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만인지적 (7) - 태일제
터억!
정남준 대통령은 한건우가 내민 손을 망설임 없이 붙잡았다. 그 뒤를 따라 다른 이들도 하나씩 벙커를 빠져나왔다.
“한건우 플레이어, 정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기분입니다. 약소하나마 뭐든지 보답하겠습니다.”
“우선 몸을 추스리십시오. 아시다시피 한국 전체가 여기 같은 상황입니다.”
“...!”
한건우가 먼저 돌아서서 외부로 나가는 통로를 뚫었다.
‘북한산 대피소로 갔다고 하기에 내심 안심했는데.’
청와대와 비밀통로로 연결된 북한산 대피소.
이곳은 원래 굉장히 안전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만일 대통령이 처음부터 혼자서 도망쳤거나, 소수의 인력만 데려와서 몇 겹의 문을 걸어잠그고 맨 안쪽에 숨어있었다면, 평온하게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20명 정도가 적정 인원일텐데. 한명이라도 더 살리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오셨군요.”
한건우가 정남준 대통령을 흘깃 돌아보았다.
“그러면 뭘 합니까. 다같이 살아남으려 한 것인데, 결국 그러지 못했습니다.”
얄궂게도 현재 남은 사람은 스물 남짓.
정남준 대통령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걸까.
주위에 즐비한 시체를 보고, 정남준 대통령의 가슴이 아렸다.
좀전까지 동고동락하던 자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누워있었다.
속에서 울컥 하고 뜨겁고 알싸한 것이 올라왔다.
‘허탈하군···.’
정남준 대통령의 걸음에 힘이 없었다.
그때 한건우가 나지막히 말했다.
“대통령님, 지금은 죽은 사람 말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볼 때입니다.”
“예?”
대통령이 고개를 들었다.
“세상에. 장관님···.”
“여, 영우야, 네가 이렇게 죽다니···.”
사람들은 참혹한 광경에 사로잡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
대통령의 눈빛에 다시 불씨가 지펴졌다.
그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어깨가 쫙 펴지고, 등은 꼿꼿하게 섰다.
마치 배우가 무대에 다시 올라간 듯했다.
“여러분!”
“?”
“우리는 우선 살아남은 사람의 역할을 합시다!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까지는 치르지 못하겠지만, 얼굴에 천을 덮고 시신을 가지런히 해주십시오.”
“....”
정남준 대통령이 손수 앞장서자, 다들 흐느끼면서 그를 따랐다.
스무 명이 동시에 나서니 시신이 수습되는 건 금방이었다.
사람들도 마음 정리가 되었는지, 점차 결연한 표정이 되었다.
‘시간 낭비는 아니군. 역시 정치인은 다르긴 달라.’
한건우는 속으로 감탄했다.
정남준 대통령은 40대 초반의 젊은 정치인이지만, 이럴 때는 꽤 관록이 느껴졌다.
대통령의 엄숙한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어도, 우리는 여전히 대한민국 정부입니다. 원치 않은 사람은 떠나도 좋습니다. 남을 사람들은 저와 함께 국민을 위해 일해주십시오.”
“!”
사람들의 눈이 반짝였다. 새로운 희망이 불어넣어진 듯했다.
애초에 청와대와 정부 각료 중에서 부패하거나 문제성이 있는 인물은 다 잘라낸 지 오래.
이들은 정남준 대통령이 믿고 중용하는 인재였다.
“우리처럼 살아남은 국민들이 있을 겁니다. 건조식량을 가방에 넣어요!”
“의약품과 붕대는 제가 챙기겠습니다!’
“나가서도 자기 몸은 지켜야지요. 무기도 들어요!”
분위기가 금세 힘차게 바뀌었다.
한건우가 씩 웃으며 정남준 대통령에게 말했다.
“저희 길드 건물로 가시죠. 그쪽이 안전 구역입니다.”
*
아레스 길드 건물 앞 공터에 드래곤이 착륙했다.
대통령을 비롯한 사람들이 엉거주춤 내렸다.
지고의 마수에 올라타 하늘을 날아온 탓에, 모두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키에엑!
“알겠어, 알겠어.”
드래곤이 불만스러운 듯 툴툴거리자, 한건우는 목덜미를 두드리며 달랬다.
정남준 대통령은 말짱한 길드 건물을 경이로운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건우는 그 옆에 다가섰다.
“대통령님, 지금 확실하게 안전한 장소는 이곳뿐입니다. 우리 길드가 가진 시설이나 물자를 편하게 사용하셔도 되니 후방의 구호 활동에 힘써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한건우 플레이어에게는 이래저래 신세만 지는군요.”
“어, 정남준 대통령 아니야?”
“어디?”
“장관들도 보인다.”
구조되어 길드에 머물고 있던 민간인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이 대통령과 각료들을 알아보았다.
“와.”
한건우의 여동생 지윤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대로군.’
민간인들의 반응은 우호적이었다. 정남준 대통령은 대중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었고, 한건우와의 친분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그동안 대통령은 국회의 공격을 받으면서까지 안전 쪽에 크게 투자를 늘리지 않았던가.
국회에 직접 나가서 열정적으로 설득하던 모습이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좋아, 믿고 맡길 만하겠어.’
한건우의 길드 지붕 아래.
일종의 임시정부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한건우는 금해준을 불러 몇 가지를 부탁한 후, 귀에 손을 갖다댔다. 루마니아의 정보 길드, <노네임>의 수장에게 받은 이어폰이었다. 이런 시국에 가장 유용한 아이템이 아닐까.
“박이경, 그쪽은 어때?”
[말도 마시오 형님. 안 죽이고 제압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닌데. 흠씬 두들겨주고 싶은 걸 참았지 뭡니까. 그나마 우리 은비가 방어막을 쳐줘서 나았지.]
옆에서 차은비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박이경은 흐흐 웃으면서 무시했다.
“수가 많은가?”
[이놈들이 파도가 치듯이 활동이 세졌다가 약해지는 그런 리듬이 있는 것 같습디다. 마치 몬스터 웨이브처럼 말요.]
그건 북한산 대피소에 있던 청와대 사람들의 증언과 같았다.
차은비와 박이경은 길드원들을 데리고 길드 주변의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각성자들을 제압하고, 생존자들은 건물 안으로 이동시키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점점 활동반경을 넓혀나가, 길드 건물을 중심으로 반경 3킬로미터 정도까지 이르렀다.
‘안전구역 경비만 요구했을 뿐인데, 기대 이상이군!’
파죽지세 같은 박이경의 기세에 한건우도 혀를 내둘렀다.
한건우는 이어폰의 채널을 바꾸었다.
“비현아, 너는 별일 없어?”
이비현은 솜브라 멤버들을 모아서, 은신 특성을 적극 활용해서 안전한 대피소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확인되는 지점은 곧바로 장영표에게 알려서, 비상 무전으로 계속 안내했다.
[저, 발견했어요. 태일제와 원유선.]
한건우의 표정이 바뀌었다. 한번 <주시자의 뱀>에 보인 이후 그들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 드디어 꼬리가 잡힌 모양이었다.
“어느 쪽이야?”
[테헤란로에 있는 호텔 옥상이요. 더 접근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분명 봤어요.]
“바로 갈게. 가만히 있어.”
한건우는 그야말로 쏜살같이 날아와, 몸을 숨기고 있던 이비현과 접선했다.
“태일제와 원유선 말고. 이성을 유지한 각성자가 더 있던가?”
“아뇨, 이제까지 본 건 둘뿐이었어요. 일성과 환인 길드의 사람들도 몇명 봤지만··· 다들 우리가 본 대로 상태이상에 걸려있어요.”
“저들은 내가 처리할게.”
한건우는 호텔 옥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저들은 강한 자에게 붙어서 살아남기 위해 선을 넘었다.
이제는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저들은 네가 미등록자인 걸 잘 알고 있어. 나에게 덤비지 않더라도 널 죽이려 할 거야.”
“그래도 건우 씨만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비현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그렇다면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날 따라와. 대신 내가 부탁할 때까지는 나서지 말고.”
“알겠어요.”
한건우는 바로 호텔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상태이상에 걸린 각성자들은 한건우를 공격하지 않았으므로, 방해하는 자는 없었다.
한건우는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이제 이비현의 <그림자 맹시>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한건우 말고 다른 이들이라면 그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으리라.
옥상에는 태일제와 원유선이 서 있었다.
그들 옆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성유물 같은 것이 보였다.
사람의 키만한 크기였고,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저 물건이··· 이 사태의 원흉인건가?’
갑자기 나타난 한건우를 보고, 태일제와 원유선은 잠깐 당황했으나, 곧 자연스럽게 한건우를 맞이했다.
“어서오게, 한건우 플레이어. 한국에 없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언제 돌아온 건가?”
“...!”
태일제는 한건우를 반기고 있었다.
한건우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직도 모르고 있는 건가.’
하긴, 이들은 한건우가 모용황의 사람이라고 믿고 있으니.
이 사태도 한건우가 찬성하는 줄로 알고 있는 것이다.
“태일제. 이건 누구의 지시를 받아서 하고 있는 일이지?”
한건우가 반말을 하자, 태일제의 얼굴이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 표정이 비굴하게 보였다.
‘한때 그토록 강인해 보였던 각성자건만.’
한 시대를 풍미하고, 최고의 길드를 키워냈던 자.
강하고 현명하기까지 한 1세대 각성자.
회귀 전만 해도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존재로 보였던 바로 그 태일제였다.
그러나 지금 한건우의 눈앞에, 태일제는 작고 비겁한 노인으로 보일 뿐이었다.
‘자기 자신이 강하면서도, 이 자는 세상의 흐름을 이기려 해본 적이 없어 항상 지배자들이 만든 파도에 휩쓸리고, 그들의 좋은 장기말이 되기만 했지.’
태일제를 바라보는 한건우의 눈이 씁쓸했다.
“누구냐니, 당연한 것 아닌가. 그분의 지시를 행하고 있을 뿐이라네.”
“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한건우 자네가 모르고 있을 리가···.”
원유선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옥상에는 이비현이 말했던 사람들 말고 한 명이 더 있었다.
모용황의 손녀, 소소였다.
“한건우 님, 돌아오셨군요. 일은 잘 처리되었나요?”
소소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한건우는 새삼스럽게 소소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지난번 한건우가 그녀를 살려보내주었을 때.
분명히 소소의 눈에서 무언가 흔들린 기류를 느낀 듯했는데.
‘착각이었나.’
한건우는 일단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었다.
“잘 처리하고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돌아와보니 생각지도 않은 일이 펼쳐져 있더군.”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은 할아버님을 대신해 사과드리겠습니다. 대업에 앞서 작은 실험을 진행해 보는 것이니, 이해해 주시겠지요?”
“대업?”
“황혼의 시간이 다가오면, 어차피 세계를 상대로 벌여야 할 일입니다.”
‘박이경 말대로, 이 사태는 전세계를 상대로 벌이기 전에 한국에서 진행한 실험 같은 것이군.’
한건우는 지금이 결정을 내려야 할 때임을 알았다.
아르고스의 5명의 주인. 그 중에서 모용황과 손을 잡고, 넷을 쳐냈다. 이제 남은 건 모용황 하나뿐이었다.
더이상 연기는 필요없으리라.
“그래, 모용황은 지금 어디 있나?”
“예?”
소소의 그림 같은 미소에 살짝 금이 간 듯했다.
태일제와 원유선이 한건우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빠르게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그 중에서 더 신속하게 반응한 건 원유선이었다.
[특성 발동 : 타임 리와인드]
천 분의 일 초 단위에서.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원유선, 눈치가 빠르군! 시도는 좋았다."
경악하는 그녀의 눈을 보며.
한건우는 느려지는 시간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