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만인지적 (1) - 대체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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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렁- 푸우-
박이경은 코를 크게 골았고, 차은비는 안대와 귀마개를 쓴 채로 곱게 누워있었다. 둘 다 깊이 잠든 것 같았다.
‘저들은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 여독이 쌓였겠지.’
한건우는 동이 터오는 비행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비현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
“아직 멀었어요?”
“거의 다 왔어. 조금 더 자.”
이비현이 한건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깜빡였다. 포털이나 군용 헬기 같은 빠른 이동수단에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민간에서 타는 전용 여객기는 느리게 느껴졌다.
“아녜요.”
잠이 깬 이비현은 망토 속에 소중히 품고 있던 일지를 꺼냈다. 녹슨 자물쇠로 잠궈져 있는 오래된 일지로, 손때가 반질반질했다.
“그건···.”
한건우가 주저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과의 전투가 끝나고, 노네임 길드원들이 라모트 성을 수색할 때.
그들은 고위 혈족들의 개인 방 같은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죽은 호연의 간단한 소지품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저 가죽 일지였다.
“열어주세요.”
비현의 생각을 알아채고, 한건우가 일지를 잠근 자물쇠 위에 손을 얹었다.
[특성 발동 : 잠금 해제]
마력이 들어간 잠금장치에는 효과가 없고, 구식 잠금장치를 여는 데 쓰이는 기초적인 특성이었다.
차칵!
이비현은 잠금이 열린 자물쇠를 소중하게 품에 넣었다. 그녀라면 구식 자물쇠 정도야 쉽게 분해해버릴 수 있겠지만, 어머니가 남긴 것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도 간직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옛날 일기장이에요.”
일지를 편 이비현이 속삭였다.
그로부터 한참.
이비현은 옆에서 일지를 조용히 읽어내려갔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가끔씩 울컥하는 듯 눈가가 붉어지거나 웃음이 새기도 했다.
‘죽은 자의 영혼과 대화할 수 있다는 <연옥경>을 얻지 못한 게 다행일지도···.’
한건우는 이비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연옥경을 얻으면 처음에야 좋겠지만, 현실로 되돌아오지 못한 채 어머니와의 추억 속에 갇혀버릴지도 몰랐다.
죽은 이의 얼굴을 생생하게 보지는 못할지라도. 유품을 보며 추억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이비현의 눈빛이 변했다.
“어?”
“왜 그래.”
“한건우 씨. 여기 이상한 내용이···.”
이비현이 일지를 한건우에게 보여주려던 참이었다.
쿠오오오-
비행기가 폭풍을 지나가는 듯이 거세게 흔들렸다.
“!”
“공격인가!”
박이경이 벌떡 일어나 눈을 뜨며 전투 태세를 취했다. 차은비도 안대를 올리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폭발이 일어난 곳은 여기서 한참 멀었다. 폭음이 들려온 방향과 거리를 재어본 한건우가 말했다.
“아니, 한국 쪽이야.”
공항 근처로 온 비행기가 하강하지 않고 빙빙 돌기 시작했다. 한건우는 곧바로 조종석으로 다가가 콕핏의 문을 두드렸다.
“왜 착륙하지 않지?”
“인천공항과 통신이 두절됐습니다! 부쿠레슈티로 선회하겠습니다.”
창문을 통해 지상을 내려다본 한건우가 조종사에게 명령했다.
“그럴 순 없지. 예정대로 착륙하시오.”
“...하지만.”
조종사는 억울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헉.”
일반인인 조종사로서는 한건우가 뿜어내는 기운을 버틸 수 없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을 구한 영웅이자 귀빈이니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를 받은 터였다.
‘어쩌지.’
육안으로 보아도 활주로 상황은 깨끗했다. 조종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비상 착륙합니다.”
조종사가 눈을 질끈 감고 하강 레버를 밀었다.
슈우웅-
비행기가 급하강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어.”
“이상했으면 진작 말했어야죠!”
뒤에서는 박이경과 차은비가 티격태격대고 있었다.
“차은비 너, 루마니아에서 위성전화 빌렸었잖아. 그때 한국이랑 연락 됐어?”
“어··· 안 터졌는데. 그냥 가끔 있는 먹통 아닌가요?”
차은비의 얼굴에도 설마 하는 불안감이 스쳤다.
예전처럼 바다 건너까지 전화와 인터넷으로 실시간 연결되는 시대가 아니니.
불안해도 확인해볼 방법은 없었다. 직접 두눈으로 보는 수밖에.
터엉- 터더더더-
활주로에 내려온 비행기가 땅을 퉁기듯이 부딪쳤다.
“비행기 운전 똑바로 안 하나?”
추락을 간신히 면한 거친 착륙에 박이경이 불만을 터뜨렸다.
“이상하네요.”
차은비가 오싹하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뭐가?”
박이경의 물음에, 조종석 쪽에서 돌아온 한건우가 대답했다.
“활주로 근처에 아무도 없군.”
해외여행을 쉽게 가는 세상이 아니니, 비행기 수가 적은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항 활주로 인근에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였다.
“유령 공항 같아요. 이게 대체 뭐죠?”
화물을 싣는 차량이나, 수신호를 주는 직원 등. 움직이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을씨년스러운 광경이었다.
쿠웅-
쿠오오-
공항 근처 벌판에서, 또다시 폭발음이 들렸다.
“가스 폭발일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한건우는 힘으로 비행기 문을 열었다.
드르륵!
“잠깐 올라가서 살펴보지.”
파앗!
한건우는 빛의 날개를 펴고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몇백 미터 높이로 올라가자, 멀리까지 한눈에 내다보였다.
“흠···.”
서해바다 쪽은 조용하고 평화로웠지만.
영종도 건너편 육지는 그야말로 난리통이었다.
넓은 지평선 군데군데, 회색 연기가 기둥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희미하게 작은 폭음이 이어졌다.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여동생 지윤이였다.
‘다행히 지윤이는 괜찮은 것 같은데.’
여동생에게 패시브로 걸어놓은 최상위의 보호 특성, <신성한 보호>는 잠잠했다.
지윤이의 신상에 무슨 일이 있었다면 한건우가 제일 먼저 느꼈으리라.
‘인천 주위에만 사고가 터진 걸까?’
아니면 길드원들이 이미 지윤이를 보호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슈웅- 타앗-
한건우가 가볍게 착지했다.
일행은 비행기에서 내려 한건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종도 건너편, 육지 쪽에 문제가 있습니다.”
“건우 씨.”
“음?”
이비현이 긴장한 말투로 인천공항 건물 쪽을 가리켰다.
“....”
멀리 볼 것도 없이.
공항 건물부터 엉망이었다.
마치 거센 쓰나미가 건물 안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건물 전면의 유리창은 다 깨져 있었고, 내부의 집기도 나동그라진 채였다.
직원이나 손님은커녕, 살아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안 보였다.
“무슨 일이 터져서 다 대피한 것 같은데요?”
차은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전투 태세를 갖추고 공항 건물 안쪽으로 진입했다.
건물 내부는 더욱 가관이었다.
평소라면 귀국을 환영하는 인파나 취재진들이 진을 치고 있을 곳이지만, 그런 광경은 없었다.
불에 타서 검게 그슬린 곳, 반대로 물바다가 일어난 곳, 건설기계가 와서 때려박은 것처럼 부서진 곳···.
그때 이비현이 계단에 가려진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저길 보세요!”
“허억.”
차은비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숨을 삼켰다. 숱한 전투 현장을 봐왔던 차은비지만, 이 장면에는 충격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망할. 어떤 새끼야.”
박이경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비현이 가리킨 곳에는 공항 직원과 승무원들의 시체가 무더기를 이뤄서 산처럼 쌓여있었던 것이다.
“...민간인들이군.”
한건우마저 인상을 찌푸렸다.
각성자나 군인도 아닌 비전투원, 민간인들.
그것도 유니폼을 입고 일상생활을 하고 있던 평범한 직원들의 시체라,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차은비가 조심스레 다가가서 그들의 시신을 살폈다.
“죽은 지는 며칠 됐어요.”
시신의 마지막 얼굴에는 공포와 괴로움이 역력했다. 균열이라는 게 처음 터졌던 순간. 이계의 괴물을 처음 목도한 시민들의 최후가 이랬을까.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차은비가 분노에 차서 중얼거렸다.
박이경은 시체 무더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바닥을 쓸어보기도 하고, 부서진 기둥을 만져보며 사고의 흔적을 신중하게 살펴보았다.
박이경이 손을 털고 일어나면서 한 마디 하려는데, 한건우가 딱 잘라 말했다.
“각성자의 짓이야. 한둘이 아니고. 그런데 상급 각성자는 아니었던 것 같군.”
“엇, 제가 하려던 말입니다, 형님.”
그러던 중.
“끄으···.”
“잠깐.”
한건우는 분명히 미세한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가 기감을 끌어올렸다.
시체 더미 밑에,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다.
“왜 그러세요?”
한건우는 중력을 조정하면서, 시신을 한 구씩 조심히 들어냈다. 마침내 희미하게 숨을 쉬는 생존자가 나타났다.
생존자는 승무원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여자인 것은 알 수 있었으나, 온몸이 화상으로 뒤덮여서 신원을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부상을 입은 채로 며칠간 시신 더미에 깔려 있던 터라, 승무원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취약해 보였다.
“도와, 주세요···.”
승무원이 마지막으로 젖먹던 힘을 짜내서 도움을 청했다.
“세상에!”
차은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생존자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손에서 은색 빛무리가 피어났다.
사아아-
성스럽고 따뜻한 빛이 승무원의 온몸을 감싸더니, 그녀를 괴롭히던 끔찍한 통증이 물러났다. 피로까지 덜어져 가뿐해졌다.
승무원의 온몸을 뒤덮고 있던 화상 흔적이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졌다. 낯빛도 점차 건강한 분홍빛으로 돌아왔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입으로 들어온 듯, 어린 티가 나는 승무원이었다.
“어어···?”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승무원은 어리둥절해서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폈다 접어보기도 했다.
놀랄 만도 했다.
보통 사람은 S급 힐러가 해주는 치유는 평생 구경조차 못해보니까.
“히야, 역시 대단하긴 해.”
박이경은 차은비를 뚫어질 듯 부담스럽게 바라보았다.
기적을 일으킨 성녀라도 보는 눈이었다.
승무원이 입을 딱 벌렸다.
전국적인 유명인사인 차은비와 박이경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었다.
“앗, 설마!”
“쉿. 고마움의 표시는 나중에 따로 만나서···.”
“뭐라는 거예요 정말!”
차은비가 습관처럼 박이경의 등짝을 찰싹 때리려다가, 끄응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생존자는 더 없을까요?”
“공항 건물 안에는 이 사람이 유일한 생존자 같군.”
기감을 한껏 끌어올렸지만,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건우와 이비현이 다가오자, 승무원은 이제 놀라서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아니···!”
딱!
한건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공항 전체에 생존자이자 목격자는 이 어린 승무원 한명뿐.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말해보세요. 공항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한건우는 승무원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기세에 위압된 듯, 승무원이 목을 움츠렸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 터라 정신이 혼란스러웠지만. 승무원은 마음을 다잡고 기억을 더듬었다.
“저, 사고가 일어난 시간 하나는 똑똑히 기억해요···. 제가 첫 비행을 준비하던 시각이거든요. 21일 아침 09시.”
“...!”
이틀 전 아침.
다른 이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한건우의 직감이 발동했다.
‘한국과 루마니아 간의 시차는 7시간. 한국이 7시간 앞서지···.’
그때는 바로 아소카 싱과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사망했을 무렵이었다.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모용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