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루마니아 (6) - 속전속결
S급 랭커 2명이 지원해주러 오다니.
지금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었다.
한건우가 감사를 표하자, 박이경이 씩 웃었다.
“우리가 마침 좋은 타이밍에 도착한 것 같군요!”
“그렇게 꽁지 빠지도록 서둘러서 왔는데 당연하죠. 어휴, 허리 아파.”
차은비가 허리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멕시코시티의 치안유지군을 돕기로 했던 그들.
짧은 시간 동안 정말이지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마리아 베르타의 잔당들을 소탕하랴, 다른 도시에서 냄새를 맡고 몰려든 약탈 조직들을 처단하랴. 이계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을 치료하랴. 방벽을 세우는 걸 도우랴.
막장에 가깝던 대도시를 평화롭게 만든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야말로 하루를 1년처럼 보내서, 이제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지 않았나 생각한 날.
한건우가 보냈다는 메시지를 받고 그들은 망설임 없이 루마니아로 향했다.
“내 말대로 빨리 오길 잘했잖아. 맞지?”
“네, 네! 인정한다니까요. 그런데 꼭 뛰어올 필요가 있었을까요···.”
차은비가 한숨을 쉬었다. 한건우는 황당해서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뛰어서 왔다고?”
“그런 셈이죠.”
차은비가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특별 대우를 받은 것까지는 좋았다.
수속 절차도 없이 공항을 바로 빠져나왔더니, <노네임> 길드원이라는 웬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건우가 전하는 말을 듣고, 무선 이어폰처럼 생긴 아이템도 받았다.
차은비는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 신중하자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진실성이 있긴 해도, 처음 보는 노인의 말만 믿고 움직이기는 어렵다고.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이경은 달랐다. 이어폰처럼 생긴 아이템을 귀에 끼워서 조작하더니, 한건우의 위치가 감지되는 것 같다며 난리법석을 피웠다.
박이경은 차은비를 데리고 공항에서 아무 차량이나 잡아 타서 엑셀을 밟았다. 도심을 조금 빠져나가자, 도무지 도로가 멀쩡한 곳이 없었다. 차량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하자 박이경이 제안했다.
- 은비야, 뛰어서 가자.
- 뭐···라구요?
차은비의 승낙도 기다리지 않고, 박이경은 거인화를 한 채로 차은비를 인형처럼 번쩍 들어 어깨에 들쳐멨다. 그리고는 말 그대로 숲속을 뛰어서 성까지 찾아온 것이다.
“대체···.”
“어허이, 너무 그렇게 감동하시면 제가 민망하다니까요.”
박이경이 실실 웃었다. 다시 보니 그의 바지춤이 엉망이었다. 온통 나뭇가지에 긁히고 진흙투성이가 된 것이었다.
다시 하급 권속들이 꾸물꾸물 밀려들고 있었다.
끼이익-
관 속에서 잠들어 있던 놈들까지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박이경이 그들을 향해 돌아서며 권투 자세를 잡았다.
“저놈들은 뭐예요. 뱀파이어인가요, 인간인가요?”
차은비가 황급히 물었다.
“그 중간 정도로 보면 됩니다.”
한건우가 발록의 화염 채찍을 들고 박이경의 반대쪽에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화염 채찍에 맺힌 불꽃은 미약했다. 그의 기세가 한결 꺾인 것을 보고, 차은비는 놀랐다.
“마스터, 왜 그래요? 어디 다친 데라도···.”
“어이, 가까이는 가지 마!”
박이경이 경고하자, 차은비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몇 미터 거리를 두고 한건우의 상태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상황을 깨달았다.
“음, 저주에 걸리셨군요. 그런데···.”
“그래? 어쩐지. 빨리 형님 풀어드려! 넌 뭐든지 다 풀 수 있잖아.”
박이경이 경박스럽게 재촉하자, 차은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나라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니까요!”
“아니던데. 야, 빨리!”
스으으-
하급 권속들이 긴 손톱을 뻗고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철컥!
발록의 화염 채찍은 왼손으로 넘기고, 한건우가 총기 아이템을 꺼냈다.
마리아 베르타의 무기고에서 가져온 기관단총이었다.
“형님, 저놈들 언데드 같은 거면 총알로는···!”
투두두- 투두- 투두두-
한건우가 한손으로 총을 쏘았다. 놀라울 만큼 효율적인 격발이었다. 얼추 봐도 총알 한 발마다 권속 하나가 쓰러졌다. 둥글게 좁혀오던 포위망도 주춤했다.
“와우!”
박이경이 감탄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한건우는 탄창을 갈며 설명했다.
“머리 부분에 미스릴 코팅을 한 총알이야.”
“형님, 저놈들 급소가 여깁니까? 여길 노리시길래요.”
박이경이 자기 손끝으로 뒷목과 머리가 이어지는 부분을 툭툭 쳤다.
“정확해. 뇌간 부분이 망가지면 회복을 못하거든. 미스릴 무기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지금은 차은비 씨가 있으니까.”
한건우가 차은비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무슨 의미인지 알아채고, 박이경의 너클에 <신의 가호>를 걸어주었다. 스치기만 해도 언데드에게 손상을 입히는 신성력을 깃들게 한 것이다.
“좋아, 이걸로 싹 다 청소하는 거다.”
박이경이 맹수처럼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이야아앗!”
그가 발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콰아앙-
박이경이 권속들 한가운데에 뛰어들며 큼직한 주먹으로 바닥을 때렸다.
“꿰에엑!”
바닥에 깔린 권속들의 머리가 빠개지고, 신성력을 담은 충격파가 일어나 주위의 권속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박이경은 날아오는 작은 공들을 연속으로 쳐내듯이 권속들의 두개골을 깨부쉈다.
급소라는 뇌간을 정확히 노리기 어려우니, 머리뼈와 목 전체를 부수기로 한 것이었다.
퍼억- 터엉-
박이경의 주먹이 회오리처럼 휘몰아치자, 백작부인의 하급 권속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쉬이익-
그런 모습을 보았는데도, 권속들은 겁도 없이 박쥐처럼 날아들었다.
콰악! 쾅!
박이경은 너클을 낀 양손으로 권속들의 머리를 잡고 서로 부딪쳤다. 머리를 몸에서 뽑아내기도 했다.
“힘을 낭비하진 마. 진짜 죽여야 할 적은 따로 있으니까.”
“압니다. 저기 지하에서 올라오는 놈들이죠?”
박이경도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투두두- 투두두두-
한건우는 후방에서 미스릴 코팅을 한 총알로 지원 사격을 했다. 그나마 마력 사용을 최소화해서 다행이었지만, 슬슬 기본적인 체력에도 한계가 밀려왔다.
그동안 차은비는 한건우의 저주를 진단하고 있었다.
직접 접촉해서 촉진을 해보면 더 빨리 파악할 수 있지만.
가까이 가면 차은비마저 힘을 못 쓰게 되니 떨어져서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어요. 일종의 디버프 저주네요.”
“풀 수 있습니까?”
차은비의 미간에 주름이 가 있었다.
“아뇨. 뭔지 모르지만 너무 높은 수준이라··· 제 힘으로는 해주가 안 돼요.”
“어려울 겁니다.”
예상대로였다. 아소카 싱이 불러낸 칼리의 신격이 건 저주가 아닌가.
아무리 차은비가 최고의 힐러라지만, 손쉽게 쉽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때 차은비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저주는 그냥 놔두고, 제가 반대로 버프를 걸면 될 것 같아요.”
“그런 것도 가능합니까?”
“그럼요. 원래는 디버프 저주 자체를 푸는 게 훨씬 효율적이니까 안 쓸 뿐이지, 충분히 효과적인 방법이에요.”
차은비가 눈을 감고 <신의 가호>를 발동했다.
샤아아아-
기도하듯이 모은 그녀의 손에서 성스러운 은빛의 광채가 솟아났다. 그 빛이 한건우의 몸을 뒤덮었다.
“!”
한건우의 동공이 커졌다.
몸이 가벼워지고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디버프를 그대로 둔 채, 버프를 먹여서 상쇄를 시키는 전략이었다.
바윗덩이를 달고 진흙탕 속에서 헤엄치다가, 수영장 물로 옮겨온 느낌이랄까.
백 퍼센트 완전히 회복되는 건 아니었지만, 반 정도는 회복되었다.
“확실히, 좋아졌군요.”
“다행이에요.”
차은비가 생긋 웃었다.
한건우가 프리즘을 높이 들고 <빛의 군주>의 광선을 비추었다. 아까처럼 찔끔찔끔 비추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건 뭐죠?”
“눈 감으세요.”
파아아아-
1층 홀 전체에 영롱한 무지개 색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캬아악!”
“크어어억!”
권속들이 뜨거운 불에 덴 것처럼 몸을 뒤틀었다. 이 빛의 마법진은 언데드의 성질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었기에, 차은비와 박이경은 놀라 입을 벌릴 뿐이었다.
한건우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특성 발동 : 죽은 자의 날]
한건우를 둘러싼 허공에 수백 개의 검은 총구가 나타났다.
총구의 방향은 전후좌우 사방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이경이 눈치 빠르게 차은비를 끌어안고 높이 뛰었다.
타아앗-
박이경이 한 손으로 샹들리에를 잡고 매달린 순간.
타다다다다다···.
한건우가 불러낸 총구가 사방에 포화를 쏟아냈다.
프리즘의 빛을 받고 쓰러져 꿈틀거리던 권속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샹들리에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뚝 끊어지면서, 박이경도 훌쩍 뛰어내렸다.
“다 해치웠습니까?”
“이대로라면 재생해. 미스릴이나 신성력으로 뇌간 쪽을 부숴야 해.”
“넵!”
박이경에게는 손가락 까딱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퍽! 퍽!
신성력을 담은 너클이 권속을 하나하나 처리했다.
차은비 역시 신성력이 담긴 레이피어를 휘둘러 재생을 막았다.
“그런데 형수님은 어딨습니까?”
“함정에 빠졌다. 이비현은 저들 손에 있어.”
“네에?”
“건물 위층 어딘가에 있을 거야.”
“먼저 구하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좋은데··· 여유가 없겠군.”
프리즘의 마법진이 잦아들자, 다른 권속들과 구분되는 강력한 기운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이비현을 해치지는 않을 거야.’
백작부인은 이비현을 자신의 혈족으로 만든 후, 영혼을 옮길 그릇으로 삼을 생각이니까. 당장 죽이거나 해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건우는 냉정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기압이 변하는 듯한 위압감.
박이경과 차은비도 숨막히는 기운을 느꼈다.
“형님. 저놈들··· 누굽니까?”
“인도인 남자는 나한테 이 저주를 건 놈이고, 뱀파이어처럼 생긴 백인 여자가 있어. 그 여자가 저 언데드 권속들을 부리지.”
“형님에게 저주를 건 놈을 박살내 드릴까요?”
“아니, 그 녀석은 내가 처리할게. 너는 여자 쪽을 견제해서 시간만 끌어줘. 절대 무리해서 맞서지 말고.”
“문제없으니 걱정마슈! 아예 곤죽을 내버리지!”
“어휴, 말로는!”
차은비는 박이경을 흘겨보았다. 한건우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차은비 씨, 버프가 끊어지지 않게 부탁합니다.”
“걱정 마세요.”
차은비가 다시 기도하듯이 손을 모았다.
찬란한 은빛의 아우라가 번졌다.
“!”
아까는 장난이었다는 듯.
시냇물처럼 쫄쫄 들어오던 버프가 확 쏟아졌다.
‘이제 거의 70퍼센트··· 아니 80퍼센트 정도는 회복되었어!’
투명한 은빛 실이 차은비와 한건우를 잇고 있었다.
거리를 두어도 버프가 유지되었다.
차은비의 능력이 이 정도였던가.
한건우의 놀란 반응을 보고, 차은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예전의 제가 아니라구요.”
차은비는 태연한 채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이마에 진땀이 배어났다. 신격의 저주에 맞서는 정도의 버프를 거느라 무리하는 게 분명했다.
시이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상급 권속들이 박쥐처럼 망토를 펼치고 날아왔다. 백작부인이 우아하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박이경이 그쪽을 맡을 동안, 한건우는 주위를 살폈다.
“아소카 싱, 어디 있지?”
번쩍!
한건우가 광선으로 1층 홀의 어둠 속을 밝혔다.
공중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아소카 싱의 모습이 나타났다.
“칼리 여신의 속박을 걸고도 움직이라니, 과연 대단하군.”
“저주는 상당히 강력하더군. 빨리 풀어야 해서 속전속결로 죽여드리지.”
한건우가 든 발록의 화염 채찍에 <아그니의 화염>이 일렁였고, 오른손에는 <인드라의 뇌전>이 번쩍였다.
그걸 본 아소카 싱의 눈동자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