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224화 (224/238)

#224 만인지적 (13) - 영웅

이비현을 부르고 나서, 물기둥은 곧 휘청거렸다.

‘물 골렘을 불러낸 것이었는데.’

MP가 바닥난데다 집중력도 흐트러져, 골렘의 형상을 이루지 못하고 물기둥처럼 된 것이었다. 그 물기둥마저 힘을 잃자, 한건우는 수면 가까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건우는 공중으로 날아오르려 했지만 실패했다. 과도한 집중력을 쓴 다음이라 그런지. 번아웃이 온 것처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입에서는 갯벌의 진흙 맛이 짭짤했다. 물에 빠졌을 때 순식간에 바닥을 찍고 온 덕분이었다.

‘밀물 때라서 다행이었나.’

무력한 기분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휘유우-

한건우가 있는 수면 위를 크고 검은 그림자가 뒤덮었다.

익숙한 드래곤의 그림자였다.

차악!

드래곤이 앞발을 한껏 펴고, 떨어지는 한건우의 몸을 잡아챘다.

노련한 사냥꾼의 자세였다.

한건우는 드래곤의 앞발에 들린 채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쿠르르- 철썩!

아직도 바다에는 높은 파도가 일고 있었다. 미사일이 날아가 먼 바다로 처박혀서 만들어낸 격랑이었다.

“건우 씨, 괜찮아요?”

드래곤의 날개죽지 너머로, 이비현이 고개를 내밀어 한건우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손을 뻗었다. 한건우를 위로 올려주려는 것이었다.

손을 마주 뻗으려던 한건우는 자신의 장갑을 보며 놀랐다.

“이런, 엉망이군.”

빙룡의 비늘로 만든 전투용 장갑이었다. 이제껏 전투를 함께하면서 군데군데 흠집만 나긴 했지만, 이렇게 크게 손상된 것은 처음이었다. 장갑은 꺼멓게 타고 찢겨나간 채였다.

“헉, 손이···.”

이비현도 깜짝 놀랐다가, 다시 손을 내밀어 잡아당겼다.

탈진한 한건우가 상당히 무거운 모양.

이비현은 온몸에 힘을 주어 한건우를 위로 끌어당겼다. 마침내 성공한 그녀가 숨을 골랐다.

“와, 한 1년은 지난 것 같아요.”

“고맙다. 네가 같이 안 와줬으면 어려울 뻔했어.”

한건우는 이비현에게 감사를 표했다.

“무슨 소리세요. 제가 한 일은 털끝만큼도 안 되는데···.”

칭찬을 듣기가 민망했는지 이비현의 귓가와 목덜미가 붉어졌다.

하지만 한건우는 진심이었다. 1초라도 아쉬운 상황에, 눈치가 빠르고 손발이 잘 맞는 그녀 덕분에 위기를 면한 것 같았다.

고장이 난 것처럼 어색해져 버린 이비현을 그대로 두고, 한건우는 바다 위를 면밀히 살폈다.

“혹시 미사일 잔해가 떠오르지 않았나?”

“잠시만요···. 서해는 수심이 얕고 바닥 경사가 완만해요. 멀리 휩쓸려 가지는 못했을 거예요.”

이비현은 미사일이 떨어진 곳부터 시작해서 주변을 관찰했다. 금방 성과가 있었다.

“저기에요!”

파도 사이로 미사일의 머리 부분이 얼핏 보였다. 그 근처에는 한건우가 찾던 물건이 있었다.

“찾았군.”

드래곤이 수면 가까이 내려갔다. 미사일 끄트머리에 붙어있던 오렌지색의 캡슐이 둥둥 떠올랐다.

“저건 뭘까요?”

“아마 저 안에 서울에 뿌릴 생화학 무기가 들어있을 거야.”

이비현은 흠칫 놀랐다.

“떨어져서 수면에 부딪칠 때 충격이 상당했을 텐데... 용케 터지지 않고 그대로네요?”

이비현의 말이 맞았다. 물은 표면장력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높이 이상이면 콘크리트 바닥 위에 떨어지는 거나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다.

한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미사일의 모양 자체가 공기 저항을 받지 않는 유선형이기도 하지만. 바이러스 살포를 위한 폭약이 따로 있는 것을 보고 이미 짐작했다.

“저 캡슐은 무척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어. 준비한 폭약이 터지지 않는 이상 열리지 않을 거야.”

이비현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지에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살포되어 버리면 곤란하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저걸 가져가시게요?”

“응.”

한건우가 고민 없이 대답하자, 이비현이 머뭇거렸다.

위험천만한 생화학 무기를 가져간다는 게 걱정되어서였다.

“바다에 수장시켜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철괴라도 매달아서···.”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해독제를 빨리 개발하려면 독을 구해와야지.”

“아!”

아직도 도심지의 거리에는 상태이상에 걸린 각성자들이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헤매고 있었다.

‘그러지. 그 사람들을 빨리 원 상태로 돌려놓는 게 급선무야.’

이비현은 수긍했다.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가 새삼 큰 사람처럼 보였다.

*

한건우가 누워있는 회복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민 건 장영표였다.

“마스터!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내셨더군요!”

남들은 이미 한바탕 감탄을 하고 갔는데, 장영표는 한건우가 던져준 연구 거리에 푹 빠져 있다가 뒤늦게 찾아온 것이었다.

“덕분에 미사일을 막을 수 있었어.”

“아닙니다. 알려드리면서도 그걸 사람이 해낼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었는데요. 덕분에 졸지에 저까지 영웅이 되었네요.”

장영표는 문병 온 기분을 내고 싶었는지, 휴게실에 쌓여있던 사탕과 과자를 한무더기 내려놓으며 주절거렸다.

회복실에 누워있는 것은 차은비의 처방을 따른 것이었다. 곧바로 북경으로 모용황을 치러 가려는데, 차은비가 극구 말렸다.

‘MP, HP가 회복되었다고 다가 아니에요! 마스터는 잠시라도 쉬셔야 해요!’

아무리 신체가 멀쩡해도, 정신에 쌓인 피로는 휴식으로만 풀 수 있다고 했다.

한건우도 군대 경험으로 휴식의 중요성을 잘 알다고 생각했지만, 그동안 스스로를 너무 가혹하게 굴려온 것 같았다.

‘차은비 씨 말이 맞습니다.’

한건우는 그녀의 말을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힐러인 차은비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원들마저 얼마나 크게 안도하던지. 한건우가 의아해질 정도였다.

장영표도 그런 마음인지, 회복을 방해하는 걸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아직 마스터의 회복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일 얘기를 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이건 마스터가 듣고 싶어하실 것 같아서요.”

“미사일에서 가져온 생화학 무기 얘기인가?”

장영표가 눈을 반짝였다.

“맞습니다! 그 미사일에서 나온 캡슐과 성유물을 함께 연구하고 있는데요. 저 혼자만이면 어렵겠지만 제 친구들까지 모두 거기에 매달려 있습니다. 상당한 진전이 있다는 것만 알려드릴게요.”

한건우는 입을 떡 벌렸다.

아무리 장영표라도 어렵지 않을까 싶었건만. 장영표와 비슷한 무리가 뭉치니 시너지 효과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태일제와 원유선과 싸울 때. 빌딩 옥상에서 수상한 원뿔 모양의 성유물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전국 고층건물 곳곳에 비슷한 성유물이 놓아져 있었다.

그게 바로 1차 파동을 일으킨 물건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다행이군. 지금은 우리나라에만 이 재앙이 터졌지만, 적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실현시키려고 할 거야. 그렇다면 단순히 드래곤 피어로 막아내기만 해서는 곤란해.”

“그렇죠. 먼저 파동을 일으키는 성유물을 개조해서 역으로 이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장영표는 신나게 작동 원리를 설명하려 했지만, 한건우가 그를 진정시켰다.

“좋아. 어차피 이번 전투가 마지막이 될 테니 비용이나 재료 같은 것은 고려하지 말고 진행해줘.”

“역시! 마스터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최대한 빨리 좋은 소식 가져오겠습니다.”

장영표가 쏜살같이 튀어나간 후, 한건우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을 나왔다.

한건우는 소소가 갇혀있는 방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마력 저감장치에 단단히 묶인 채였다.

눈까지 검은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그녀의 눈을 통해 모용황이 강림해도 앞을 볼 수 없도록 한 것이었다.

아직 <주시자의 뱀>도 소소의 몸 속에 있으니, 소소는 두 명의 감시자가 붙어있는 셈이었다.

“기분이 어때?”

“글쎄요. 적에게 붙잡혀 버렸다는 원통함이라도 느껴야 할까요?”

한건우가 불쑥 말을 걸었지만, 소소는 놀란 기색 없이 그림처럼 미소지었다. 그녀의 눈도 웃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당신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무엇을 말이죠?”

“모용황의 목적, 그리고 당신의 몸의 용도 말야.”

“여전히 직설적이네요, 한건우 씨는.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머리가 굵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고 해두죠.”

“왜 그냥 순순히 있었던 거지? 스스로의 삶을 살고 싶지 않나?”

“후후, 세상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패기가 넘칠 수는 없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그분의 손 안에서 자라났고 지금까지도 한번도 그분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요.”

한건우는 소소의 안대를 벗겼다. 그녀는 눈을 똑바로 뜨고 한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반드시 모용황을 없앨 거야. 그러니 당신도 스스로를 위해 생각하고 움직였으면 좋겠어.”

소소의 동공이 흔들렸다.

“의외로 친절하시네요. 보답으로 말씀드릴게요. 일단 각성자들을 광분화시키는 상태이상은 곧 사라질 거예요.”

“정말인가?”

“1차 파동의 영향이 끝날 시간이 다가와요. 애초에 목적이 100%를 죽이는 게 아니니까요."

한 명도 남김없이 발본색원하려고 한다면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비각성자 상당수를 죽이는 것이 목표라면 열흘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래도 굳이 정상으로 되돌리는 이유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천망에서 균열이 터지는 걸 막는 데에도 한계가 있거든요.”

“!”

한건우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각성자들이 상태이상에 걸린 며칠 동안. 대한민국에 균열이 거의 터지지 않았다.

간혹 균열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평소보다 확연히 적은 숫자였다.

안 그랬다면 벌써 해결 못한 미공략 균열이 속출해서 한반도를 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천망의 기술력이구나.’

지난번 만주 사태 때 보았듯이, 그들은 균열이 터지는 시간을 당길 수 있었다. 당기는 것뿐 아니라 미루는 것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일단 각성자들이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건 다행이군.”

“다만 주위 사람을 죽인 기억은 그대로 남아있으니, 정신적으로 괴로울 수는 있겠죠.”

한건우가 미간을 찡그렸다.

“좋아, 일단 치료제보다는 추후의 공격을 막는 것에 집중해야겠군.”

장영표에게 빨리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 더. 당신은 북경으로 가서 모용황 님을 칠 계획인거죠?”

“맞아. 말리기라도 할 셈인가?”

소소가 고개를 저으면서 서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한건우는 그녀의 표정에서 감정이 고스란히 읽혀졌다. 자신도 한때 저 감정에 휩싸인 적이 있었으니까. 바로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무력감이었다.

“아니요. 어차피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니까. 조심하세요. 그분은 인간이 상상하지 못하는 괴물이에요. 이제 당신이 적대각을 세운다는 사실도 알게 됐으니···. 그분이 어떻게 나올지는 저도 짐작이 가지 않아요.”

“새겨듣지.”

한건우는 길드의 인공 균열을 회의장 삼아, 모두를 불렀다. 넓은 인공 균열이 금방 북적북적해졌다.

비행 마수 군단을 데리고 전국 각지를 커버하던 은설아.

임수호와 임진호를 중심으로 아레스의 길드원들이 우뚝 서 있었다.

언젠가부터 꼭 붙어있는 차은비와 박이경.

그리고 박이경의 뒤에는 알파스의 부하들 한 무리가 기세 등등했다.

한쪽에는 이비현과 그녀가 이끄는 미등록자들이 망토를 입고 조용히 서 있었다.

멕시코에서 갓 돌아온 권석진과 이능력 특수전단도 함께했다. 전투복을 벗지도 못한 채 눈빛이 칼날처럼 벼려진 그들이었다.

각성자들만의 회동은 아니었다.

한국의 대통령과 각료들도 한쪽 자리를 차지했으니까.

마지막으로 거대한 드래곤이 긴 목을 빼서 고개를 숙여, 한건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부터 뜻이 맞아서 움직인 것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함께해줘서 모두 고맙습니다.”

한건우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마음이 무거웠는데.

사람들의 맑고 결연한 눈을 보자 무언가 깨닫는 것이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구나.’

이곳에 모인 모두가 어깨에 자신만의 짐을 지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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