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루마니아 (12) - 아이언 메이든
<강신> 특성으로 신격을 불러내는 찰나의 시간 동안.
쿠르릉···.
힌두 신화에서 숭배하는 이계의 신격이 한건우를 내려다보았다.
“...!”
신격의 눈을 마주보는 것만으로 먹먹할 정도의 중압감이 느껴졌다. 보통 각성자라면 그대로 기절해버렸을 것이다. 한건우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얕보이면 안돼.’
힌두의 신격들이 얼마나 호전적이고 오만한지, 똑똑히 겪지 않았던가. 게다가 방금 그들이 아소카 싱에게 깃들어 있는 상태로 레일 건을 써서 공격했는데, 그걸 어떻게 생각할지도 의문이었다.
- 너는 대체 뭐 하는 놈이냐? 겉가죽은 평범해 보인다만, 다른 인간과는 다른 것 같구나.
‘전쟁신 인드라.’
천둥과 번개를 관장하는 강력한 전쟁의 신격.
그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한건우를 살펴보았다.
- 방금 그 번개는 무엇이며, 아소카 놈은 어디로 가고 네놈이···.
“조용.”
- ···.
인드라 신이 정지 상태가 된 것처럼 멈추었다.
- 뭐, 라고?
“적부터 해치우고 이야기하자. 하루치의 수명을 줄 테니 나의 왼팔에 강림해라.”
- 적?
인드라가 한건우에게 다가오는 드 라모트 백작부인을 바라보았다. 신과 대화하는 동안은 시간이 한없이 늘어져 있어, 그녀는 공중에 멈춰있는 것처럼 보였다.
- 크하하하!
인드라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 이거 아소카보다 훨씬 웃기는 놈이군!
인드라의 신격이 한건우의 왼팔로 들어왔다.
근육이 크게 불끈거리더니, 울룩불룩 힘줄이 솟았다. 손가락 끝부터 서서히 적갈색으로 바뀌었다.
‘좋아, 된다!’
몸의 일부분에만 강신을 시도하는 것.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일단 던져본 것인데, 정말로 통한다니 다행이었다.
화아아아-
이번에는 후광을 통해서 견디기 어려운 열기가 쏟아졌다.
‘불의 신 아그니.’
붉은 피부에 화염의 옷을 걸친 신격이 나타났다.
- 네놈이 감히!
“하루치의 수명을 주겠다.”
불처럼 화를 내려던 아그니가 당황하여 입을 벌렸다. 일곱 가닥으로 갈라진 혓바닥이 불꽃처럼 날름거렸다.
아소카 싱은 죽고, 이제 강신 특성은 한건우의 것이었다.
달라진 상황을 파악한 아그니가 길쭉한 입을 찢으며 웃었다.
- 고작 하루? 아소카보다 더 인색한 놈이구나.
“그 대신 나의 오른팔에 강림해라.”
- 인색한 인간!
아그니는 투덜거리는 것치고는 한건우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강신>을 거부할 권한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그니의 신격이 오른팔로 들어가자, 오른손이 붉은색으로 바뀌면서 홧홧한 기운에 몸이 구워지는 듯했다.
‘그냥 강신을 받는 건 너무 리스크가 커! 내줘야 하는 수명도 상당하고, 무엇보다 신격이 들어온 순간에는 성격이나 성향도 바뀌게 되니까.’
잔혹한 성정의 칼리 여신, 충동적이고 오만한 아그니 신, 그리고 거침없고 호전적인 인드라 신. 셋 다 몸의 지배권을 내주고 싶은 이들은 아니었다.
‘강신한 신은 강력하지만, 뒷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눈앞의 적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만 할 뿐, 몸의 주인에 대한 배려는 없는 듯했다. 한건우로서는 달갑지 않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이것이었다.
‘신체의 일부분에만 강신을 구현한다.’
아소카 싱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리라.
하지만 그러면 신격이 제대로 힘을 쓰며 전투할 수 없으니, 결국 몸을 전부 빌려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아소카 싱과 다른 점이 있으니.’
아소카 싱이 ‘가짜’라고 부른 두 가지 특성.
<아그니의 화염>과 <인드라의 뇌전>을 가지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 몸을 빌려줄 필요가 없어.’
한건우는 양 팔에 각각 인드라와 아그니의 신격이 깃들었다.
‘그들의 격만 빌리면 그만이다.’
그러자 강력한 불과 뇌전의 힘이 느껴졌다.
아까의 한건우가 버티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감각이, 자신의 몸 안에서 느껴진 것이다.
‘됐다!’
<강신>의 발동이 시작되었다.
한건우는 깊은 물 속에서 올라온 것처럼 현실로 돌아왔다.
다시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네놈!”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혈술로 불러낸 피의 안개를 펼쳤다.
산성을 띠는 매캐한 피의 안개를 먼저 넓게 펼쳐두는 것이 그녀의 전투 방식이었다.
파아아앗-
한건우의 오른손.
스스로도 놀랄 만큼 순정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그니의 신격이 담긴 <아그니의 화염>.’
한건우가 쏘아낸 불꽃은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피의 안개를 불태워가면서 없애버렸다.
“아니?”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그녀는 수십 갈래의 피의 창을 만들어내서 한건우를 공격했다.
파즈즈즈즈즈-
그에 맞서서, 인드라의 신격이 담긴 <인드라의 뇌전>이 쏘아졌다.
한건우를 향해 날아오던 수십 갈래의 창이 삽시간에 가루가 되어 터져나갔다.
‘엄청나군.’
신격을 빌려 특성을 쓴다는 것은, 마치 무한한 바닷물을 계속 퍼내는 것 만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드 라모트 백작부인은 꽤 잘 버텼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은 혈술로 공격과 방어를 하기도 했지만, 회피기로 사용하기도 했다.
화아아아-
고대의 화산에서 분출한 듯한 불줄기가 드 라모트 백작부인을 가격하는 순간.
그녀의 본체에 닿기 직전, 백작부인은 피의 연기로 몸을 변화하여 공격을 회피해냈다.
사아아-
흩어진 피의 연기가 모여 다시 백작부인의 몸을 이루었다.
“정말로 아소카 싱의 능력을 흡수했군.”
백작부인이 중얼거렸다.
쿠르르르···..
그녀의 본체를 노린 한건우의 공격은 빗나가, 성의 한쪽 지붕을 완전히 날려보냈다.
폐허가 된 성 위로, 달이 뜬 밤하늘이 보였다.
“아소카 싱의 능력을 빌린다고 해서,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백작부인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녀의 몸 주위에 혈술로 만들어낸 창살이 춤을 추었다. 그 창살은 점차 단단하게 뭉치더니 거대한 형상을 만들었다.
그 형상은 어딘가 익숙한 듯했다.
‘관?’
“죽어라!”
피의 철 성분으로만 만들어진 관.
자세히 보니 여성의 형상이 그려져 이었다.
쩌어억-
혈술로 만들어낸 관뚜껑이 번쩍 열렸다.
그 관의 내부에는 촘촘하게 쇠로 된 가시가 박혀있었다.
‘아이언 메이든!’
중세시대, 죄인을 고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관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이 안에 갇힌다면, 아무리 강한 자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까부터 혓바닥이 길군!”
파아앗!
한건우가 관을 부숴버리기 위해 뇌전을 발사했다.
철컥-
그러나 열린 관은 연기처럼 사라지더니, 한건우가 있던 자리에 나타났다.
“!”
한건우는 뚜껑이 닫히는 관 속에 위치하게 되었다.
끼이-
아이언 메이든의 관뚜껑이 빠르게 닫히기 시작했다.
만약 관이 그대로 닫혀버린다면 한건우는 몸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릴 판이었다.
한건우는 불꽃과 뇌전의 힘을 응축하여 닫히는 관뚜껑을 향해 쏘았다.
터어엉-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닫히는 속도를 늦출 뿐이었다.
한건우는 마창 게이볼그를 꺼내어 관뚜껑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
드드드드···.
관이 변형되는 것이 보였다. 뚜껑이 휘어졌으나, 관에 박힌 가시는 끈덕지게 다가왔다.
‘<다이아몬드 폼>을 써서 버텨볼까?’
신체 강화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 폼>이라면 이 관의 공격을 버티거나 부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강신> 특성을 쓰면서 그만큼 강한 특성을 동시에 돌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이아몬드 폼>을 쓰는 순간, <강신>이 풀릴지 모른다. 몇초만 더 해보고···!’
그때, 호연과 비현은 무너지는 성 안에서 뛰고 있었다.
천장이 떨어지고, 종탑이 쓰러지는 것을 피하며.
그들은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으로 도착했다.
“저건 아이언 메이든···?”
부서진 성을 배경으로 밤하늘에 떠있는 백작부인, 그리고 핏빛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관이 보였다.
그 관 안에서 무언가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게 뭐죠?”
드 라모트 백작부인은 공중에 뜬 채로 흰자위가 다 보이도록 눈을 뒤집으며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아이언 메이든을 소환하여 운용하는 것은 그녀에게도 막심한 에너지 소모를 일으키는 듯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최후, 최고의 기술이야. 반드시 상대를 죽여야 할 때 쓰는 것인데.”
채앵-
익숙한 창의 소리를 듣고, 이비현이 외쳤다.
“저 안에 건우 씨가 있나봐요!”
이비현은 한건우를 돕기 위해 앞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호연이 가로막았다.
“넌 부상을 입었어. 제대로 회복하지도 못했잖니!”
“건우 씨예요. 반드시 구해야 해요.”
이비현은 그림 리퍼의 사슬 낫을 꺼냈다. 그녀가 단호하게 공격을 준비하자, 호연이 앞으로 나섰다.
“엄마가 먼저 공격해서 틈을 만들 테니, 네가 저 사람을 구해보렴.”
호연은 마음 같아서는 이건 자신이 해결하겠다며, 회복에 전념하고 있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딸의 눈빛을 보고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크윽!”
다만, 아직 혈족으로서의 금제가 풀리지 않은 채였다.
주인인 드 라모트 백작부인을 공격하려는 생각을 가지기만 해도 엄청난 고통이 전신을 짓눌렀다.
호연은 그 고통을 참기 위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손목을 감은 미스릴 체인 목걸이를 더욱 세게 당기자, 체인이 살을 파고들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특성 발동 : 이속]
호연은 본래 가지고 있던 이속 특성을 발동했다. 혈족이 된 지금은 기본적인 신체능력이 인간을 뛰어넘어 더욱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쉬이익-
호연이 섬광처럼 드 라모트 백작부인에게 덤벼들었다.
평소라면 쉽게 습격을 허용하지 않을 상대였다.
그러나 아이언 메이든을 조종하는 데 집중하고 있던 탓에, 호연의 빠른 접근에 반응하지 못했다.
촤아악-
호연이 휘두른 미스릴 체인이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목을 휘감았다.
사아아-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급하게 피의 연기로 사라졌다. 그 순간, 백작부인은 아이언 메이든의 통제를 잃었다.
“네년이?”
드 라모트 백작부인은 목 부위에 난 상처를 감쌌다.
호연이 휘두른 미스릴 체인으로 만들어진 상처였다.
“감히 주인을 몰라보고 물려고 해?”
“내 몸의 주인은 나다. 지금까지 나를 노예로 부린 것도 모자라, 내 딸의 몸까지 탐내다니.”
호연의 눈빛이 냉정해졌다. 혈족의 금제가 주는 극도의 고통도 더는 그녀를 구속하지 못했다.
“반드시 널 없애겠어.”
분노한 드 라모트 백작부인은 피의 창을 소환하여 호연을 공격하려 했다. 귀찮은 호연을 한번에 해치우고 한건우 쪽으로 돌아가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쉬익-
호연이 <이속> 특성으로 백작부인을 약 올리듯이 가까이 접근했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호연은 어차피 자신의 공격이 백작부인에게 치명타를 주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시선을 빼앗고, 주위를 분산시키면 돼!’
속도로는 그녀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라 하더라도, 호연을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뒤에는 한건우와 이비현도 있는 상황.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주의도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파즈즈- 쩌엉!
아이언 메이든은 한건우가 쏜 인드라의 뇌전을 정통으로 맞았다.
“꽤 어렵게 하는군.”
한건우가 아이언 메이든을 뚫고 튀어나왔다.
문답무용.
한건우가 공중으로 솟구치며 두 신격의 힘을 한데 모았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을 끝장내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