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210화 (210/238)

#210루마니아 (13) - 피의 군주

아이언 메이든을 부수고 나온 그때.

한건우의 오른손에서는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강한 뇌전의 힘이 솟구쳐 올랐다.

강력한 푸른 전류가 사방으로 튀었고, 폭풍우의 한가운데 선 것처럼 천둥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죽은 아소카 싱처럼 단순히 몸을 빌려주기만 해도 강했겠지만.

한건우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원조가 쓰는 특성은 어떤지 볼까?”

파즈즈즈···.

쿠구구구구구-

‘인드라가 쓰는 <인드라의 뇌전>.’

- 천둥과 번개로 적을 찢어 죽이자!

전쟁신 인드라가 호기롭게 외쳤다. 그는 한건우의 오른팔에 깃들어 있었으므로, 그 외침은 밖으로 퍼져나가지 못했고, 한건우의 머릿속에서만 울렸다.

이에 질세라, 한건우의 왼손에서는 지옥의 겁화가 타올랐다.

화아아아아-

피처럼 붉던 불꽃은 순식간에 오렌지빛으로 바뀌더니, 급기야는 희끗희끗해졌다. 불의 온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파이어처럼 푸르러진 고온의 불꽃이 부서진 성을 집어삼킬 듯 타올랐다.

‘아그니가 쓰는 <아그니의 화염>.’

- 고작 관 안에 갇혀서는. 답답했잖아!

불의 신 아그니도 투덜거렸다.

한건우는 신격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고도로 정신을 집중한 채 그들의 힘을 담아 특성을 운용하는 데만 온 힘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신격을 양팔에 불러내 다루는 데는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다.

신격에서 흘러나오는 어마어마한 힘이 낯선데다, 한순간이라도 제어를 잃으면 몸의 통제를 빼앗겨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최고의 기회는 단 한 순간.’

드 라모트 백작부인은 <이속> 능력으로 달려드는 호연에게 주위가 분산되어 있었다.

쉬익- 타다닷!

호연은 한건우의 공격을 눈치채고 멀리 떨어졌다.

“!”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한건우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검붉은 입술을 벌리면서 돌아보는 장면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지금이다!’

불과 전류.

두 특성은 자연 상태에서도 서로 시너지를 이루는 힘이었다.

게다가 생각지 못한 보너스도 있었다.

- 인드라, 네놈의 콧대를 꺾어주마! 내 위용을 잘 보고 형님으로 모시거라!

- 어리석은 놈. 태초에 번개에서 불이 자라난 법이거늘!

두 신격을 양 손에 하나씩 불러냈더니.

사이가 나쁜 두 신이 서로 자존심 경쟁을 한 것이다.

‘여기까진 생각 못했는데?’

서로에게 잔뜩 약이 오른 그들은 한건우에게 받은 수명보다 훨씬 많은 힘을 꺼내왔다.

쿠과아아아아-

파아아아아아-

힌두의 신 중에서도 강력한 두 신격, 인드라와 아그니.

한건우의 양손에서 두 신격의 힘이 거침없이 뻗어나갔다.

“아니-”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동공이 크게 뜨였다.

찰나의 순간. 그녀는 수백 년간 미루어 왔던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안돼!”

사악!

드 라모트 백작부인은 목숨을 걸고 회피기를 사용했다.

임시로 방패를 만들고, 몸을 피의 연기로 바꾸어 자리를 빠져나가려 한 것이다.

하지만.

화르르르-

“아악!”

지옥의 겁화 앞에서는 혈술로 만든 방패도, 연기도 소용없었다.

공평하게 하나의 땔감이 될 뿐이었다.

백작부인이 반쯤 탄 몸을 이어붙여 도망치려는 순간.

파지지직!

채찍처럼 휘어지는 전격이 백작부인의 몸을 때렸다.

“으으윽!”

그녀는 전기에 튀겨진 물고기처럼 튀어올랐다.

우아한 검은 드레스와 귀족적인 모자는 엉망이 되었다. 백작부인의 드러난 피부는 죽음의 회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저래서 새 몸이 필요했던 거로군!’

한건우는 진실을 직감하면서 마지막으로 몸을 날렸다.

타앗!

에너지 포가 발사되듯이, 한건우의 양손에서 두 개의 특성이 쏟아졌다.

콰아아아아-

“!”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짙푸른 눈동자 속.

온통 푸른색의 화염과 전격이 회오리쳤다.

그리고.

힘의 충돌이 있었다.

어느 쪽이 우세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번쩍!

치지이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한건우 혼자 우뚝 서 있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은 부서진 기둥에 몸이 구겨질 듯 처박혀 있었다. 그녀의 뒷머리에서 검붉은 피가 흘렀다. 더는 혈술을 쓸 힘이 없어, 피가 흐르는 대로 내버려둔 채였다.

뚜벅. 뚜벅.

“....”

한건우가 밀리터리 부츠를 신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백작부인이 흐린 눈으로 애써 초점을 맞추었다.

“하··· 내가 이런 꼴이 되다니.”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사포처럼 거칠게 쉬어 있었다.

“예전 오스만 제국의 술탄 꼬맹이가 날 공격했을 때 이후로 정말 오랜만인 것 같군.”

한건우가 한쪽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죽는 것이 무섭나? 갑자기 말이 많아지셨군.”

“뭐라고···?”

“이제 끝내자.”

한건우의 양 팔에서 신격이 물러갔다. 그러나 아쉽지는 않았다. 이제 신격의 힘이 필요한 상황도 아니었다.

‘이틀의 수명이 아깝지 않을 만큼 큰 활약이었어.’

한건우가 창을 뽑아 백작부인에게 겨누었다. 백작부인이 쓰러진 채로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이 내가 이렇게 죽는다니. 가문의 별장이 나의 무덤이 되겠구나.”

“너는 수백년을 살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더 살고 싶어하는군.”

고목에서 마지막 생명력이 떠나가듯이.

백작부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보였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지. 처음에는 다들 각자의 명분이나 이유를 가지고 움직이지만 결국 끝은 다 똑같더군. 아소카 싱, 모용황, 나도 마찬가지이고···.”

“....”

백작부인의 짙푸른 눈이 한건우를 응시했다.

“사도 한건우, 너는 다를 것 같은가? 특성을 흡수하는 힘이 있는 듯한데···. 결국 우리 아르고스의 주인을 모두 죽인 다음, 예언 석판에 담긴 힘을 혼자서 얻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것 아닌가?”

이비현과 호연, 그리고 이쪽으로 다가오던 차은비와 박이경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을 의식해서라기보다, 한건우는 자기 마음 속의 대답을 풀어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도 있겠군. 하지만 난 너희와 달라. 너희는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착취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호호호, 재미있군. 너도 그런 얘길 하다니.”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인간은 다 똑같아. 모용황도 처음부터 그랬을 것 같나? 처음에는 눈앞의 불의라는 괴물을 처단하기 위해서 힘을 원하지.”

“....”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자신이 심연이 되는 법. 모용황을 처단하고 나면 네가 제2의 모용황이 될거야. 내가 장담하지.”

제2의 모용황?

한건우에게는 모욕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한건우가 이를 악물었다.

“아니, 나는 너희들과 달라. 그러기 위해 죽음에서 돌아왔으니까.”

“글쎄. 네 녀석이 변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저승에서 바라보고 있어주지.”

더이상 문답은 필요없었다.

한건우가 창을 높이 치켜든 그때.

백작부인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끼던 혈족과 함께 말이야.”

“?”

한건우가 창을 든 채 멈칫했다.

백작부인이 눈짓으로 호연을 가리켰다.

“다른 것들은 속박이 풀리면 그만이지만··· 저 계집은 다르겠구나. 금제의 고통을 버티느라 힘을 너무 많이 썼군. 혈족의 힘을 잃는 순간, 몸이 가루가 되어 버릴 거다.”

“....”

이비현이 놀란 눈으로 호연과 백작부인을 번갈아 보았다.

‘백작부인을 살려둘 수는 없는데.’

그녀를 죽이는 순간 호연도 죽게 된다니.

살기 위한 치졸한 거짓말이기를 바랐다.

‘진짜다.’

<거짓 간파>의 결과가 나오자, 한건우의 창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한건우가 망설인 그 순간.

“뭘 망설이고 있어요?”

쉬이익-

누군가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이속>을 쓴 호연이었다.

슈웅-

호연은 드 라모트 백작부인을 공격했다. 온몸이 타는 듯한 고통을 무릅쓰느라, 얼굴이 일그러진 채였다.

‘...!’

푸욱!

한건우도 창을 내리찍었다.

차가운 심장 대신, 신체를 움직이는 뇌간을 노렸다.

“아악···.”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는 손끝부터 서서히 핏빛의 재가 되어 스러져갔다.

파아아-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생명이 끊어지자, 성 전체에, 아니 깊은 숲 전체에 큰 파동이 지나갔다.

호연은 잠시 중심을 잡고 서 있다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어, 엄마!”

이비현이 쓰러진 호연에게 달려갔다.

한건우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호연을 무릎에 받치고 앉은 비현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와 봐요! 치료할 테니까.”

차은비는 신성력을 바닥까지 끌어 썼으면서도, 다시 <신의 가호>를 준비했다.

그때 호연이 힘없이 말했다.

“이건··· 소용없어요.”

그녀가 환자라고 판단한 차은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치유를 시작했다.

“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아무 느낌이 없었다

설상가상. 호연의 몸 가장자리가 백작부인처럼 핏빛 가루로 변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아, 안돼, 엄마!”

“헛일이에요. 주인의 명령을 어기고, 주인을 공격한 대가예요. 치유로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호연이 서서히 손을 들어 비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손끝마저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엄마, 안돼요.”

“우리 딸, 울지 마.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영원히 백작부인을 섬기며 악행을 하며 살았을 거야.”

이비현의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살 방법이 있을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

“우리 딸리 이렇게 예쁘게 큰 모습을 보고 죽을 수 있어서··· 엄마는 너무 행복해.”

“엄마!”

“엄마는 이미 사람이 아니고, 이 세상에 있으면 안될 존재야.”

이비현은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이제야 겨우 제대로 만났는데. 그동안 얼마나 엄마를 보고 싶었는데.”

비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만 삼켰다.

옆에서 계속 치유를 시도하던 차은비는 창백한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박이경이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소용없으니 그만 하라는 뜻이었다.

스스스···.

호연의 손가락 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가 손바닥만 남은 손으로 이비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동안 너희 아빠가 얼마나 심심하셨겠어. 엄마가 얼른 가서 함께 있어줘야지. 우리 딸 지내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네.”

호연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우리 딸이 반할 만한 멋진 남자인 것 같네요. 같이 얘기를 나눌 시간이 있으면 좋았을텐데···. 비현이를 잘 부탁해요.”

“걱정 마십시오.”

한건우는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호연은 더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이미 혀를 잃어 목소리를 잃은 채였다.

휘이이-

부서진 건물 틈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호연의 몸은 서서히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스러지기 전. 호연의 얼굴에는 편안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흑···.”

차은비가 털썩 주저앉았다.

힐러로서 이토록 무력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박이경이 그녀를 토닥였다.

그때, 성 바깥에서 상당한 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각성자들이었다.

“어···!”

낌새를 챈 박이경이 거친 숨을 내쉬며 주먹을 푸는 순간.

한건우는 그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적이 아니야.”

길드 <노네임>의 주인인 무명의 노인.

그리고 노네임의 길드원들이었다.

“백작부인을 해치우시다니··· 대단하군요. 이 나라에 사는 모두가 당신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노인의 말투가 달라졌다.

한건우에게 존경을 담아 경어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노인과 길드원들은 한건우와 이비현 앞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근처에 있었던 겁니까?”

그들이 때마침 나타난 게 의아해서, 한건우가 물었다.

“박이경 플레이어! 왜 그리 빨리 가십니까?”

“어, 우리 후발대!”

박이경이 외쳤다. 특수전단의 후발대와 노네임 길드원들은 여기까지 함께 달려온 모양이었다.

노네임 길드원들도 한건우를 지원하려 듯. 모두 무장을 한 채였다.

“따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노인에게 묻는 한건우의 눈이 흔들렸다.

노인의 딸은 호연과 달리 정상적으로 속박이 풀렸으니, 무사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호연을 잃고 나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 딸이 저주에서 풀려난 듯, 상태가 달라졌다고 하는군요. 서서히 시간을 두고 치료를 하면 돌아올 것 같습니다.”

“잘... 됐군요.”

“감사합니다.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딸을 되찾아줘서 고맙다며.

노인의 감사를 받고 있자니, 한건우는 이비현을 볼 낯이 없었다.

그가 무너진 천장 틈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특성창 목록 맨 끝.

이번 여정으로 얻은 특성이 반짝였다.

[피의 군주(신화급)]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