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만인지적 (2) - 상태이상
모용황의 길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것만 같았다.
아직까지 한건우는 말을 아꼈다.
‘너무 앞서나갈 건 없어. 증언을 들어보고 판단하자.’
승무원은 그 당시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떨리는 듯. 손발을 떨고 있었다.
“저희는 경비대원들에게 공격받은 거예요.”
“공항 경비대원들 말입니까?”
승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 전 브리핑을 끝내고, 선배님들과 같이 비행기에 타려는 참이었어요. 갑자기 경비대원들이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푹푹 쓰러지는 거예요.”
“쓰러졌다고요?”
“네, 저와 선배들은 놀라서 멈춰섰고, 응급조치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그쪽으로 가까이 갔죠. 몇몇 대원들은 상태가 심해 보였어요. 입과 코에서 검은 피를 흘리기도 하고···. 귀에서 피가 흐르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가만, 여기 경비대원 제복 입은 시체는 하나도 없는데?”
시체 무더기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던 박이경이 물었다. 승무원은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뻔했지만, 시체 쪽인 걸 알고 멈추었다.
“맞아요. 경비대 사람들, 죽을병에 걸린 게 아니었어요. 어느 순간 보니까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성을 잃고 완전히 미친 사람들처럼···. 우리들을 공격했어요. 말도 하나도 안 통했고요.”
“공격이요?”
“네. 공항 경비대원들, 전부 각성자거든요. 당해낼 수가 없죠···. 저도 불덩이 같은 걸 맞고 쓰러졌던 것 같아요.”
“다른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까?”
“아, 있어요. 눈이에요.”
“눈?”
“경비대원들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변해 있었어요.”
황금색 눈동자로 변한다니.
모용황의 <화안금정>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뭔가 핵심적인 증언은 안 나오는데.’
생각한 대로였다.
평소 극한상황을 안 겪어본 일반인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제대로 된 증언은 기대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공포심 때문에 사실보다 훨씬 과장하기 일쑤고,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도 나중에 알아보면 영 딴판인 경우도 많으니까.
한건우가 턱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가 부서진 CCTV 카메라를 눈여겨보았다.
“고마워요, 도움이 됐습니다. 혹시 CCTV 실은 어딥니까?”
“앗, 저를 따라오세요!”
승무원이 종종걸음으로 길을 안내하다가, 구석구석 박살난 카메라를 보았다.
“다 부서졌을 텐데요. 워낙 난리가 나서.”
“카메라가 부서져도 원 데이터만 남아있다면 괜찮습니다. 이틀 정도라면 녹화 자료가 지워지지 않았을 겁니다.”
일행이 승무원을 따라간 곳은 공항의 보안관제실.
수십 개의 모니터 중에서 반쯤은 부서져 있었지만, 다행히 본체는 살아있었다.
“여기 컴퓨터와 TV도 있네요.”
이비현이 반가워했다. 한국에 왔는데도 휴대폰 기지국이나 인터넷이 잡히지 않아서,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뉴스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 이런.”
그러나 컴퓨터와 텔레비전을 켜본 이비현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전원에 불만 들어올 뿐, 인터넷도 안 되고, 방송이 잡히지도 않았다.
“기기가 켜지긴 하는 걸 보니 EMP탄이 터진 건 아닌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자기판의 회로를 다 태워서 문명을 멈춰 버리는 EMP탄이 터졌다면, 민간 피해는 어마어마하게 커졌을 것이다.
“그럼 뭐요?”
박이경이 이비현의 어깨 너머로 기웃거리면서 물었다.
그 답은 한건우가 알고 있었다.
군대에서는 익숙한 방식이었으니까.
“전파 방해. 기기 자체는 멀쩡하지만, 통신이 되지 않게 하는 거지.”
“흠, 그럼 CCTV도 소용없는 것 아닙니까?”
“CCTV는 폐쇄회로라서 괜찮아.”
박이경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문제없다는 말로 이해하고 다가왔다.
한건우는 승무원에게 들은 대로, 이틀 전 09시로 시간을 조정했다. 모니터에는 수십 개로 분할된 공항 구석구석의 모습이 잡혔다.
“이, 이게 저예요!”
승무원이 모니터 한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캐리어를 끌면서 바삐 이동하던 중, 쓰러진 경비대원들을 보고 다가가는 승무원들이 보였다.
각성자 경비대원들은 곧 비척비척 일어나며 일반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승무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건우가 말했다.
“공항 경비대가 계획한 테러 같은 건 아니군. 일단 공격이 즉흥적이고, 특성의 합이 전혀 안 맞아.”
화염 마법을 쓰는 자에게 워터 캐논을 끼얹지 않나, 각성자들끼리 서로 방해되는 특성을 쓰는 경우도 많았다.
굳이 말하자면 계획 없는 폭동에 가까워보였다.
“공항 같은 중요시설을 공격한 것이면, 무언가 목적성이 있을 법도 한데요. 이 자들은 사람을 공격하는 것 말고는 아무 데에도 관심없어 보여요.”
차은비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상한 게 더 있구만요.”
박이경도 끼어들어서 모니터 구석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방금 여기 보십쇼. 공항 경비대만 이러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음?”
“이 사람은 그냥 탑승객인데, 각성자긴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합세해서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 이놈도요.”
“그렇군.”
경비대와 다른 손님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로 보였다.
그런데도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비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군.”
“왜 이런 무차별 공격을 한 걸까요?”
차은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무차별 공격이 아니에요. 규칙이 있어요.”
이비현이 단언했다.
한건우가 말을 받았다.
“딱 한 가지, 규칙이 있긴 하군요. 바로 각성자가 비각성자를 공격한다는 겁니다.”
“....”
차은비와 박이경은 모니터 화면을 신중하게 지켜보았다.
실제로 그랬다. 각성자는 각성자끼리 싸우지 않았고, 일반인은 일반인끼리 싸우지 않았다.
오로지 각성자가 일반인을 공격하고, 일반인은 그에 맞서 보려다가 처절하게 당할 뿐이었다.
마치 균열에서 마수를 일방적으로 사냥하는 듯. 잔혹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었다.
“잠깐만요, 여길 보세요!”
대기실 한가운데.
실시간 생방송 뉴스가 나오는 커다란 화면이 CCTV 모니터에 잡히고 있었다.
- [긴급][속보] 청와대에 이어 국회의사당도 붕괴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이 연기에 휩싸여 반파된 영상이 보였다.
“...!”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곧 뉴스 방송이 끊기더니 회색으로 바뀌는 게 보였다. 그러나 이미 한가하게 뉴스를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항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건우가 승무원에게 물었다.
“경찰이나 정부 구조대는요. 도움을 청했습니까?”
“네, 도망가면서 신고는 했는데, 아예 전화가 안 터졌어요···.”
“그때부터 전파 방해가 시작되었군.”
“아···.”
승무원은 오지 않는 정부 구조대를 기다리며 시체 더미 밑에서 이틀을 견뎌냈다.
끔찍한 시간을 되새기던 승무원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아무리 그래도···. 공항이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 아무도 와보지 않았다는 건 이상한 것 같아요. 바깥에 또 무슨 일이 있나요?”
잠시 조용해졌다. 모두 한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육지의 상황까지 내다본 사람은 한건우였으니까.
“아마, 공항 바깥도 마찬가지 상황인 것 같습니다.”
“어어···? 그럼 우리 엄마 아빠랑, 동생은···.”
승무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구조돼서 밖에만 나가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가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우리도 막 도착해서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민간인 대피소가 있으면 내려드리죠. 가족 분들은 거기서 찾아보시죠.”
정부가 제 기능을 하고 있다면 말이지만, 같은 뒷말은 굳이 붙이지 않았다.
한건우는 공항버스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장치에 전격을 튀겼다. 다행히 연료는 충분한 상태. 그들은 버스에 탄 채로 공항 밖으로 나왔다.
“세상에.”
차은비가 버스 창밖을 보며 탄식했다.
마치 영화에서 보던 아포칼립스 후의 세계 같았다.
도로 곳곳에는 부서진 차들이 연기를 뿜으며 놓여 있었고, 간간히 쓰러진 사람들도 보였다.
길가에 쓰러진 이들을 확인해 보았으나, 대부분 죽은 채였다. 간신히 목숨만 붙은 이들을 발견하면, 버스 가운데에 태웠다.
“형님, 운전은 제가 맡죠.”
박이경이 버스 운전대를 넘겨받았다.
한건우와 이비현은 빠른 속도를 십분 활용해서 바깥의 상황을 살펴보았고, 차은비는 버스 뒤에서 치유에 여념이 없었다.
차은비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봐요. 생존자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각성자들이 일종의 저주나 상태 이상에 걸린 것 같기도 한데. 이렇게 선택적으로 각성자들만 노리고 저주를 걸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요.”
“이거···뭐 바이러스? 그런거 아냐? 딱 그런 느낌인데 말야.”
운전대를 잡은 박이경이 말을 보탰다.
“각성자만 걸리는 바이러스도 있어요?”
차은비가 쏘아붙였다.
한건우는 창밖 먼 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모용황 그 자의 짓인 것 같은데. 목적이 뭐지? 그가 한국에 들어온 건가.’
마음이 무거웠다.
‘혹시 내 의도를 알아채고 이런 상황을 유도한 건가?’
이비현이 한건우에게 물었다.
“건우 씨, 이게 각성자들을 노린 상태이상이라면, 왜 저희는 무사한 걸까요?”
“글쎄, 현재로서 가장 유력한 추측은, 이 현상이 시작될 때 우리가 한국에 없어서일 것 같은데.”
“아니면 일정 수준 이상의 각성자는 상태이상에 내성이나 저항을 가진 걸지도 몰라요.”
차은비가 덧붙였다. 그것 역시 가능한 이야기였다. 아까 영상에 나온 공항 경비대나 각성자 승객들 중에서, 그다지 높은 수준의 각성자는 없었으니까.
“글쎄. 그랬다면 상급 각성자들이 이미 상황을 정리했을걸?”
박이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우리 길드 건물로 가자. 박이경, 도착해서 너희 길드원들도 챙겨봐.”
“옙.”
아레스와 알파스는 길드 건물도 사이좋게 붙어 있었기에, 마침 목적지가 같았다.
“으음···.”
한건우, 박이경, 이비현은 각자 각성자 조직의 리더였다.
자기 길드원들도 상태 이상에 걸려있을까봐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영종대교를 넘어 육지로 진입하는 길.
끼익-
박이경이 차량을 급정차시켰다.
“형님! 앞에 군인들이··· 어?”
스물 남짓의 무리가 서 있었는데, 군복은 입고 있었지만 어딘가 군인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저 사람들··· 그 상태이상에 걸린 것 같아요. 영상에서 본 모습과 비슷해요.”
이비현이 환도를 꺼내며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저들이 버스에 달려든다면 차체가 무사하지 못할 터. 버스에 가까이 오기 전에 처리해야 했다.
“형님, 어떻게 할까요? 전부 제압하고 돌파할까요?”
박이경이 바로 뛰쳐나갈 듯이 얘기했다.
“아니, 일단 내가 나가서 살펴볼게.”
버스에서 뛰어내린 한건우는 <그림자 맹시> 특성으로 땅 그림자에 은신한 채 그들에게 접근했다.
어지간한 수준의 각성자라면 한건우의 은신을 절대 알아챌 수 없었다.
‘수준 높은 각성자들은 아니야.’
한건우의 기감이라면 틀림 없었다.
그러나 각성자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뭔가를 찾는 듯한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번쩍!
그들의 눈은 일제히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어, 짐승 떼 같은 인상을 주었다.
‘감각이 무척 예민해진 건가? 내가 이 정도면, 은신이나 위장으로는 이들을 피해가기 어렵겠어.’
스윽-
한건우가 <그림자 맹시>를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각성자들의 시선이 순간 한건우에게 몰렸다.
그러나 바라보기만 할 뿐, 공격이 날아오지는 않았다.
‘같은 각성자에게는 공격적이지 않은 듯하더니, 진짜군.’
이들을 치워야만 버스가 지나갈 수 있는 상황. 게다가 이 정도로 예민한 감각이라면, 버스 안에 있는 일반인들의 낌새를 눈치채고 달려들지도 몰랐다.
[특성 발동 : 그래비티 필드]
한건우는 중력 가중으로 그들의 무릎을 꿇렸다.
“그어억!”
“크으으으!”
각성자들은 동물처럼 기괴한 소리를 냈지만.
한건우의 어마어마한 힘에 저항할 실력자는 없었다.
한건우가 수신호를 하자, 박이경이 버스를 출발시켰다.
부우우우-
버스가 각성자들 근처에 오자, 허우적대는 몸놀림이 강해졌고, 저항력이 느껴졌다.
“그와아악!”
황금색 눈동자는 분명히 버스 안의 비각성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굶주린 늑대가 양떼를 보는 시선도 그보다는 유순할 정도였다.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을 알아채는 감각이나 그 집요함은 오싹할 정도였다.
한건우는 짧게 한숨을 쉬며 버스에 탔다.
“보통이 아니야. 일반인들이 이들을 피해서 도망치는 건 쉽지 않겠어.”
이비현도 걱정스러운 시선이었다.
“이 버스로 길드까지 갈 수 있을까요? 도심으로 들어가면 사방에서 습격당할지도 몰라요.”
“그전에 대피소에 들르면 상관없어. 저들이 노리는 건 비각성자니까.”
“저어···.”
이비현은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듯.
고민하다가 한건우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왜 그래?”
“이 상황, 아무래도 여기 적혀있던 내용과 관련이 있는 건가 해서요.”
이비현은 어머니의 유품인 일지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