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214화 (214/238)

#214만인지적 (3) - 변수 처리

“설명해 봐.”

정보는 가장 큰 힘. 이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거라면 뭐든지 알아야 했다.

“예전에 특수안보부에서 제 부모님을 왜 죽이려 했었는지. 그 이유를 기억하시죠?”

이비현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건우가 그걸 잊을 리 없었다.

“부모님께서 각성자 등록 시스템 도입을 반대하고, 숨겨진 비밀을 대중에 밝히려고 하셔서.”

“맞아요.”

이비현은 버스 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흉포한 각성자들을 흘깃 바라보았다. 한건우는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잠깐. 저게 다 각성자 등록 시스템 때문이라는 거야?”

“아마도요. 어머니의 일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이비현이 한쪽 페이지를 가리켰다.

꾹꾹 눌러 쓴 필체에서 심각한 감정이 느껴졌다.

- 각성자 등록 : 자신의 통제권을 내주는 행위.

코드에 접근하는 백도어를 열어주는 것.

- 모든 각성자의 무기화.

비각성자를 적대시하고 공격하도록 만든다.

- 시스템 배후에 숨어있는 진짜 관리자는 누구??

“....”

호연이 예언자도 아닌데. 꼭 지금 일어나는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쓴 것만 같았다.

차은비도 이쪽을 기웃거렸다. 어깨 너머로 일지를 읽은 그녀의 표정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이게 뭐예요?”

“이 사태의 원인일지도 모르는 내용입니다.”

“형님, 그래서 거기 해결방법도 나와 있수?”

운전석에서 박이경이 뒤도 안 돌아보고 물었다.

차은비가 끙 하고 머리를 부여잡으며 대신 답했다.

“지금 상황이랑 딱 들어맞긴 하는데, 해결방법은 딱히 안 써진 것 같은데요···.”

한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해결책이 나와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어디요? 뒤에 나와있나요?”

“<시스템 배후에 숨어있는 관리자>.”

한건우가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뱉듯이 말했다.

이비현은 일지를 돌려받아 갈무리했다.

“그게 바로 모용황이라는 자인가요.”

한건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행의 얼굴이 잠시 놀라움이 스쳤다.

“마침 잘 됐구만요! 안 그래도 쳐죽이려던 놈이 먼저 나타나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백미러에 비친 박이경의 입가에는 진득한 웃음이 걸렸다.

“하하, 그런 셈인가.”

한건우는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박이경의 사고방식이 가끔은 명쾌할 때가 있었다.

‘그렇다면···.’

한건우는 버스 안의 의자에 걸터앉아 몸을 기댔다.

“비현아, 주위를 잘 감시하고 있어.”

“네.”

이비현이 군말 없이 돌아서자, 한건우는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 눈을 감았다.

‘주시자의 뱀, 활성화.’

스스스···.

눈을 감기 전.

한건우의 눈이 파충류처럼 세로로 쭉 째졌다.

모용황의 손녀, 소소에게 주시자의 뱀을 심은 이후.

이따금씩 그녀의 시야를 확인해 왔다.

여태까지는 별다른 게 없었다.

깊은 산속에서 일상생활을 하거나, 아니면 자는 것처럼 암흑만 보이기 일쑤였으니까.

‘진짜 모용황이 배후라면, 이 여자도 움직이겠지?’

지난번에 소소가 자신을 도와주려는 듯, 모용황은 곧 동안거에 들 거라고 귀띔을 했는데. 그건 그냥 속임수였을까?

한건우는 생생하게 꿈을 꾸는 것처럼 소소의 시야로 들어갔다.

서울의 도심 한복판. 초록빛 풀밭이 내려다보였다.

‘주변 지형지물을 보아하니 이곳은 서울시청 앞 광장이군. 빌딩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건가.’

여느 때라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사람들로 가득하리라.

그러나.

쿠우우-

[으아아아!]

[엄마, 엄마!]

사방을 채우는 것은 비명과 혈향이었다.

상태이상에 걸려 황금빛 눈을 빛내는 각성자들이 무표정으로 시민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

토끼몰이.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각성자들은 방어구를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각자의 무기를 꺼낸 채였다. 각성자들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검을 휘두르고, 활을 쏘았다. 심지어 아이, 어른을 가리지도 않았다.

[으으, 총만 있었어도···.]

[각성자들이야. 총 가지고는 안돼.]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 대피소에서 만나!]

여기서 조금만 가면 지하 대피소가 있을 터였다.

원래도 도시 곳곳마다 대피소가 있지만, 마침 최근에 더 튼튼하게 확장하는 공사를 했다.

- 만주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이 언제 한국 땅에서 벌어질지, 여기 있는 아무도 장담 못하시지 않습니까!

정남준 대통령이 국회를 설득해서 적극적으로 추진해서 만든 시설이었다.

미처 대피소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열심히 뛰었지만.

각성자들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하급 각성자라 하더라도 보통 사람을 아득히 뛰어넘는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각성자들의 추격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크으윽]

[으아! 꺼, 꺼져!]

사방으로 흩어진 사람들은 하나하나 추격되어서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있었다.

‘안돼!’

이걸 막기에는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한건우는 속수무책으로 주먹을 쥐었다.

대피소 쪽으로 도망치는 한 무리의 사람들 주변으로.

마치 늑대 떼가 사냥하듯이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소소의 감정이 한건우에게 흘러들어왔다.

기뻐하거나 즐거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냥 덤덤했다.

‘뭐지?’

소소는 여느 때와 달리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 주위로 다른 각성자들이 서 있었다.

‘저들이 왜 이곳에?’

그들의 정체를 안 순간, 한건우는 내심 놀랐다.

바로 두 명의 원로 S급들.

일성 길드의 태일제와 환인 길드의 원유선이었다.

‘저들은 어떻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거지? 모용황이 저들만 봐준 것인가, 아니면 강한 각성자에게는 상태이상이 먹히지 않는 것일까?’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었지만.

그들 셋은 묵묵히 살육의 현장을 수수방관하며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소소가 다시 아래로 시야를 내렸다.

상태이상에 걸린 각성자들에게 포위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시민들이 보였다.

[주, 죽었다···.]

[이제 끝이야.]

상당수는 체념한 듯,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였다.

오랫동안 일반인들은 생활 속에서 각성자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지냈다. 그들이 이렇게 막강하다는 사실도.

[비켜, 새끼들아, 비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고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이들도 있었다.

[막내야, 아빠 손 잡아!]

[아앙!]

무리에 있던 아이가 사람들의 거친 움직임 때문에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안돼!]

[으아아앙!]

아이의 아빠가 비명을 질렀고,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보였다.

‘이런 제기랄! 지금 날아가도··· 이미 늦었어.’

한건우는 이 장면을 보면서도 주먹에 피가 나도록 꽉 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저벅, 저벅.

금안을 빛내는 각성자 하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에게 다가왔다. 그가 배틀액스를 높이 치켜들자,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쉬이익-

무리 안에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그가 맨손 날로 각성자의 목을 쳐 날려버리면서 아이를 구해냈다.

‘저 사람은?’

한건우가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이비현이 알려준 정보 덕분에, 한건우는 그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미등록 각성자구나!’

일반인 사이에 숨어 평범하게 살아온 미등록자인 모양이었다. 그가 맨손으로 전투 자세를 잡았다. 한건우는 한눈에 그가 상당한 실력자임을 알아보았다.

‘다행이군.’

그 미등록자는 박이경처럼 신체 강화 계열의 특성을 가진 듯. 빠른 몸놀림과 강인한 힘으로 주변의 각성자들을 멀리 날려버렸다.

‘이 현장에 있는 각성자 중에서는 제일 강하겠는데.’

상태이상에 걸린 각성자들은 미등록자에게 선뜻 반격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마 같은 각성자에게는 공격성이 쉽게 발동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일대 다수의 상황인데도, 제압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한건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고 할 때.

소소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도 한 명 숨어있었군요. 움직여 주세요, 두분 다.]

[굳이 우리가 내려갈 필요가 있나요? 당신 하나로도 차고 넘치겠는데요.]

원유선이 반항하듯이 말했다. 그러자 소소가 냉소를 지으며 반박했다.

[우습군요. 이제 와서 손에 피를 묻히기 싫다는 겁니까?]

[....]

원유선은 못마땅한 얼굴이 되었지만, 딱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명심하세요. 두 분이 인간의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저희 주인님의 배려 덕분이라는 걸 말입니다.]

[알고 있소.]

태일제가 대답하자, 소소가 생긋 웃었다.

[잘 알고 계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저렇게 미등록 각성자들이 존재하는 한 주인님의 대업이 방해될 여지는 충분합니다. 얼른 처리해 주세요.]

소소는 그 말을 마치더니 살짝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곧 태일제와 원유선이 빠르게 각성자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어어!]

[태일제 길드장님이다!]

다른 각성자와 달리 태일제와 원유선의 모습은 멀쩡해보였다.

시민들은 당연히 그들이 자신을 구해주러 온 것이라 믿고, 희망이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도 잠시.

팅-

태일제는 일언반구도 없이 금속 구체를 꺼내 공중으로 튀겼다.

금속 구체는 곧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미등록 각성자를 향해 쇄도했다.

푸욱!

미등록자는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쇠로 된 칼날이 목에 박힌 채 죽어버렸다.

시민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태일제를 바라보던 순간.

[가만히 있어.]

원유선이 암시를 걸며 속삭였다.

시민들은 거짓말처럼 발이 묶여버렸다. 무거운 바위에 묵인 것처럼, 옴짤달싹 할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려고 해도, 혀가 무쇠처럼 무거워졌다.

일을 마친 두 사람은 곧바로 등을 보이며 그 자리를 떠났다.

[크으으으-]

상태이상에 걸린 각성자들이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소소가 눈을 돌려 피했기에, 한건우도 그 다음 장면은 볼 수 없었다.

뼈를 부수고 살을 찢는 끔찍한 살육의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빌어먹을!”

한건우가 차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순간 버스가 기우뚱거렸다.

“건우 씨, 괜찮아요?”

옆에 있던 이비현이 놀라서 물었지만, 한건우는 아직도 충격과 분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놈들, 죽여버려야겠어.

“누구를요? 정말 그 모용황이라는 사람이···.”

한건우가 가끔 명상과도 같은 독특한 상태에 빠질 때면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얻어온다는 걸, 이비현은 잘 알고 있었다.

“배후에 그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지금 막아야 할 놈들은 따로 있어.”

“누구죠?”

차은비가 물었다.

“태일제와 원유선이 그쪽에 붙었어.”

차은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태일제는 그녀의 옛 고용주였던 것이다.

“그 영감탱이들이 그럴 줄 알았다!”

박이경은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한건우가 <주시자의 뱀>으로 자신이 본 상황을 가감 없이 설명하자, 이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이 현상은 상태이상에 빠지지 않은 각성자들이 있다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도 있겠어요.”

“그렇지. 눈깔만 이상해지는 게 아니라 지능도 좀 떨어지는 것 같으니. 제정신인 각성자들이 조금만 있어도 금방 제압할 수 있을 거야.”

“맞아요. 제압은 어려워도 최소한 민간인을 대피시킬 때까지 시간을 끄는 정도라면야.”

박이경과 차은비가 맞장구쳤다.

“그래서 그 변수를 없애기 위해 태일제나 원유선 같은 강한 각성자들을 포섭해서, 미등록 각성자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긴 것 같군.”

한건우가 생각을 정리했다.

“건우 씨, 더 큰 희생을 막으려면 빨리 가야 할 것 같아요. 이 속도로는 무리예요.”

이비현의 냉정한 조언을 듣고, 버스 뒤에 타고 있던 민간인들이 이쪽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들을 버리고 갈까봐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맞아. 아무래도 기동력이 필요하겠어.”

“먼저 따로 가시겠어요?”

“조금만 기다려 봐.”

이제 개인 플레이보다는 모든 아군들의 힘을 모아야 할 때였다.

한건우는 버스 지붕 위에 올라가서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는 서리거인의 뿔피리가 들려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