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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먹는 플레이어-220화 (220/238)

#220만인지적 (9) - 비겁한 놈

태일제는 금속 원판 위에 올라서서 높이 떠오른 채로,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금속 물질로 온몸을 방어구처럼 뒤덮어 갑옷을 입은 듯했고, 눈빛에는 순수한 무아지경이 엿보였다.

‘굉장하군.’

한건우는 태일제가 다루는 금속 물질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태일제의 <금속 조작>은 금속의 형태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치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다.

태일제라는 각성자가 가장 압도적으로 싸울 수 있는 전장이 어디인지, 한건우는 알게 되었다.

‘균열 안이 아니라 시가지 한가운데였어.’

현대는 그야말로 금속의 시대가 아닌가.

콘크리트 안의 철근, 기계 부품, 자동차와 건설 기계까지.

도시의 금속으로 이뤄진 모든 것이 한건우를 향해 날아왔다.

한건우는 마치 자신이 철가루를 끌어당기는 강력한 자석이 된 듯했다.

빠르게 날아서 이동해 보았지만, 금속 물질들은 경로만 바꾸어서 그대로 따라왔다.

‘자석이라.’

[특성 발동 : 마그네틱 필드]

한건우는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호텔 옥상에 마그네틱 필드를 펼쳤다.

금속 물질을 잡아당겨 교란하는 특성이었다.

터엉- 터터터터터-

옥상까지 떠오른 1톤 트럭 여러 대가 거칠게 부딪쳤다.

그러나 자기장 교란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아아아아!”

태일제가 더 높이 솟아오르며 혼신의 힘을 끌어냈다.

마그네틱 필드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다른 금속 물질들의 경로를 바꾼 것이다.

끝이 날카로운 철근들이 한건우를 향해 날아왔다.

오랫동안 한국 랭킹 1위였던 태일제.

그런 그가 모든 힘을 아낌없이 소진하여 승부하는 것이었다.

“놀랍긴 하지만.”

한건우는 태연하게 그 자리에 떠 있었다.

“지금은 너 정도의 공격에 죽어줄 수 없어.”

대륙의 지배자들도 죽이고, 그 특성도 흡수한 한건우였다.

태일제를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특성 발동 : 피의 군주]

드 라모트 백작부인에게서 흡수한 특성이었다.

혈술을 쓰자, 냉한 기운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스으-

한건우의 몸은 한순간 피의 안개로 바뀌어 흩어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 강철이 굉음을 내며 부딪쳤다.

치이이익-

강한 산성의 연기에 금속은 실시간으로 부식되었다.

“이럴 수가!”

한건우를 보기 좋게 놓친 걸 알고, 태일제는 경악과 허망함이 섞인 얼굴로 탄식했다.

애초에 한건우를 사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한건우는 태일제의 정수리 위에 가볍게 나타났다.

[특성 발동 : 인드라의 뇌전]

콰르르르- 번쩍!

굵은 번개 줄기가 태일제의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금속은 전격에 취약하니, 방어구도 소용없을 터.

그러나 노익장의 대명사인 태일제답게, 쉽게 급소를 내주지 않고 회피했다.

‘아쉽군.’

태일제를 맞추지 못한 것보다도, 다른 게 아쉬웠다.

‘이전에 한번 <강신>으로 신격의 뇌전을 체험했더니, 그냥 전격은 좀 허전해.’

태일제는 어느새 금속으로 만들어진 단순한 모양의 대검을 들고 있었다. 단거리에 들어온 한건우를 직접 공격하려는 모양이었다.

그거야말로 태일제의 이성이 무너졌다는 증거였다.

체술과 창검술에서, 태일제는 도저히 한건우의 상대가 될 수 없었으니까.

아니, 그 어느 방법으로도 태일제는 승산이 없었다.

마창 게이볼그를 꺼내 몇 합을 주고받기 무섭게, 태일제는 처참한 몰골이 되어 다른 빌딩 옥상에 추락했다.

“원유선처럼 도망가려 하지 않은 걸 높이 산다.”

따라서 착지한 한건우는 무뚝뚝하게 말하며 태일제에게 다가갔다.

태일제는 팔다리가 하나씩 날아가고, 모든 힘을 소모한 채로.

용케 정신력을 유지하며 한건우를 노려보았다.

“처음 자네는 봤을 때··· 그때 꺾어 없앴어야 했어. 이렇게 강해지도록 두었던 것 이 나의 실책이다.”

죽음을 앞둔 것치고는 담담한 소회였다.

한건우는 코웃음쳤다.

그 마음은 한건우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죄없는 사람들이 이 지경이 된 걸 보고도 괴물의 편에 붙다니. 차라리 미리 죽여 없애는 게 나았으리라.

“당신의 실책은 별 것 없어. 단지 선택을 잘못했을 뿐.”

태일제의 굵은 눈썹이 꿈틀댔다.

백발이 가닥가닥 섞였지만, 여전히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한건우의 말에 동요한 것 같았다.

“선택···?”

“그래.”

한건우가 대꾸하자, 태일제가 뜻밖에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태일제가 저렇게 웃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하하! 다른 건 몰라도, 이 내가 선택을 잘못했다는 말은 처음이군.”

“그런가?”

“나는 일평생 최선의 경로만 걸어왔네. 비록 자네 때문에 실패하게 되었지만, 모든 계산에서 이 길이 최선이었네. 그걸 부정할 순 없어.”

“최선이었다?”

“그렇네.”

태일제는 지금의 상황을 아쉽게 받아들일 뿐, 그의 얼굴에는 한 점 후회도 없었다.

‘후회하지 않는다라.’

하긴 그럴 만도 했다.

회귀자인 한건우가 보기에도 태일제의 인생 경로를 생각하면 가끔 놀라웠으니까.

인생 2회차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태일제가 원래 건설 대기업의 임원이었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재벌가의 자식이거나 특별한 배경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입사 동기들처럼 명문대를 나와서 사원으로 시작했다.

죽어라 일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 태일제의 특별한 점은 흐름을 보는 눈이었다. 흔히 ‘정무적 판단’이라고 부르는 감각이 뛰어났던 것이다.

- 중년에 대운이 트이시겠구만!

신점에 능해서 국회의원들이 줄을 선다는 점집에서.

점쟁이가 박수까지 치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그랬다. 세상의 운은 태일제를 선택한 듯했다.

몸담는 파트마다 큰 성공을 거두었고, 순풍에 돛단 듯 승승장구했다.

마침내 신문에도 이름이 나는 기업체 임원이 되었다.

세상에 부러울 게 없던 그 순간.

태일제가 알던 세상이 뒤집혔다.

이름조차 지긋지긋한 균열 발생.

세계는 무질서와 혼돈에 사로잡혔다.

명문대 졸업장이나 대기업의 직책 같은 게 의미없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러나 점쟁이의 말이 맞았던 것일까. 새로 열린 세상은 태일제를 저버리지 않았다.

태일제는 한국 최초의 S급 각성자 중 하나였으며, 그의 과거 경력과 수완은 각성자 사이에서도 빛을 발했다.

많은 각성자들이 힘에 취해 폭주하거나, 어리버리하고 있을 때.

그는 정부의 신뢰를 얻으며 대형 길드를 만들었다.

일성 길드의 자본 규모는 과거에 다니던 대기업보다도 커졌다.

최적의 적응력.

태일제는 타고난 운과 실력을 바탕으로 움직였다.

구세계와 신세계, 양쪽 다 그의 손 안에 있었다.

‘그리고 또 새로운 세계를 맞는 줄 알았더니.’

태일제는 특수안보부의 김도경을 떠올렸다.

태일제는 자신보다 약한 김도경에게 납작 엎드렸다. 새 질서의 흐름이 <아르고스>를 가리키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아르고스라는 조직.

태일제조차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규모였다.

그 조직도 익숙한 점이 하나 있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흔들림 없는 지배권을 가진 자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

세상에 균열과 각성자가 생겨나기 전부터, 그들은 신비한 힘을 다루고 있던 듯했다.

태일제는 간접적인 경험만으로도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전의 같은 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질서를 만드는 유형이 아니니까.’

태일제는 보이지 않는 질서를 읽고, 거기에 빠르게 적응해서 보상을 얻고 싶어하는 자였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지 않던가?

흐름을 읽는 눈이 없거나, 발이 느려서 따라가지 못할 뿐.

모두 능력만 있다면 태일제처럼 살고 싶어하는 줄로 알았다. 바로 이 젊은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한건우··· 대체 자네, 정체가 뭔가?”

태일제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알 필요 없다.”

한건우의 눈빛은 원유선을 끝장낼 때만큼 차가웠다.

그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하듯이 덧붙였다.

“잘못된 선택이 뭐였는지 알려주지. 두 가지야.”

“....”

태일제는 숨을 죽이고 한건우를 마주보았다.

“첫째로, 사람의 편에 서지 않은 것.”

“...?”

태일제는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곰곰이 생각을 하고 나서야, 태일제는 한건우의 말뜻을 이해했다.

허파에서 바람이 빠지듯 헛웃음이 나왔다.

“허허, 고작 그런 얘기인가.”

힘의 편, 질서의 편.

그리고 흐름의 편.

태일제는 그쪽만 끊임없이 바라보았을 뿐, 단 한 번도 ‘사람의 편’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 상황이 되어도, 그런 뜬구름 잡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일제는 자기도 모르게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건우는 두 번째를 말하지 않았다.

스응-

게이볼그의 검은 창날이 번쩍였다.

태일제는 눈을 깜빡였다.

목에 뜨거운 직선이 그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어졌다.

“아니···!”

태일제의 홉뜬 눈이 억울하다는 듯 크게 벌어졌다.

퉁-

태일제의 잘린 목이 바닥에 떨구어졌다.

목을 잃은 몸통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유가 뭐겠어. 뒷방 늙은이가 된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거지.”

도전이라는 걸 해본 지 수십 년이 된 태일제.

한건우가 늘 목숨을 걸고 싸우는 벼려진 칼이라면, 태일제는 안온한 검집 안에서 녹슬어버린 칼이었다.

한건우는 특성창을 잠시 바라보았다.

‘<금속 조작>, <타임 리와인드>, 그리고 <마인드 컨트롤>....’

태일제와 원유선의 특성이 흡수되었다는 점을 확인했지만.

이제는 무거운 중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둘 중 한명의 특성만 흡수해도 스스로 엄청나게 강해졌다고 생각했을 텐데.’

한건우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이제는 모용황을 상대할 때 어느 정도라도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군.’

한건우가 돌아서서 호텔 옥상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소소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비현에게 붙잡혀 목에 낫이 들이대진 채였다.

“웬일로 빠져나가지 않았나?”

이비현이 듣는 앞에서 말하기 미안하지만.

소소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비현의 정도는 뿌리치고 도망칠 수 있다는 걸, 한건우는 잘 알고 있었다.

소소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모용황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 세계를 ‘황혼의 시간’에서 구한다면서? 정작 사람들이 다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한건우 씨, 당신 정말로 다른 주인들을 없애는 걸 성공했군요. 솔직히··· 해낼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맞아. 그 과정에서 당신의 정체도 알게 되었지.”

“네?”

“모용황이 새롭게 사용할 육신.”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호연이나 비현의 몸으로 옮겨가려 했듯이. 모용황은 손녀인 모용소의 몸으로 옮겨가려 했다.

소소는 당황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한건우 씨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나?”

그 사실로 소소를 흔들어보려 했건만.

이미 알고 있다니 소용없게 되었다.

“할아버님, 아니 모용황 님은··· 그 육신은 모용씨의 59대 가주시지만··· 영혼은 모용씨의 초대 가주세요.”

“뭐라고?”

“모용황 님이 돌아가시면, 제가 곧 60대 가주이자, 또다른 모용황 님이 되겠죠.”

“....”

거의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왔단 말인가.

믿기지 않으면서도 역겨운 이야기였다.

“너도 그걸 원한단 말이야?”

“가문의 굴레는 그렇게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소소는 처연하게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강해진 당신을 보아도, 모용황 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을 듯하니···.”

“왜지?”

한건우는 솔직히 지금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지금 소소의 태도는 이상했다.

마치 한건우에게 모용황을 이길 수 있는 힌트를 주려는 것 같았다.

“모용황 님은 단순히 전투력뿐만 아니라 심계도 대단하세요. 인간은 절대 그분을 이길 수 없어요. 다만···.”

모용황은 동안거에 들어있다고 했던가.

그의 감시를 피해 무언가를 말하려던 소소는 갑자기 등을 훅 뒤로 꺾었다.

당황한 이비현이 사슬낫으로 소소의 목을 베려 했지만, 한건우가 제지했다.

소소가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온몸을 뒤틀더니, 급기야 눈이 뒤집혀 흰자위만 보였다.

“물러나.”

한건우가 이비현에게 손짓하자, 그녀는 얼른 소소를 놔주고 거리를 벌렸다.

터억!

한건우가 소소의 목줄기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서서히 눈을 떴다. <화안금정>. 영민한 황금빛 눈동자가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한건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비겁한 놈. 네 몸으로 직접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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