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루마니아 (11) - 강신
호연은 비현을 꽉 마주안았다. 자신과 꼭 닮은 딸의 모습을 보자, 호연의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호연은 백작부인의 혈족이 되는 바람에 하나도 늙지 않았고, 비현만 훌쩍 자라났기에.
그들은 엄마와 딸이 아니라 언니와 동생 정도로 보였다.
이비현도, 호연도. 생이별을 했던 그날이 바로 어제처럼 생생했다.
“이렇게 클 때까지 한번도 챙겨주지 못하고···.”
“아녜요. 엄마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은걸.”
딸이 어린아이였을 때 헤어졌다가 어른이 되어서 만난 셈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눈이 네 아버지와 똑같구나.”
“엄마···.”
호연은 머릿속에 드리웠던 안개가 싹 걷힌 느낌에 전율했다. 주인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지워지자,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호연이 이비현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이쪽은 엄마가 막을 테니, 백작부인이 오기 전에 빨리 성을 빠져나가!”
“그건 안돼요!”
뜻밖에 이비현이 고개를 거세게 가로저었다. 출혈이 심해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단호했다.
“이번에는 절대 엄마를 두고 먼저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난···.”
호연은 반박하려다가 문득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앞장서서 나아가며 성에 숨겨진 물품 창고를 뒤졌다.
“이것 먼저 먹어.”
호연이 던져준 것은 회복용 포션이었다. 권속이나 혈족들은 포션을 먹지 않았기에, 구색 맞추기로 갖춰놓은 하등품이었다.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이비현이 포션을 들이킬 동안, 호연은 혈족의 금제를 어긴 데서 받는 고통을 계속 참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다시 머릿속에 핏빛 안개가 스멀스멀 밀려오려고 했다.
‘안돼! 정신 차리자!’
콰악!
호연은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런 상처로는 통각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소용없었다.
호연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 아이템에 생각이 미쳤다. 바로 <미스릴 체인>이었다. 혈족이 되고 나서 그 성분에 거부감이 느껴져서 벗어 버리려다가도, 묘한 애착 때문에 한번도 떼놓은 적 없는 아이템이었다.
칙!
호연이 몰래 스스로의 손목을 미스릴 체인으로 감아 상처를 냈다. 불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오자 정신이 조금 가다듬어졌다.
‘비현이라도 나 같은 괴물로 안 만들어서 천만 다행이야.’
호연은 비현의 다친 어깨에 급한 대로 힐링 포션을 들이부었다. 바로 자신의 손으로 공격한 흔적이었다.
마지막 순간. 비현의 얼굴을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토록 살리고 싶었던 내 딸을, 언데드와 같은 괴물로 만들 뻔했어.’
그뿐인가. 비현은 아마도 드 라모트 백작부인에게 몸을 빼앗겼을 것이다.
차라리 기억이 상실된 것이라면 모를까. 모든 과거를 기억하면서 백작부인에게 예속되어 그런 짓을 할 뻔했다는 게 끔찍했다.
포션을 들이킨 이비현이 조금 기운을 차렸다. 그때 아래층 홀에서 지진이라도 난 듯 충돌과 진동 소리가 들렸다.
쿠웅- 쿠구구-
비현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저는 저기로 돌아가야 해요. 제 동료들이 적과 싸우고 있어요.”
“그래, 어서 내려가자.”
호연이 지름길로 앞장섰다.
*
한편, 차은비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박이경 씨!”
후두두둑.
박이경의 피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려 차은비의 얼굴로 떨어졌다.
차은비가 두 팔로 박이경의 무너지는 몸을 받치려 했다. 그러나 박이경의 몸은 바윗덩이처럼 크고 무거워서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쿠웅-
차은비가 겨우 몸을 빼내자마자, 박이경이 그 자리에 엎드린 채로 쓰러졌다. 극심한 고통으로 쇼크가 온 것인지, 박이경의 흰자위가 허옇게 뒤집어져 있었다.
“이, 이런 게 어딨어. 일어나 봐요!”
차은비는 박이경의 등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박이경의 상처는 험하고 끔찍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강한 혈술로 구현해낸 수십 개의 피의 창. 차은비를 향해 날린 공격을 모두 막아버린 것이다.
“호호호···.”
백작부인이 웃으면서 한걸음 더 다가왔다.
휘이잉-
그녀의 긴 드레스 자락이 날리면서 짙은 피안개가 일었다. 혈술로 만든 피안개가 가시덤불처럼 휘어져 들어가면서 박이경을 공격했다.
백작부인은 차은비가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다. 피의 창이 아닌 구불거리는 가시덤불을 만들어낸 것도 그녀를 붙잡으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차은비는 쓰러진 박이경 앞을 가로막고 섰다. 백작부인의 냉혹한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스쳤다.
“!”
화악-
그녀가 맞서서 손을 뻗자, 은빛의 십자가 형상이 나타났다. <신의 가호>의 강한 신성력으로 보호막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치유와 보호 특성으로는 최고라고. 차은비 스스로도 자신 있게 내세우는 <신의 가호>였다. 특히 마법이나 저주 계열의 공격이면 털끝 하나 안 다치도록 막을 수 있었다.
터어엉!
그러나 아까도 그랬듯이. <신의 가호>로 만든 보호막은 백작부인의 혈술 앞에서 영 맥을 못 추었다. 혈술은 일종의 저주 주술이면서도, 물리적인 위력까지 지닌 탓이었다.
치이이이-
피의 가시덤불이 보호막을 잠식해 나갔다.
“으윽!”
차은비의 눈에서 핏발이 터지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이젠 무리야!’
지금이라도 보호막을 거두고 빠르게 몸을 피한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물러설 수 없었다.
차은비의 뒤에는 박이경이 무방비 상태로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피해 버리면 박이경은 정말 끝이었다.
‘나를 구해주려다가 저렇게 됐어.’
그녀는 몸값 높은 S급 힐러로 살아오면서 그 값을 톡톡히 하고 살아왔다. 전투에서도 파티원들을 지키고 보호해주기만 했지, 역으로 보호받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파티원이 힐러를 보호하는 게 정석이라지만, 난전 상황에서는 지켜지기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차은비는 애초에 전투 중에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편이었고, 스스로의 몸은 알아서 챙겼다. 자꾸 위험에 처해서 파티원들을 신경쓰게 만들면 그게 더 문제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차은비에게 지금 같은 상황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도망친다면, 난 스스로를 용서 못할 거야.’
차은비가 이를 악물었다. 피의 창에 등이 온통 꿰뚫려 쓰러진 박이경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당장 힐을 퍼붓지 않으면···.
‘박이경 씨가 죽을지도 몰라.’
이성적으로는 최악의 상황이 자꾸만 그려졌다.
촤악!
혈술로 이루어진 가시덤불이 요동치며 차은비의 보호막을 거세게 때렸다.
쩌어억···.
보호막이 흔들리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피 안개가 새어들어와 살아있는 것처럼 차은비를 노렸다.
치이이익···.
“윽!”
산성을 띠는 피 안개가 차은비를 뒤덮었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반드시 지킬 거야!’
그녀가 쓰러진 박이경에게 바짝 붙었다. 보호막의 범위를 최소화하려는 것이었다.
“퍽 감동적인 광경이군.”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위엄 있는 걸음걸이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가 가까이 올수록 피의 안개는 숨 막히게 짙어졌다.
“흐윽.”
이제 차은비는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독물 속에서 호흡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야까지 붉어졌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보호막을 부여잡고 있는 게 전부. 공격기를 발동할 힘은 없었다.
“호호호호.”
백작부인이 소리 높여 웃었다.
‘이제 끝인가?’
차은비가 죽음을 각오한 순간.
번쩍!
바로 옆에서 수백 개의 번개가 친 것처럼 환한 빛이 홀을 채웠다. 백작부인의 당황한 옆얼굴에도 역광이 비쳤다.
‘뭐지?’
차은비가 논리적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콰과과아아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폭음이 울렸다.
‘한건우 씨?’
폭음의 진원지는 한건우가 있던 홀 반대쪽이었다. 바로 한건우가 레일 건을 쏜 순간이었다.
두우웅-
홀을 울리는 큰 진동이 울리면서, 차은비와 박이경의 몸도 붕 떴다.
“뭐냐!”
드 라모트 백작부인 역시 검은 드레스를 휘날리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백작부인의 집중이 깨지면서, 혈술로 조종하던 가시덤불과 피 안개도 사그라들었다.
휘이-”
백작부인은 차은비와 박이경에게 흥미가 떨어진 듯. 거대한 박쥐처럼 홀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다행이야, 살았어!’
차은비가 박이경을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체격과 체중의 차이가 워낙 현격한 탓에 완전히 보호하지는 못했지만, 박이경의 머리가 홀의 기둥에 들이박히려는 걸 겨우 막을 수 있었다.
“이봐요, 박이경 씨!”
한건우도 걱정되었지만, 일단은 죽어가는 사람부터 살려야 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차은비의 손에서 농후한 은빛의 신성력이 뿜어져나왔다. 차은비가 박이경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출혈이 잡히고, 창상이 아물어 가는데도 박이경은 눈을 뜨지 못했다. 차은비가 박이경의 양 뺨을 번갈아 찰싹찰싹 때렸다.
“죽으면 안돼요! 정신 차려요!! 제발!”
차은비는 눈물이 흘러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때 장난스러운 박이경이 목소리가 들렸다.
“나 때문에 우는 거야? 우리 어머니가 여자를 울리면 책임져 줘야 한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구만.”
“당신 정말!”
차은비는 화를 내면서도 안도감으로 웃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걸 몰랐다.
*
한건우는 자신의 몸 상태와 특성을 점검해 보고 있었다.
‘칼리의 저주가 사라졌다!’
밧줄로 꽁꽁 묶여있다가 풀려난 듯, 온몸이 시원했다.
아소카 싱의 <강신> 특성을 얻은 것도 큰 수확이었다.
힌두의 신격을 몸에 불러올 수 있으니.
‘어마어마한 특성이긴 하지만, 수명도 줘야 하고 몸에 대한 지배권도 일부 빼앗기는 것 같았어.’
아소카 싱의 몸을 자유자재로 지배하던 신격들.
게다가 아소카 싱의 기억과 인격 역시 그들과 일부 융합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함부로 써서는 안되겠어.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해야겠군.’
한건우가 지하에서 다시 날아오를 때.
드 라모트 백작부인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설마 네놈이··· 죽인 것인가?”
“그렇다. 이제는 네 차례다. 이비현은 어디로 데려갔지?”
백작부인이 높은 비웃음 소리를 냈다.
“네놈의 여자친구 말이냐? 지금쯤 피가 모두 빠져 나를 위한 몸뚱아리만 남았을 테니. 궁금하면 같이 저승에 가서 알아봐라!”
백작부인이 혈술을 이용한 공격을 퍼부었다.
주위 공간에 피로 된 안개를 채우면서, 수십 가닥의 삼지창을 한건우에게 쏘아보냈다.
아무리 제 능력을 되찾은 한건우지만.
아르고스의 주인을 상대하고, 연이어 또다른 주인을 상대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강신>을 사용할 수 밖에 없군.’
어떤 신을 불러내야, 드 라모트 백작부인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특성 발동 : 강신]
신화급 특성이 발동되면서, 한건우의 머리 주변에 후광이 일어났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그건··· 아소카 님의 강신 특성? ···그렇군. 그렇게 된 거였어. 모용황이 보냈나? 우리를 하나씩 사냥하라고?”
특성을 흡수한 한건우를 보고, 벌써 예언 석판의 봉인을 풀 수 있다는 계산까지 마친 모양이었다.
“아니. 그 역시 내 목표다.”
“모용황까지 잡겠다는 것이냐?”
백작부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런 목적이라면 나와 손을 잡자. 혼자서는 무리라는 것을 잘 알텐데?”
한건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드라모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뭐라 말해도 소용없어. 넌 죽여야 할 대상에 불과해.”
그때.
강력한 힌두의 신이 한건우의 몸에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