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루마니아 (14) - 기적은 있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무서운 특성, <피의 군주>.
그 특성을 가진 그녀는 흡혈로 사람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타인을 권속으로 만들어 부렸다.
<피의 군주>로 부리는 혈술 역시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산성을 띤 피의 안개와 연기, 창과 채찍, <아이언 메이든>까지. 형태도 자유자재로 변했기 때문이다.
아소카 싱의 <강신>, 그리고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피의 군주>.
마치 무적처럼 보여서 그토록 애먹었던 힘이, 이제는 한건우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성공인 건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침내 아르고스의 주인 4명을 다 사냥했어.’
이제 남은 건 첫 번째 주인, 모용황뿐이었다.
지난번 한건우는 모용황에게 제안했다.
둘이서 2강 체제를 만들어서 세상을 갖자고.
모용황과의 힘 겨루기 끝에, 모용황은 그 제안에 화답했다.
- 직접 증명해 보게! 다른 주인들의 위에 올라서고, 다른 주인들과 같이 예언 석판을 가져온다면···. 그때는 자네도 주인으로 인정할 수 있겠지.
솔직히 그쪽에서 한건우를 주인으로 보든 무엇으로 보든, 한건우가 알 건 없었다. 다만 모용황의 입장이 궁금했다.
‘모용황이 아직도 내 말을 믿고 있을까?’
의심하고 있다면, 그는 어떻게 나올 것이며, 거기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자세히 알 수 있을 턱이 없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이제까지와 비교도 안 될 만큼, 가장 어렵고 위험한 전투가 될 거다.’
한건우는 위험을 앞두었을 때, 반대로 침착해지는 편이었다. 그의 눈빛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형님,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너는.”
박이경이 한건우에게 다가왔다.
<거인화>가 풀렸어도 태산 같은 거구였다. 노네임의 길드원들이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완전히 회복하려면 차은비 씨가 더 분발해 줘야겠지만요.”
“아직도 농담이 나와요?”
찰싹!
차은비가 박이경의 등을 야무지게 때렸다.
아까 백작부인의 공격을 막느라 다쳤던 곳이었다.
치유를 받고 대강 아물긴 했지만, 완치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윽! 아야!”
“어머, 이걸 어떡해. 정말 죄송해요.”
차은비는 발까지 동동 구르면서 박이경에게 절절맸다.
박이경을 보는 그녀의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게 느껴졌다.
그동안, 무명의 노인은 백작부인과 그 권속들의 흔적이 남은 불길한 성을 둘러보며 명령했다.
“너희들은 조를 짜서 성안을 순찰해라. 아직 무엇이 남아있을지 모른다. 구석구석 성수를 뿌리며 정화해야 하겠어.”
“저희도 함께 하겠습니다.”
길드원들과 같이 온 이능력 특수전단의 부대원들도 거기에 합세했다. 그들이 어둑한 성안에 불을 밝히고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
“....”
한건우는 이비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느끼면서도, 그쪽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원망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
어머니를 되찾아 주겠다고, 너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이비현에게 한껏 호언장담한 게 무색했다.
이비현이 반평생을 찾아 헤매던 어머니 호연은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다.
한건우의 가슴이 울컥했다.
‘보통의 권속들은 저주에서 풀려난 듯한데, 이비현의 어머니는 대체 왜···?’
- 저 계집은 금제의 고통을 버티느라 힘을 너무 많이 썼군. 혈족의 힘을 잃는 순간, 몸이 가루가 되어 버릴 거다.
백작부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짜였다. 백작부인이 죽으면서 혈족의 속박이 사라지는 순간, 호연은 백작부인을 뒤따라가듯이 먼지처럼 스러져버렸다.
금제의 고통이란 게 대체 뭔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호연을 살려낼 방법은 없었을까. 더 성공적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후회가 되는 게 사실이었다.
“건우 씨.”
이비현이 한건우를 부르며 살며시 다가왔다.
한건우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회귀한 이후 오랜만에 자책과 후회가 밀려와,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고마워요.”
“!”
이비현의 작은 목소리가 천둥처럼 귓가를 때렸다.
설마 감사를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건우는 깜짝 놀라서 이비현을 돌아보았다.
“건우 씨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전 엄마와 제대로 얘기 한 번 못 해봤을 거예요.”
“....”
“하마터면 저도 백작부인에게 납치되어서 몸을 빼앗길 뻔했고요.”
한건우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더 잘했다면···.”
이비현의 붉은 머릿결이 확 흩날리는 게 보였다. 그녀가 한건우에게 폭 안겨온 것이었다.
한건우는 잠시 엉거주춤한 채로 서 있다가, 곧 이비현을 마주안았다.
잠시 숨죽여 안겨있던 이비현이 몇가지 얘기를 더했다.
“아까 제가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영혼이 옮겨갈 그릇이 될 뻔했다는 건 아시죠?”
“음···.”
“그런데··· 어머니가 중간에 정신을 차리고, 절 구해주셨어요. 오랫동안 혈족으로 살아오면서도··· 저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으셨던 거예요.”
“그랬군.”
한건우도 마음이 먹먹했다. 강력한 속박을 이겨낸 호연의 정신력이 새삼 대단했다.
“다른 혈족들을 공격한 행동··· 그리고 주인인 백작부인을 거역한 것. 그게 금제에 걸린 모양이에요.”
“....”
한건우는 신음을 흘렸다.
강력한 금제를 어긴 데서 온 후폭풍. 이비현의 어머니 호연은 그걸 정면으로 받은 모양이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한건우가 말했다.
“어머니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셨구나.”
이비현은 한건우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로 소리없이 울었다.
그녀의 손목에서 어머니가 남긴 <미스릴 체인>이 구슬프게 맑은 소리를 냈다.
*
“완전히 귀빈 대접이군. 멕시코시티 주민 놈들도 이런 걸 좀 본받아야 하는데.”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
호화로운 잔칫상을 마주한 박이경이 눈을 번쩍 떴다.
“매일 돼지에 소에 염소까지 마구 잡아서 구워먹었으면서. 못 먹고 지낸 것처럼 그래요?”
“고기값은 충분히 쳐 줬다고! 그리고 너도 나눠줬잖아.”
차은비와 박이경은 언제부턴가 지나치게 친해져서, 항상 딱 달라붙어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저희는 늦게 와서 뒷처리만 도왔을 뿐인데, 민망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특수전단 대원들의 손은 식탁을 오가며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이 융숭한 대접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동유럽에 드리워져 있던 흉흉한 그림자가 사라지고. 많은 권속들이 저주에서 풀려났다.
저주에서 풀려난 권속들은 백작부인에게 조종당하던 때의 기억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다.
권속들의 입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루마니아를 비롯해 동유럽의 밤거리에서 실종된 많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뱀파이어 권속들에게 싱싱한 피를 공급하는 살아있는 탱크 역할이었다.
‘확실해요. 저쪽입니다!’
동유럽의 버려진 고성 지하실 곳곳에서.
많은 생존자들이 풀려났다.
‘이제 살았다!’
밝은 태양을 다시 본 생존자들은 감격하며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풀려난 권속과 생존자들이 일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최면을 이용한 치유술사들이 나섰다.
언론 보도에서는 그들이 사악한 각성자 범죄집단에게 납치되었다가 돌아와 회복 중인 정도로 정리되었다.
「오랜 납치극의 생존자들!」
「기적은 있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어쨌든 그 덕에, 한건우 일행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루마니아 정부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이비현의 어머니도 함께했으면 좋았을텐데.’
한건우의 얼굴에 아직 그늘이 어려 있는 것을 보고, 이비현은 그의 손을 잡으며 기대왔다.
그후,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루마니아 정부의 배려로 최고급 전세기를 통째로 빌린 그들은 편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특수전단 군인들은 다시 멕시코로 복귀하기로 해서, 이 비행기에 탄 승객은 한건우와 이비현, 그리고 박이경과 차은비 넷뿐이었다.
“크으,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소! 형님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양반이랑 같이 다니면 심심할 틈이 없을 줄 알았지. 역시 그렇더라고!”
“어휴,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거에요? 몇 번 죽을뻔 했던 것은 이미 다 까먹었나봐. 뇌가 작아서 그런가···.”
차은비는 말로는 인신 공격을 하면서도, 박이경의 트레이에 놓인 땅콩 껍질을 대신 까 주고 있었다.
“모두들 고맙습니다. 이번엔 정말 위험했었는데··· 여러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네요."
한건우는 벌떡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차은비와 박이경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내심 기분좋은 듯했다.
“마스터가 워낙 강해서 우리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S급이라고요. 마스터 옆에서 보조를 맞출 정도는 되니까 앞으로도 도와드릴게요.”
“우리 은비 씨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네.”
한건우는 그들을 보면서 어제 이비현과 했던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건우 씨, 이제 저분들에게도 자세한 내용을 얘기해주면 좋겠어요.’
‘응?’
‘저희를 도와주겠다고 이 먼곳까지 와서 죽을 뻔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분들이잖아요.’
‘음··· 맞아.’
‘그리고 저분들 모두 건우씨를 믿고 좋아하는 게 느껴져요. 함께하고자 한다면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한건우도 알고는 있었다.
‘두려웠던 거야.’
동료들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일종의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이전의 삶에서 배신당한 아픔뿐만 아니라, 자신의 힘이 부족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경험 때문인지.
무의식적으로 남에게 깊은 정을 주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한 조직의 리더라면 반드시 고쳐야 할 점이었고, 그냥 동료로서도 마찬가지였다.
“박이경, 그리고 차은비 씨.”
“네?”
“두 사람에게 해줄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건우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만주 원정의 뒷이야기부터, 아르고스라는 조직의 정체. 그리고 모용황과 다른 주인, 사도들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까지.
회귀와 관련된 내용만 제외하고, 전부 얘기를 해주었다.
얘기를 끝내고 나니 어느새 전세기 안에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차은비가 입을 열었다.
“어쩐지 마스터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우리와는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
비유적인 표현이겠지만.
한건우는 어쩐지 뜨끔했다.
“그래서 남미나 유럽까지 가서 사악한 강자들과 싸웠던 거군요.”
“역시 형님! 다른 각성자와의 결투뿐만 아니라 세상의 평화를 지키려는 목표까지 있었다니. 저는 다시 한번 감동했습니다.”
둘 다 생각보다 당황하지 않았다.
만주에서 김도경이 흑막이라는 걸 오픈한 적이 있으니.
그 배후에 더 큰 세력이 있다는 것도 감을 잡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 이야기를 해준 건 지금까지 도와준 게 고마워서이고, 한편으론 조심하라는 뜻도 있어요. 모용황은 지금까지 우리가 싸워본 각성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자니까요.”
“....”
기내에 긴장이 흘렀다.
한건우는 진솔한 마음을 드러냈다.
“모용황을 어떻게 꺾어야 할지. 아직 모릅니다. ‘황혼의 시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요. 그러니 마지막 전투까지 함께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너무나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한건우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차은비, 그리고 이비현은 단호한 얼굴이 되었다.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리예요. 어차피 가만 있어도 세상이 위태롭다는 거잖아요? 끝까지 함께해요.”
차은비가 먼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비현도 같은 마음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두근거리는군요. 형님이 최후의 호적수라고 생각하는 상대와의 전투라···.”
박이경이 씩씩대며 주먹을 부딪쳤다.
평소라면 오버하지 말라며 면박을 주었을 차은비도 이번에는 가만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