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만인지적 (6) - 구하러 왔습니다
한편, 북한산 지하에 있는 비밀 방공호.
청와대에서 겨우 도망친 수십 명이 숨죽인 채 떨고 있었다.
‘지난 며칠은 악몽 같았어.’
며칠 밤을 하얗게 지샌 정남준 대통령은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각성자들이 모두 미쳐버렸다고?’
전국에서 알 수 없는 속보가 잇따라, 국정상황실이 마비된 것이 시작이었다.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하시오! 지금 당장!’
발 빠른 각료들 몇몇이 청와대 회의실에 도착한 그때.
‘크아아악!’
‘머, 머리가 깨질 것 같아!’
각성자 경호원들이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입니까! 힐러를 부르시오!”
쓰러진 이들이 비척비척 일어날 무렵. 그들은 이성을 잃고 공격성만 가득한 괴물이 되어, 동료와 정부 관료들을 덮쳤다.
방금까지 대통령을 지키던 경호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황금색 눈을 빛내며 대통령에게 화염 공격을 시전했다.
화아-
‘어?’
그러나 화염의 구슬은 생각보다 약했다. 한마디로 피할 만했다.
당황하던 대통령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그래, 이곳은 회의실 안이었지!’
청와대 회의실과 접견실 안에는 각성자의 마기를 제한하는 장치가 걸려있었다.
원래 각성자의 테러에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이렇게 쓰여질 줄이야.
퍼억!
대통령은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연막탄을 바닥에 던지고, 각성자 경호원을 밀쳤다.
그의 머릿속에는 북한산 방공호로 향하는 비밀 통로가 떠올랐다.
‘살고 싶으면 따라오시오!’
대통령은 위험을 무릅쓰고 소리쳐 사람들을 불러왔다. 혼자 몸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꽤 많은 인원이 헐레벌떡 따라왔다.
그중에는 비각성자인 경호원과 군인도 있어서, 도망치면서 대응사격을 해주었다.
타앙-
투두두-
상태이상에 걸린 각성자들이 통로로 뒤쫓아왔지만.
대응사격에 주춤하며 잠시 물러났다.
‘우리 살았어···.’
‘오, 감사합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일어나세요! 공격은 계속 들어올 겁니다. 바깥에 방어선을 구축해야 합니다!’
‘예, 옙!’
대통령이 직접 명령을 내리며 현장을 지휘했다. 직원들이 무기고에서 구식 화기를 꺼내왔다. 총을 놓은 지 오래된 나이든 각료들까지 자원했다.
그렇게 3선 방어선을 구축하고, 미쳐버린 각성자들의 공격을 버텨냈다. 부상자는 뒤로 끌어내 치료하며, 방공호를 지켰다.
화강암 지반에 지어진 대피소는 튼튼했다. 어지간한 외부 공격에는 끄떡 없는 수준이었다.
무기와 비상식량, 상비약품도 있었다.
그러나 수십 명이 바깥과 단절된 채로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만은 없는 상황.
턱!
비서실의 젊은 행정관이 정남준 대통령의 옷소매를 덥썩 붙잡았다.
“저어, 여기서 얼마나 더 버텨야 할까요?”
그 행정관은 쓰러지려는 몸을 대피소 벽에 기댄 채, 새파래진 얼굴로 숨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평소라면 하급 행정관이 대통령에게 직접 질문할 리가 없겠지만. 지금은 보고 체계고 뭐고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음.”
정남준 대통령의 이마에 깊은 고심의 흔적이 드러났다.
한눈에 보기에도 젊은 행정관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한쪽 무릎 아래가 흔적도 없이 날아간 상황.
직원들이 겨우 소독해서 붕대로 압박해 놓기는 했으나,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진실을 말해야 하나?’
정남준 대통령은 잠깐 고민했다.
국가를 이끄는 사람으로서 항상 진실만 말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국민이나 하급자에게 정보를 제한할 필요가 있었고,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한 거짓말도 필요했다.
바깥과의 통신이 일시적으로 두절되었지만, 기술자들이 복구하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곧 구조대가 올 거라고.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것을 택했다.
“여기서 바깥과 연락할 방법은 전화와 인터넷망 뿐입니다만, 전파 방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의도적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
비서실 행정관의 얼굴이 더욱 새파래졌다.
장관과 총리, 청와대의 수석들도 멍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능력 특수전단은 아쉽게도 해외 파병을 가 있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그들도 바깥에 있는 각성자들과 같은 상태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아···”
행정관은 세상이 다 끝난 듯 체념한 표정이 되었다. 주위 사람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다들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던 내용이지만.
대통령의 입으로 듣자 분위기는 더욱 침울해졌다.
“그렇다 해도 섣불리 포기하지는 맙시다.”
대통령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바깥의 상황은 모릅니다. 여기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수도 있지만, 희망이 싹트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쉽게 죽어 주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대통령은 밝은 표정으로 긍정적인 기운을 불어넣었다.
“각하.”
상황실로 들어가자, 정무수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할 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바뀐 상황은 있습니까?”
“3선 구성된 방어선도 위태롭습니다. 포위망이 줄어들지 않고 점점 많은 각성자들이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남은 식량은 얼마나 됩니까?”
“원래 이 방공호의 적정 수용인원은 20명 정도인데, 한참 초과했습니다. 적절히 줄여서 배식하면 몇 주는 더 버틸 수 있습니다.”
“의약품은 부상자에게 바로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포위망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에게 식량과 물을 충분히 배분해주세요. 제 배식부터 먼저 줄여주시고요.”
“각하.”
“괜찮습니다. 지금은 이곳을 지켜주는 사람들에게 지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정무수석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나갔다.
대통령은 의자에 앉았다. 마치 연기를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온 배우처럼, 그의 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후우, 이렇게 대한민국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이 될 줄은.’
사람들 앞에서는 비관적인 소리를 하지 않았으나, 정남준 대통령의 냉철한 두뇌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각성자 전부 다 저런 현상이라면, 우리는 그저 시간을 벌다 죽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나마 한건우와 박이경, 그리고 이능력 특수전단 같은 강한 각성자들이 해외에 있는 게 불행 중 다행일까.
그들이 돌변해 국민을 공격했다면 지금 서울에는 살아 숨쉬는 생명이 없을지도 몰랐다.
웨에에엥!
“!”
비상벨이 울렸다.
각성자들의 습격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마치 몬스터 웨이브 같군.’
대통령이 이를 악물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각성자들은 일정한 간격을 가지고 밀려왔다.
투투투투!
남은 화기가 불을 뿜었고, 방어포탑도 작동을 시작했다.
원래 마수들이 침입할 경우를 대비해서 만들어진 대 마수용 포탑이 사람을 향해서 불을 뿜었다.
두우웅-
터엉!
이번에 몰려온 각성자들은 신체강화형이 많은 듯했다. 총알이 부딪혀 튕겨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총알 더!”
내부의 비전투인원 역시 놀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탄약을 가져다주고 부상자를 후송하는 는 등 보조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적들 중에서도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각성자가 있는지, 간간히 마력 화살이 날아왔다.
바리케이트에서 고개를 내민 군인이 눈먼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부상자들은 얼른 안쪽으로 옮겨! 빨리!”
정남준 대통령은 바리케이트의 빈틈으로 달려갔다. 쓰러진 군인을 대신해서 그가 총을 잡았다.
‘신이시여!’
다행히 각성자들은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입로가 좁은 통로로 되어 있어 공격 루트가 단순한 덕이었다.
쉬리릭-
정남준 대통령의 머리 위. 통로 천장을 타고 검은 괴물체가 움직였다. 박쥐처럼 새카만 옷자락 끝에서 칼날이 번뜩이는 게 보였다.
스르륵-
“안돼, 안쪽으로 침입한다!”
“암살자 계열 각성자야!”
아래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비웃듯, 한 각성자가 천장을 타고 침투하여 본진 안쪽을 휘저었다.
“크아악!”
“아앗!”
군인들과 전투원의 무기는 총기밖에 없었다.
빠르게 쇄도하여 근접 공격하는 각성자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투두두-
퍼억!
겁에 질려서 뒤쪽으로 총을 쏘는 군인을 정남준 대통령이 몸으로 밀쳐냈다.
“함부로 후방을 쏘지 마, 아군을 맞힌다!”
군인들은 총기에 대검을 장착하여 총검술로 맞섰으나, 애초에 신체능력에서 각성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내부에 단 하나의 적이 침투했을 뿐인데.
방어력이 분산되자, 금방 각성자들이 접근해 왔다.
“후퇴! 후퇴! 다들 벙커 안으로 들어간다!”
정남준은 더 큰 희생이 발생하기 전에 외부 방어선을 포기했다. 가장 깊은 벙커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쪽에 숨어들어온 암살자 때문에 후퇴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혼란스러운 그때.
정무수석이 대통령에게 온몸으로 부딪쳐 왔다.
푸욱!
암살자가 찌른 칼날에, 정무수석의 복부가 너무나 쉽게 뚫려버렸다.
스으으-
황금색 눈을 빛내던 암살자는 다시 박쥐처럼 천장으로 올라갔다.
“민석아!”
정남준 대통령이 소리쳤다.
“대통령님··· 빨리 나머지 사람들 데리고 들어가십시오. 여기는 제가 막겠습니다···.”
정무수석은 양손에 수류탄을 쥐고, 사람들과 반대로 바리케이트 쪽으로 나아갔다.
“미안하다.”
정남준 대통령은 다른 부상자를 부축하고 벙커 안으로 들어가 두꺼운 철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 사이
드드드드···.
멀리서 다른 각성자들이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박쥐처럼 매달린 암살자 계열 각성자가 다시 정무수석을 노리고 칼을 휘둘렀다.
팅-
정무수석이 수류탄 핀을 멀리 던졌다.
콰앙-
철문을 닫는 순간.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벙커의 철문은 끄떡없었고, 바깥은 조용해졌다.
“....”
비좁은 벙커 안에 스무 명 정도가 모여있었다. 그들은 살아남았지만, 그 사실을 기뻐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남준 대통령조차도 아끼던 정무수석의 죽음에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각하, 다시 공격이 들어옵니다.”
“...그렇군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각성자들이 다시 두터운 철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차라리 폭탄이라면 버티겠지만, 최소한의 지능은 있는 상태인지 문고리 쪽으로 공격이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남은 사람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철문이 열리는 순간, 화력을 집중할 준비를 했다.
문 바로 앞에는 정남준 대통령이 소총을 들고 서 있었다.
끼에에엑-
바깥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괴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두꺼운 철문을 뚫고 들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미친 각성자들로 모자라서 마수까지 왔단 말인가.
사람들이 절망에 빠지려는 가운데, 적의 공격이 멈추는 듯했다.
퉁. 두웅.
갑자기 철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어리둥절했다.
철문은 계속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정남준 대통령은 그 소리를 듣다가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라 사람들에게 외쳤다.
“이건 모스 부호입니다!”
옆에 있던 군인 한 명이 모스 부호로 변환한 내용을 총검으로 바닥에 기록했다.
“한··· 건··· 우···?”
“세상에! 한건우 플레이어가 구해주러 왔나봐!”
“이제 우린 살았다!”
사람들이 안쪽에서 문을 열려 했다.
그러나 철문 자체가 비틀어진 데다 문고리가 부서져서, 문은 제대로 열리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새로운 간격의 소리가 들려왔다.
퉁. 퉁. 투웅.
해석을 마친 군인이 외쳤다.
“모두 물러나세요!”
지이잉-
잠시 후, 흰 광선이 철문을 뚫으며 네모난 궤적을 그렸다. 폭발에도 버티는 두꺼운 철문이 두부처럼 잘려나가고 있었다.
타앗-
쿠우웅-
잘려나간 철문이 안쪽으로 쓰러졌다.
“구하러 왔습니다, 대통령님.”
한건우가 벙커 안으로 들어와 손을 내밀었다.
그의 뒤쪽에는 새하얀 광선의 편린이 후광처럼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