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216화 (216/238)

#216만인지적 (5) - 움직여 볼까

벙커 안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지나갔다.

그랬다. 지금 바깥 세상은 그전에 본 적이 없던 혼돈이었다.

최근 이 정도의 혼란이 있었던가? 비슷한 경우를 찾으려면, 아마도 균열이 처음 발생했을 때 정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쿠웅- 콰앙-

그때 누군가가 지하 벙커의 철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에구, 이분들 참!”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장영표가 얼른 달려가서 문고리를 돌렸다.

“건우 형!”

“건우 형!”

임진호와 임수호였다.

쌍둥이가 동시에 외치자, 널찍한 벙커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형제의 뒤를 따라서, 아까 마주했던 금해준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그새 민간인들을 안내해주고, 형제를 불러서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오랜만이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야.”

너무나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굳어있던 한건우의 표정도 풀렸다.

“형, 설아는 바깥에 있어. 같이 들어오고 싶어했는데, 지금 밖을 지키느라고.”

테이머인 은설아가 자리를 뜨지 못한다는 걸 보니, 새로운 마수가 나타난 모양이었다.

한건우가 형제들과 짧은 해후를 나누는 동안, 이비현이 장영표에게 조용히 물었다.

“장영표 씨,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요.”

“옙, 뭡니까?”

“이 근처의 각성자들은 드래곤 피어 덕분에 상태이상에 안 걸렸다면서요. 그러면 적이 한번 더 같은 파동을 보내면, 언제든지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한마디로 2차 웨이브가 오지 않겠냐는 물음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이 스쳤다.

“뭐, 그때마다 드래곤이 막아줄 수 있지 않을까? 드래곤 옆에 딱 붙어다니면 되겠네.”

박이경은 낙관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그래도 좋고요! 지금은 일단 준비중인 게 있습니다.”

장영표가 작업 탁자를 탕탕 내리쳤다.

그러자 실험실 문이 열리고, 장영표처럼 키가 작고 땅땅한 인상의 사람들이 바퀴가 달린 기계를 낑낑대며 끌고 나왔다.

“이 분들은?”

“저와 교류하던 아이템 장인들입니다. 다들 숨어 지내던 미등록 각성자라서 별 탈은 없었지만, 세상이 이렇게 되자 다들 저희 길드로 도망쳐 왔죠.”

한건우의 표정이 오묘해지자, 장영표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변명했다.

“....”

“장인들의 실력은 보장합니다! 아참, 금해준 매니저님과 얘기해서 길드 입사도 하기로 했고요. 기밀 엄수 때문에 그러시면···.”

한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상관없어. 아이템 장인들이 길드에 들어와준다면 환영할 따름이지.”

“휴우.”

천재 아이템 제작자 장영표와 교류하던 장인들이라면 보나마나 엄청난 인재일 게 분명했다.

장영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궁금한 건, 이분들과 어떻게 연락을 취했냐는 거야. 지금 전국적으로 전파 방해가 일어나고 있을 텐데?”

“아하, 그건 쉽습니다. 저희 같은 아이템 장인들은 통신망이 없는 곳에 사는 경우가 많아서 평소에 아마추어 무선을 하거든요.”

군대에서 오래 굴러본 한건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의아한 눈치였다.

임수호가 장영표에게 물었다.

“아마추어 무선? 그게 뭐죠?”

“개인들끼리 하는 무선을 말하는 겁니다. 재난 상황으로 전화 기지국이 날아가도, 이걸로 소통할 수 있죠.”

“그거··· 꼭 각성자가 아니라 일반인도 할 수 있는 거죠?”

“당연하죠! 일반인들이 훨씬 더 많이 할걸요.”

“건우 형, 그러면···.”

임수호가 한건우를 돌아보았다.

그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 듯했지만, 한건우는 일단 손을 들어 막았다.

중요한 것부터 짚고 넘어가야 하니까.

“잠깐, 그래서 준비했다는 이건 뭐지?”

한건우는 장인들이 끌고 온 기계를 살펴보았다. 레이더 원판과 첨탑을 합쳐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어찌 보면 트럼펫 같은 관악기 같기도 했다. 아직 미완성인 듯 내부 구조가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다.

“드래곤 피어로 인해서 파동이 깨지는 걸 봤지 않습니까? 드래곤 피어의 마력은 흉내내지 못하더라도, 딱 음파만 따라하는 기계를 만들어본 겁니다.”

“좋아, 이건 옥상 근처에 설치하는 게 좋겠군.”

한건우가 선뜻 받아들이자, 장영표가 데려온 아이템 장인들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오오! 진짜잖아!”

“이걸 바로 받아준다고?”

“얼마가 들었냐고 묻지도 않고?”

장인들이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장영표는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자신있게 말했다.

“내가 말했지! 우리 마스터는 이렇게 쿨하시다고.”

“오오오!”

“....”

한건우의 눈이 가늘어지려는 무렵.

장영표가 미소를 지은 채로 한건우에게 물었다.

“마스터에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지금 외국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한국과 똑같나요?”

한건우와 차은비, 박이경, 그리고 이비현.

좀전까지 동유럽에 있다가 돌아온 일행의 눈이 마주쳤다.

“전혀.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단서조차 없었어.”

유럽 전역에 정보망이 깔려있다는 정보 길드 ‘노네임’, 그리고 루마니아의 고위층들과 전날까지 교류하고 있었다. 무슨 소식이 들려왔다면 누구보다 빨리 알 수 있었으리라.

“한국에만... 이런 일이 일어났다구요?”

차은비가 중얼거리자, 박이경이 받았다.

“뭐, 어쩌면 시범 케이스로 한국에 먼저 터트려 본 걸지도 모르지!”

모두의 시선이 이번에는 박이경을 향했다.

“응?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시죠들?”

소가 뒷걸음질로 쥐를 잡는다더니.

박이경은 은근히 핵심을 잘 짚는 것 같았다.

한건우가 턱을 쓸면서 말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 각성자 등록 시스템은 세계 각국에 다 있다지만, 가장 치밀하게 운영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니까.”

이비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희 솜브라에서는 한국 각성자의 97%가 등록 각성자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미등록자는 3% 정도에 불과하다는 거죠. 외국에 비하면 엄청나게 극단적인 수치에요.”

“그 정도라고?”

“네. 그러니까··· 등록 각성자에게 뭔가를 실험해 보려고 한다면, 한국이 가장 적합한 테스트 베드인 셈이죠.”

그 말을 들은 차은비는 고개를 미미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녀는 아직도 미심쩍다는 얼굴이었다.

“뭐, 그렇다 치고요. 아까 이비현 씨가 보여준 일지에 나온 대로라면··· 각성자 등록은 ‘자신의 통제권을 내주는 행위’라면서요? ‘코드에 접근하는 백도어를 열어주는 것’이라고도 표현했고.”

“?”

장영표는 ‘일지’라는 말을 듣고 눈을 빛냈지만,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차은비가 물었다.

“대체 등록 각성자에게 무슨 공통점이 있길래 그런 게 가능할까요?”

모두가 궁금한 질문이었다. 그 답을 알아야만 이 현상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 이비현은 매우 쉬운 문제라는 듯 거침없이 답했다.

“등급 측정이죠.”

“등급 측정?”

“각성자 등록은 아시다시피, 단순히 이름과 주민번호를 수집하는 데서 끝나지 않아요. 등급 측정실에서 마석에 손을 대고 등급 측정을 한 것 기억하시죠?”

“흠, 미등록자이면서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구만. 정작 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말이야.”

박이경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아까 차은비 씨가 말했죠? 각성자는 각각 하나의 종처럼 다르다고요.”

“맞아요. 유전자가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각성하고 나면 전혀 딴 사람이 된다구요. 그런데 그게 왜요?”

“등급 측정을 하면서, 그런 생체 정보까지 수집하는 게 분명해요. 그러면 각성자들을 타겟팅해서 공격할 수 있죠.”

차은비가 입을 딱 벌렸다.

역사 속에도 있었던 이야기였다. DNA 같은 생체정보를 수집해서 맞춤형 독극물을 만드는 식이었다.

“아니, 각성하면 국가에 등록하도록 법으로 정해놓고. 설마 국가 차원에서 그런 짓을···.”

그러나 차은비는 말을 맺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솔직히 그녀도 인정했다.

‘특수안보부라면 그보다 더한 짓도 못할 이유가 없어. 특수안보부의 배후에 그런 국제 조직이 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

한건우는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눌 얘기는 다 나눈 것 같고. 앞으로 할 일을 정리해야겠군.”

사람들은 한건우의 입만 바라보았다.

사실 그들은 이 순간을 위해 기다린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먼저 사태가 장기화될 걸 대비해서, 금해준 네가 후방에서 길드원들을 이끌어 줘야겠어.”

“예? 제가요?”

금해준은 전투원이 아닌 터라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우리 길드 건물을 중심으로 해서, 안전구역을 조금씩 넓혀갈 거다. 미처 지하 대피소로 들어가지 못한 민간인이 있으면 구조해서 여기로 데리고 오도록 하고, 그 관리를 맡아줘.”

“예, 알겠습니다!”

민간인 얘기가 나오자, 금해준은 몸을 사릴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굳건한 표정으로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이경, 너희 알파스 길드원 중에서도 일부를 차출해서 안전구역 경비에 합세해줘.”

“물론이죠.”

“그리고 이비현. 너희 솜브라는 특별히 해줄 일이 있어.”

“뭐든지 말씀하세요.”

“지하 대피소 중에서 안전한 곳도 있고, 이미 뚫린 곳도 있을거야. 안전한 곳들을 찾아내 줘.”

“네, 알겠어요.”

“민간인이 발견되면 거기로 보내도록 하고, 방송도 해야겠어.”

“방송이요?”

한건우는 장영표 쪽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탁 튕겼다.

“비상 상황이니, 분명히 민간인 중에서도 아마추어 무선을 켜보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그들을 향해서 안내 메시지를 계속 보내면 돼.”

“아하!”

아까 임수호가 제안하려 했던 것도 딱 그거였는지.

임수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 숨어있는 미등록자도 모아야 할 거야. 혼자 있다가는 사냥당하기 십상이니.”

“...네.”

한건우는 방금 본 장면을 되새겼다. 태일제와 원유선이 제정신을 유지하는 걸 보면, 미등록자를 사냥할 용도로 남겨놓은 이들이 더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장영표, 무선통신으로 멕시코의 군 기지에 보낼 메시지가 있어.”

“뭡니까?”

멕시코 얘기가 나오자, 박이경과 차은비가 퍼뜩 놀랐다.

“앗, 그러고 보니 거기에 권석진 대장님이랑 대원들이 있었죠!”

“맞네. 거기 쭉 있었으니 정신도 멀쩡할 테고 말야.”

한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명의 도움이라도 아쉬운 판국이었다.

그리고 권석진 대장의 성격이라면, 이 상황에 한국으로 안 돌아오고는 못 배길 것이다.

“권석진 대장과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에게 무선으로 긴급 복귀 요청을 보내줘.”

“문제 없죠. 뭐라고 보내면 될까요?”

“국가 비상사태라고 한 마디만 적어도, 바로 돌아올 거야.”

그리고 나서 한건우가 벌떡 일어났다.

“자, 그럼 움직여 볼까.”

일행은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 일어났다.

그때 금해준이 당황해서 손을 들었다.

“마스터, 잠깐만요. 후방에서 뭘 해야 할지는 다 들었습니다만. 마스터는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그밖에 다른 일들을 처리해야지.”

“네?”

“우선은 대통령을 구출해 오겠다.”

한건우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드래곤이 날개를 쭉 펴고 기다리고 있었다.

펄럭-

크게 날개를 펼치는 소리가 났다. 짙은 보라색의 드래곤이 순식간에 창공으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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