 하시죠!”

한건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길드에서 각성자들이 앞다투어 나섰다. 얼핏 보아도 B급 이상의 각성자는 한 명도 빼지 않고 전부 나선 듯했다.

모두 숭고한 희생정신 때문은 아닐 터.

한건우의 부름이 호승심을 자극한 덕분이 아닐까.

한국에서 B급 이상 각성자는 통틀어 수백 명 정도이건만.

1, 2위를 다투는 두 길드이기에, 4-50명 정도의 인원이 나왔다.

“저희 솜브라도 마찬가지로 하겠습니다.”

미등록자는 정확한 등급은 알 수 없지만. 이비현은 부하들의 실전 전투력을 누구보다 정확히 꿰고 있었다. 5명이 더 채워졌다.

진호와 수호 형제의 표정은 오묘했다.

“형··· 우리 까딱하면 등급으로 잘릴 뻔했는데? 분발해야겠어.”

“그러게 말이다.”

임무에서 최약체가 된 기분에 떨떠름했지만.

곧 형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건우와 박이경이 각각 아공간 무기고를 활짝 개방한 것이다.

길드 마스터가 직접 균열을 공략해서 가져온 귀한 아이템도 있었고, 아이템 장인이 최근 개발한 신무기도 있었다.

“자자, 용사가 되어 신화급 마수를 공략하러 간다는 마음으로, 최고의 아이템을 고르라고!”

박이경이 호객하는 장사꾼처럼 손뼉을 쳐댔다.

한건우도 같은 입장이었다.

“후발대도, 보급도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싸우게 될지 모릅니다. 각자 최고 수준의 무장을 하시면 됩니다.”

균열에서 얻은 다양한 공격 무기.

부가 효과가 있는 방어구나 마법 장신구.

한 병에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최고급의 포션.

소모품인 보호막 아이템까지.

“우와아!”

어마어마한 자산을 제한 없이 풀자, 특공대의 사기는 벌써 하늘을 찌를 듯했다.

웬만한 아이템에는 놀라지 않는 차은비도 눈을 반짝였다.

“세상에, 아공간 무기집이 터지겠는데요?”

“은비 너도 그 이쑤시개 말고 제대로 된 무기 하나 쓰지 그래.”

차은비의 레이피어를 비웃는 말이었다. 그녀가 눈꼬리를 치켜세웠다가, 박이경이 내민 무기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내가 그걸 들라고요? 줘도 꼭 자기 같은 걸 주고 있어.”

“왜. 좀 무거운가?”

박이경은 큼직한 전투 도끼를 내려놓고 머리를 긁적였다.

“어차피 내가 위험할 정도면 다 끝인데. 당신이나 잘 골라 봐요. 그 낡은 너클은 못 미더운데.”

“이게 어디가 어때서! 너 하나쯤은 충분히 지켜줄 수 있다고!”

“우웩···.”

차마 못 들을 말에, 은설아는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귀를 씻어내고 싶었지만 상황이 마땅치 않았다.

치를 떠는 은설아에게 한건우가 다가왔다.

“자.”

한건우가 두 개의 아이템을 쥐여주었다.

“저 주시는 거예요?”

“이 부채는 테이밍에 부가 효과를 줄 거야.”

마리아 베르타가 쓰던 <케찰코아틀의 깃털 부채>.

희귀한 매혹 아이템이니, 테이밍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건요?”

장영표가 만든 총기 아이템, <데스 트루퍼>였다.

“비행 마수를 탔을 때 호신용으로. 마력 총기 사격술을 미리 가르쳐 줬으면 좋았을 테지만···. 기본만 알아도 쓸만할 거야.”

한건우가 아끼는 아이템으로 알고 있어, 은설아의 눈이 커졌다.

“감사합니다.”

은설아는 한건우를 피하는 것처럼 몸을 뺐다.

“설아야.”

“저 알아요. 한국에 남아서 여기를 지켜달라고, 그런 말 하시려는 거죠?”

역시 촉이 좋은 은설아였다. 그녀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저도 바보 아니에요.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잘 알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마찬가지구요.”

“....”

“자꾸 혼자 짐을 지고 가려고 하지 마세요. 그럴수록 우리는 미안해져요. 마스터가 비밀스럽게··· 엄청난 적과 싸우고 있다는 걸 아는데··· 능력이 부족해서 못 돕는 스스로가 싫어진다구요!”

다른 이들이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아셨죠?”

은설아는 빙긋 웃으면서 받은 아이템을 챙기고 쪼르르 사라졌다. 더 말을 붙일 새도 없었다.

뭔가 당한 듯한 느낌이었지만.

이젠 뒤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얼마 후, 드래곤이 비호하는 가운데.

공항 활주로에서 스텔스 군용기가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북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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