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205화 (205/238)

#205루마니아 (8) - 사활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무정하던 눈에 욕망을 빛내며 차은비를 바라보았다.

“겉모습이 마음에 든다. 예쁜 인형 같구나.”

“끄윽, 흐으윽.”

차은비는 목이 졸려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아, 안돼!’

차은비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안위도 문제지만. 지금 광역 버프가 끊겨 버리면 한건우도 위험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으으···.”

차은비는 마지막까지 꺼져가는 정신을 붙잡았다. 그녀는 솜씨 좋은 힐러였기에, 목이 졸려서 정신을 잃는 기전을 잘 알고 있었다.

‘목 신경이 눌리고 동맥 혈류가 끊기면 의식이 나갈 거야!’

차은비는 목 신경과 혈관을 스스로 치유하며 압력을 버텨냈다. 그녀가 혼신을 다해 애쓰는 동안. 백작부인이 피의 채찍을 더 바투 당겼다.

“너는 내 권속으로 만들어서 소유하겠다.”

인간 수집. 그건 백작부인의 여흥거리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자신이 갖고 싶은 인간을 보면 권속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다.

늙지도 않고, 자신의 명령을 고분고분 듣는 인형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깐 곁에 두고 놀고 나면 금방 질려버려, 곧 새로운 인형으로 갈아치웠다.

그러고 나면 다른 권속들과 마찬가지로 죽든지 말든지 신경쓰지 않는 노예가 되었다.

오늘의 목표는 차은비인 모양이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차은비의 목을 향해 창백한 손아귀를 뻗었다.

터억!

“흑!”

피의 채찍으로 둘둘 말린 가는 목이 턱 조여왔다. 압박감이 더 강해졌고, 차은비는 더 반항하기 어려웠다. 차은비의 의식이 흐려지려는 사이.

콰아앙-

“어딜!”

박이경이 부서진 대리석 바닥을 박찼다. 디딤발을 디뎠을 뿐인데. 건물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거대한 크기. 마치 거인 같은 형상이 엄청난 높이까지 솟아올랐다. 박이경이 높이 떠 있던 백작부인을 덮쳤다.

그전보다 <거대화>의 힘이 확연히 늘어난 탓에, 그는 거의 거인족을 방불케 했다. 몸집이 큰 드 라모트 백작부인마저 박이경 앞에서는 작아 보일 정도였다.

크기만 보면 둔해 보일 수 있지만. 박이경은 온몸이 양질의 근육으로 가득해 속도마저 빨랐다.

콰악!

“!”

묵직한 정권이 전광석화처럼 백작부인의 몸통을 가격했다. 주먹으로 때리는 소리가 아니라 거의 탱크가 돌격해 와서 부딪친 소리 같기도 했다.

백작부인이 공중에서 쭉 밀려나며, 혈술로 만들어낸 피의 채찍도 흐트러졌다. 그녀는 차은비를 놓쳐 떨어뜨렸다.

“은비야!”

바닥에 착지한 박이경은 팔랑개비처럼 힘없이 떨어지는 차은비를 향해 다시 몸을 날렸다.

타앗-

차은비가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박기 전, 박이경은 그녀의 망토 자락을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허억!”

차은비의 목에서 막혀 있던 숨이 터져나왔다. 피가 몰려 새빨개져 있던 얼굴도 돌아왔다.

“괜찮지?”

박이경이 그녀를 놓자마자, 차은비는 곧바로 레이피어가 있는 쪽으로 굴렀고, 서둘러 전투 태세를 갖추어 일어났다.

보통 전투에서 차은비의 역할은 치유에 집중될 때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저 여자의 혈술 공격 앞에서 보호막은 소용없었어.’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혈술로 만들어낸 피의 채찍에, 차은비가 만들어낸 보호막이 어이없이 뚫렸다.

‘신성력 공격도 별로 통하지 않네.’

언데드 권속들은 신성력을 담은 공격 앞에 맥을 못 추었지만.

백작부인 본인에게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버프에 사활을 걸어야겠어!’

화아아아-

차은비는 홀의 기둥 쪽으로 물러나며 곧바로 광역 버프를 강화했다.

한건우와 차은비는 용갑으로 된 방어구를 입어서 쉽게 상처를 입지 않았다. 아까처럼 방심해서 붙잡히지만 않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백작부인도 타격을 입었고, 박이경 씨도 <신체 강화> 특성이 있으니까 쉽게 다치지 않을 거야.’

합리적인 생각으로 보였지만. 차은비가 오판한 게 있었다.

트드드득.

박이경의 주먹을 맞고 함몰되었던 백작부인의 몸통이 고스란히 회복되었다.

“헉!”

저걸 치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 회복하는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차은비조차도 저런 속도로 자가치유를 할 수는 없었다.

“흉물스러운 게 감히··· 이 몸을 건드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서릿발 같은 분노를 토해냈다.

파아악!

백작부인의 몸 주위로 핏빛의 굵은 줄기가 수십 개 자라나더니, 크라켄의 촉수처럼 사방으로 뻗었다.

‘혈술로 저런 공격까지?’

기겁한 차은비가 레이피어를 들고 몸을 낮추었다. 그러나 이번에 백작부인이 노린 것은 차은비가 아니라 박이경이었다.

쉬이익! 치잉-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을 듯, 톱니처럼 날카로운 피의 촉수가 박이경을 향해 집중적으로 휘둘러졌다. 말이 촉수지, 거의 자유롭게 춤추는 칼날이나 다름없었다.

권속으로 만들려고 한 차은비와는 달리, 박이경은 무조건 죽이려는 게 분명했다.

콰악! 퍼버벅! 퍽!

“허엇!”

박이경은 피의 촉수를 피하고 쳐내며 순식간에 백작부인에게 접근했다.

그가 백작부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는 순간.

“조심해요!”

휘리릭!

아래로 길게 뻗어나온 피의 촉수 하나가 박이경의 발목을 휘감았다.

“이까짓 것!”

박이경의 다리 근육이 크게 꿈틀거렸다. 피의 촉수가 박이경을 넘어뜨리려 했지만, 그는 굳건히 서서 버텨냈다.

촤악! 촤아악!

박이경이 발을 걷어차면서 촉수를 찢어버렸다. 그의 팔과 머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촉수도 잡아서 맨손으로 찢어냈다.

두두두두···.

박이경은 다시 멀어진 백작부인에게 돌진했다.

그러자 백작부인은 혈술로 피의 안개를 불러냈고, 피의 안개는 금세 짙어져 방어막이 되었다.

콰직!

방어막은 박이경의 주먹에 깨졌지만 그뿐이었다. 백작부인의 본체에는 더는 접근할 수 없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차갑게 비웃었다. 박이경의 거친 외모는 도무지 백작부인의 취향에 안 맞는지, 아까 차은비를 보던 눈빛과는 온도가 달랐다.

“네놈은 잠자코 죽어 줘야겠다. 시체는 내 권속들의 밥으로나 써야겠구나!”

피의 촉수들이 수십, 수백 개로 늘어났다. 촉수들이 바깥에서부터 박이경을 감쌌다. 마치 핏빛 말미잘에 잡아먹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끄아아!”

처음에 박이경은 촉수를 손발로 찢어내며 빠져나오는 듯했다. 그러나 혈술의 범위가 끝이 없었다.

마침내 커다란 핏방울 하나가 박이경의 몸 전체를 둘러싼 채 점점 밀도를 높여갔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놈의 목소리도 듣기 싫구나. 피의 결계 안에서 조용히 가거라.”

박이경은 끈적한 핏방울 안에 갇혀버렸다. 둥근 핏방울은 그의 온몸에 달라붙어 감싸고 있었다.

뛰고, 구르고, 갖은 수를 써도 박이경은 피의 결계 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죽어라.”

백작부인이 명령하자, 핏방울의 압력이 더욱 거세졌다. 박이경은 호흡을 참은 채로, 몸을 짓눌러 부숴버릴 듯한 압력을 버텨야 했다.

꾸르르륵···.

그의 밭은 숨이 핏방울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얼마나 괴로울지 뻔했다.

쉬이익!

차은비가 신성력을 가득 담은 레이피어를 들고 백작부인을 기습했다.

그녀는 웬만한 전투 계열 플레이어만큼 근접전에 능한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힐러치고는 뛰어나다는 것으로, 당연히 박이경이나 한건우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은 차은비의 돌진을 우습게 여겼다. 아직도 시선은 박이경에게 가 있었고, 단단한 보호막도 만들지 않았다. 귀찮다는 듯 피의 촉수로 쳐내려고만 했다.

그건 차은비가 노린 바였다. 그녀는 돌연 자리에 멈추고, 백작부인을 향해 레이피어를 던졌다.

슈웃-

일자로 뻗은 레이피어를 작은 투창처럼 사용한 것이었다.

“!”

허를 찔린 백작부인은 박이경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휙 돌아 날아오는 검을 피했다.

그때였다.

차은비가 <신의 가호> 특성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공격기를 시전했다.

‘대천사 소환.’

마음속으로 그렇게 이름 붙인 특성 활용이었다.

화아아-

차은비의 머리 위, 높은 곳에서 은빛의 구체가 찬란하게 빛났다. 그녀의 신성력이 응축되어 실체를 가진 파괴력이 된 것이었다.

슈웅-

처음 각성자 아카데미에서 이걸 썼을 때.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마치 하늘에서 빛의 날개를 단 천사가 나타나 삼지창을 들고 쇄도하는 것 같다고.

차은비는 그 과장된 표현이 오글거린다며 싫어하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계속 마음 한곳에 품고 있었다.

은빛의 구체가 길어지면서 백작부인을 향해 내리뻗었다. 끝부분은 삼지창처럼 갈라져 회피하기 어려웠다.

“커헉!”

삼지창처럼 갈라진 끝이 백작부인의 왼쪽 어깨에 명중했다. 신성력은 먹히지 않았지만, 자체의 파괴력이 워낙 강했다.

백작부인은 왼쪽 어깨를 부여잡으며 차은비를 노려보았다. 박이경을 붙잡고 있던 피의 결계가 약해졌다.

두두두···.

박이경은 약해진 압력을 감지하자마자 홀의 벽 쪽으로 달려갔고, 내벽을 따라 구르면서 피의 결계를 훑어냈다.

“건방진 년. 내가 친히 소유해주려고 했더니 귀찮게 하는구나.”

백작부인의 창백한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생각이 바뀌었다. 너부터 내 권속들의 밥으로 만들어주마!”

피의 촉수가 뻣뻣하게 일자로 굳어지더니, 수십 개의 화살이 되어 차은비를 향해 날아왔다. 그 속도가 무척 빨라서, 차은비가 미리 회피한 범위를 금방 좁혀왔다.

피유웅!

수십 개의 화살이 그녀를 덮쳤다. 차은비는 너무 많은 힘을 사용한 터라 보호막을 펼칠 수도 없었다. 보호막을 펼쳤다 해도 금방 파괴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죽게 될 줄이야. 역시 남을 구해주다 죽는 게 힐러의 운명인가?’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지만.

이 순간은 별다른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어?”

차은비는 다시 눈을 떴다. 시야가 어두웠다.

그녀의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가로막고 있었다.

바로 박이경이었다.

후두둑···.

뜨거운 핏방울이 놀란 차은비의 얼굴로 떨어졌다.

“앗···.”

그건 백작부인이 혈술로 움직이는 차가운 혈액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의 피였다.

그가 온몸으로 차은비에게 날아오던 피의 창들을 모두 맞아버린 것이다.

“내 앞에서 힐러를 건드리게 둘 순 없지.”

박이경은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러나 입에서는 피가 흘렀고, 안색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부상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아, 안돼!”

차은비가 소리쳤다.

*

한편, 1층 홀 반대편.

한건우는 아소카 싱과 처절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몇 가지 강한 특성에 너무 크게 의존했어.’

아그니의 화염, 그리고 인드라의 뇌전. 여기에 빛의 군주를 비롯해서, 공간 왜곡 같은 손에 익은 강한 특성들.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적을 상대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아소카 싱이 여기서 나올 줄이야···.’

<강신> 특성으로 한건우의 주된 전투 능력과 동일한, 아니 더 높은 수준의 공격기를 구사하는 아소카 싱.

그와의 전투가 무척 어려울 것이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다.

‘이것도 대비했어야 했어.’

게다가 한건우는 지금 칼리의 속박이라는 디버프까지 받은 상황. 차은비의 버프를 받아도 평소와 같은 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소카 싱의 공격을 겨우 막아내는 게 최선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드래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드 라모트 백작부인과 권속들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아무래도 지하나 실내 공간에서 싸우게 될 줄 알았다.

실제로도 그 예측은 맞았다.

아소카 싱이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지하 환경이고 뭐고, 성을 통째로 날려서라도 드래곤과 함께 싸워야 했어.’

돌이켜 봐야 소용없었다.

한건우는 아소카 싱을 바라보며, 아공간 무기집으로 손을 넣었다.

‘정공법으로는 불가능해.’

지금이 바로 모험을 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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