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루마니아 (10) - 같은 사람
‘후폭풍이 강하군!’
무기 아이템 중에서 공격력이 가장 강하다는 레일 건의 발사체, 그리고 3개의 신격이 만든 방어막이 충돌해서 일어난 반동이었다. 그대로 밀려나면 성벽을 뚫고 튕겨나갈지 몰랐다.
한건우의 머릿속에 경보가 켜졌다.
콰악!
공중에 떠서 밀려나던 한건우가 마검 스톰브링거를 휘둘렀다. 검끝이 홀의 기둥에 단단히 꽂혔다.
두웅-
“크윽!”
충돌의 후폭풍이 한건우가 있는 곳을 한 차례 지나갔다. 한건우의 몸이 붕 떴지만 그대로 버텨낼 수 있었다.
‘이 정도라니!’
다른 특성이나 스킬로는 도저히 흉내내지 못할 엄청난 속도와 힘이었다. 마치 오직 한 명의 적을 노리고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진 것 같았다.
“아소카 싱, 어디 있지!”
아소카 싱이 서 있던 곳에는 이제 아무도 안 보였다.
1층 홀의 바닥에는 크레이터가 파여서 새카만 입을 드러내고 있었다. 크레이터 가장자리에는 아소카 싱이 마지막 순간에 방어막을 만들기 위해 내던진 무기들이 떨어져 있었다.
한건우가 마창 게이볼그를 들었다. 가장 아끼는 무기를 되찾자 안정감이 들었다. 익숙한 창의 손잡이가 손에 착 감겨왔다.
‘다시는 남에게 빼앗기지 않을게.’
희뿌연 돌먼지에 뒤덮여 있던 블레이드를 털었다. 매끄럽고 검은 창날이 드러났다. 한건우는 아소카 싱을 찾아 크레이터 밑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휘익-
레일 건이 만들어낸 수직 통로는 지하 1층, 2층, 그리고 거대한 홀이 있던 지하 3층도 지나서 동굴 같은 어두컴컴한 공간으로 이어졌다.
‘지하 4층이 있었나?’
노네임 길드에서 보여준 라모트 고성의 지도에서는 찾을 수 없던 곳이었다. 새삼 레일 건의 위력이 엄청났다. 이 고성은 층고가 높고 벽과 천장이 두터웠다. 방어막에 가로막히고도 그런 성의 3개 층을 뚫고 들어갈 정도라니.
타앗!
지하 4층. 동굴 바닥에 착지한 한건우가 곧바로 전투 자세를 잡았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끄으으으···.”
누군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듯, 괴로운 신음이 울려퍼졌다.
팟-
주변 공간에 빛을 비추자,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
아소카 싱이 쓰러진 채로 힘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건우는 창을 아래로 겨누었다.
“끄으으···.”
“3개의 신격은 돌아갔나 보군.”
아소카 싱의 머리를 둘러싸고 있던 밝은 후광은 사라지고, 날개죽지에 돋아났던 두 팔도 없었다. 3개의 신격이 한 몸에서 주장을 드러내느라 여러 색으로 얼룩덜룩하던 피부와 머리카락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급조한 방어막이 아주 무용지물은 아니었던 모양. 심장과 머리는 지켜낸 것 같았다. 그러나 신체의 나머지 부분은 거의 잃다시피 했다.
아소카 싱의 복부는 레일 건의 발사체를 정통으로 맞아 엉망이었고, 두 팔과 다리는 관절 아래로 너덜너덜해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시익, 시익-
아소카 싱의 폐에서 공기가 새는 소리가 들렸다.
3개의 신격을 동시에 받아내느라 무리한데다, 레일 건까지 맞았다. 아소카 싱은 자신의 몸을 추스를 수도, 한건우에게 반격할 수도 없었다.
“감··· 히, 인간 주제에···.”
아소카 싱이 한건우를 노려보았다. 초점이 풀려가긴 했지만 아직도 상대를 깔아보는 듯한 오만한 눈빛이었다.
“아직도 착각하고 있나?”
“?”
휘이-
한건우가 창을 높이 들면서 빙 돌렸다.
“너희들도 똑같은 사람이야.”
콱!
“!”
깔끔한 궤적을 그린 창날이 아소카 싱의 심장을 꿰뚫었다.
아소카 싱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커헉···.”
크식-
한건우가 창을 비틀어 꺼냈다.
세계를 지배하는 아르고스의 다섯 주인.
다른 사람들을 가축이나 재산 취급하며 살아오더니, 그 자신도 인간이라는 걸 잊은 모양이었다.
이미 아소카 싱의 몸에서 많은 혈액이 빠져나간 터라,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지는 않았다. 아소카 싱의 비단옷이 붉게 물들어갈 뿐이었다.
“-.”
아소카 싱은 괴로워하며 입을 벌린 채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동공에서 생명력이 사라졌다. 오랫동안 지구의 일부분을 지배해 온 각성자가 그렇게 숨이 끊겼다.
그 직후, 한건우가 가진 권능이 자동으로 활성화되었다.
다른 각성자의 특성을 집어삼키는 탐식의 권능이었다.
[악마의 권능(유일) 발동 : 탐식]
- 죽인 자의 특성을 흡수합니다.
- 특성 흡수 중
···
- 특성 흡수 완료.
시간이 없었다. 한건우는 자신이 내려온 수직 통로를 올려다보며, 동시에 특성창을 확인했다.
[강신(신화급)]
- 수명을 대가로 힌두의 신을 몸에 소환한다.
‘신화급 특성!’
예상대로였다. 무섭지만 그만큼 강력한 특성이었다.
“좋아, 가자.”
*
한건우와 아소카 싱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무렵.
이비현은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혈족에게 붙들려 종탑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흐으···.”
이비현은 희미한 정신으로 신음을 흘렸다. 호연의 공격을 받고 다친 어깨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백작부인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으실지 모른다. 오늘 당장 새 육신을 필요로 하실지 모르니, 빨리 준비시켜야 해.”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혈족들은 종탑 아래의 창고 같은 방에 들어갔다. 중세에 종지기가 지냈을 법한 방에는 어울리지 않게 장서가 꽂힌 책장이 놓여있었다.
여기에는 드 라모트 백작부인 본인만이 열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백작부인께 문의드린다는 걸 잊었군.”
“실존하지 않는 책 하나를 빼내면 되는데, 이 중에서 어떤 책일지.”
“첫 번째 장서부터 하나씩 빼내 보면···.”
사실 해법은 공개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열쇠가 되는 책이 매번 바뀌어서 알 수가 없었다.
“비켜라.”
호연이 앞으로 나섰다.
‘이중에서 실존하지 않는 책은 한 권.’
단테의 신곡,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호연의 눈이 백작부인의 장서 위를 신중하게 훑었다.
“이거군.”
호연이 두꺼운 양장본 하나를 거침없이 빼냈다.
베로소스의 세계사 전집 제3권.
드드드드···.
책을 빼내자마자, 천장이 열렸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
다른 혈족이 감탄하며 물었지만, 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면서 없어진 책이, 이 자리에 있을 리 없었다.
종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나자, 혈족들은 이비현을 메고 그 위로 올라갔다.
성의 뾰족한 종탑 속, 숨겨진 공간이 나타났다. 종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아래에 돌로 된 제단이 놓여있었다.
혈족들은 돌로 된 제단에 이비현을 눕히고, 팔과 다리, 그리고 목에까지 각각 구속구를 채웠다. 그들의 움직임은 도살장의 인부처럼 익숙했다.
철컥! 처컥!
“으응···.”
이비현이 막 눈을 떴다.
“아···!”
지붕에 난 유리창마다 기괴한 악마들이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가 화려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달빛을 받아 마치 방안에 악마가 강림한 듯했다.
제단 주위로는 뜻을 알 수 없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 마법진은 옆에 짐짝처럼 쌓인 젊은 여자들의 시체에서 나온 피로 그려진 듯했다.
“-.”
5명의 혈족들은 오망성의 마법진 끝에 하나씩 섰다. 그들이 뜻을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우우우-
종탑이 소리의 울림으로 가득했다.
“뭐, 뭐야!”
이비현은 손발을 빼내려 했으나, 구속구는 이비현 같은 상급 각성자를 충분히 묶을 만큼 견고했다.
스으으-
마법진에서 붉은 피안개가 솟아올라 종탑 안을 자욱하게 채웠다. 이비현의 코와 입에서도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남자 혈족 하나가 이비현에게 가까이 왔다. 그가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워질수록, 이비현의 몸에서 피가 더 많이 뽑혀나왔다.
“꺼져!”
“어리석은 것. 하급 노예인 권속이 아니라, 피를 나눈 혈족이 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영광인지 모르는구나.”
스으으-
이비현의 온몸, 상처가 없는 부분에서도 피안개가 피어올랐다. 이비현은 극심한 빈혈에 정신을 잃을 듯했다.
“거부할 것 없다. 네 몸에서 헌 피를 모두 뽑아내고, 주인님에게서 받은 우리의 고귀한 피를 채워줄 것이다.”
두 번째 혈족이 다가왔다. 그녀는 바로 이비현의 어머니 호연이었다. 물결 모양의 날이 있는 의식용 단검을 들고 있었다.
“안돼···!”
이비현은 정신이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크나큰 절망을 느꼈다. 호연을 찾긴 했지만, 호연은 껍데기만 남아있을 뿐 진짜라고는 할 수 없었다.
“고귀한 피를 채워주고 나면, 너도 주인님의 혈족이 될 것이다.”
“우리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주인님의 새 육신이 될 것이니···.”
처음 다가온 남자 혈족은 이비현의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심장을 의식용 단검으로 찌르기 위한 준비였다.
이비현은 몸을 비틀며 반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휘익!
호연이 의식용 단검을 높이 쳐들었다.
“어, 엄마!”
그 순간. 달빛을 가린 구름이 걷히면서 스테인드글라스가 반짝 빛났다.
돌로 된 제단 위. 이비현의 눈물 섞인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
그때 호연이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생각나면서, 뇌가 깨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왜 그러나?”
남자 혈족 하나만 이상한 기색을 감지했을 뿐. 다른 혈족들은 의식을 위한 주문을 외우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후우.”
몸을 떨던 호연은 진정이 되었는지, 다시 단검을 높이 쳐들고 이비현의 심장을 찌를 준비를 했다.
쉬익-
터엉!
호연이 내리친 것은 구속구의 잠금쇠였다.
“아니-!”
쉬이익!
그리고는 바로 옆에 서 있던 남자 혈족의 목줄기를 그어버렸다.
툭!
혈족의 목이 떨어지자, 주문을 외우던 혈족들도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가뜩이나 혈술로 의식을 준비하느라 많은 힘을 쓰고 있던 상태인데다, 호연은 그들 중에서 가장 강했다.
몇 분 후. 나머지 혈족들도 모두 전투 불능이 돼 쓰러졌다.
“감히 주인님을 배신하고도 네년이 무사할 것 같으냐!”
목이 떨어진 혈족이 머리만 남은 채로 호연을 노려보았다. 호연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비현의 구속구를 풀어주고 있었다.
“운좋게 도망가더라도, 평생 피의 저주를 받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내 딸을 지켜주지 못할 바엔 저주를 더 받겠다.”
목이 떨어진 혈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혈족의 속박이 풀린 것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시끄럽군.”
퍼억!
호연은 목만 남은 혈족의 머리통을 멀리 차냈다. 회복을 최대한 늦추기 위함이었다.
“크으윽···.”
혈족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하던 호연이 고통의 신음을 흘렸다. 주인의 금제를 어긴 탓에, 온몸이 불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의 저주를 받는 것이었다.
혈족이 되면서부터 모든 감각과 통증에서 해방되어 지냈기에, 고통의 저주는 더욱 뼈아프게 느껴졌다.
호연은 고통을 참아내며 비현을 업고 종탑을 내려왔다.
“엄마, 엄마 맞죠?”
“....”
“엄마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어요.”
“....”
호연은 비척거리며 비현을 내려놓고, 멀찍이 물러섰다.
“그날 이후로 엄마가 죽은 줄 알았어요.”
“가까이 오지 마. 엄마는 이제 사람이 아니야. 언제 널 공격할지 몰라.”
호연은 자신이 다시 이성을 잃을까 두려워 뒤로 물러났다.
“아니야. 엄마가 어떻게 변했든, 나한텐 엄마에요.”
비현은 호연에게 와락 뛰어들어 안겼다. 호연의 눈에서도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