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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먹는 플레이어-202화 (202/238)

#202루마니아 (5) - 칼리의 속박

아소카 싱이 싸늘한 말투로 살인을 예고했다.

그는 터번을 두르고 흰색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인도 고왕조의 후손다웠다.

두 명 다 왕족의 피가 흘렀고, 한없이 오만했다.

그들이 풍기는 기운은 어마어마했다.

이 넓은 지하 공간이 숨막히게 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파아아악-

홀을 둘러싸고 있는 백여 명의 권속들이 동시에 혈술을 펼쳤다. 검붉은 기운이 홀 바깥쪽을 따라 뭉치며 빠르게 소용돌이쳤다.

피유우우-

검붉은 선이 크게 둥근 원을 그리며 휘돌았다.

지하 홀의 돌벽까지 부서지며 돌가루가 날리기 시작했다.

‘진형?’

백작부인의 권속들이 혈술로 만든 것은 일종의 마법진이었다. 안에서 바깥으로 아무도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구조였다.

‘상황이 안 좋군.’

한건우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그런 셈이지만··· 설마 정말 제발로 들어올 줄이야. 내 혈족을 노리다니 대범하구나.”

백작부인의 차가운 얼굴에는 여전히 노기가 어려 있었다.

아소카 싱이 끼어들었다.

“드 라모트 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 자의 눈은 용기로 멀어 있다고요.”

“용기라... 만용이 지나치군요. 모용황의 사도도, 내가 찾던 영혼의 그릇도.”

백작부인이 이비현을 내려다보았다.

호연이 드 라모트 백작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이비현의 몸을 귀중한 물건처럼 바쳤다.

이비현을 넘겨받은 백작부인이 그녀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핥았다.

“흐윽···.”

이비현은 정신을 잃은 채로 신음을 흘렸다.

“뭐 하는 거냐?”

한건우는 분노했지만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이비현을 붙잡은 백작부인의 손톱이 강철처럼 날카로워, 이비현의 살을 파고들 것 같았다.

다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짜악!

거구의 백작부인이 큰 손으로 있는 힘껏 호연의 뺨을 때린 것이다.

칭찬은커녕 구타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쿠웅-

호연의 몸은 힘없이 날아가 돌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익숙한 듯, 꿈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감히 내 영혼이 담길 그릇에 상처를 내다니!”

“...죄송합니다. 벌을 주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방금 맞은 건 그건 처벌 축에도 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되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주인이시여, 자비에 감사합니다.”

백작부인은 관대한 표정으로 용서를 받아들였다.

백여 명의 권속들도 놀란 표정 하나 없이 그 모습을 덤덤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나마 높은 계급이라는 혈족이 이 정도면, 다른 권속들은 무슨 취급을 받을지 뻔했다.

백작부인은 이비현의 혈향을 가득 들이마시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상상한 그 이상이로군. 이 아이라면 충분히 내 영혼을 담을 그릇이 될 수 있겠어.”

“···?”

대체 영혼을 담을 그릇이란 게 무엇일까? 한건우는 낯선 소리에 의아해서 백작부인을 노려보았다.

아소카 싱은 한술 더 떠서 이상한 말을 했다.

“드 라모트 님, 지금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영영 못 본다니 아쉽군요. 꼭 육신을 옮겨 가셔야 합니까?”

“이 몸을 너무 오래 써서인지, 점점 사소한 문제가 생긴답니다. 당신은 후손을 낳아 옮겨갈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니. 이 방법밖에 없어요.”

아소카 싱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아들만 수백 명을 만들었지만, 저의 <강신>을 버틸 만한 몸은 못 찾았습니다.”

“딸들 중에서 있는지도 모르지요.”

백작부인의 말을 듣고, 아소카 싱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수천의 딸들 중에도 나의 힘을 버틸 만한 강한 육신은 없었지요.”

“마찬가지예요. 수많은 혈족을 만들어도 실패해 왔는데, 이 아이라면 가능할 것 같네요.”

“드 라모트 님, 지난번에도 그렇게 얘기하시더니, 혈족을 하나 늘리는 데 그치셨지요.”

아소카 싱이 고갯짓으로 호연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저게 다 무슨 소리야?’

그들의 대화에 한건우는 소름이 돋았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비현이의 몸에 옮겨가려 한다고?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는 게 그런 뜻인가?’

아마 예전에도 같은 목적으로 호연을 노린 것 같았다.

이제 수수께끼가 풀렸다.

‘라모트 성에서 이비현의 어머니를 달라고 한 게, 그 이유 때문이었나.’

그때는 백작부인의 영혼을 호연에게 옮기는 데 실패한 모양이지만. 호연은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혈족이 되어있었고, 지금 백작부인은 호연의 딸인 이비현을 노리고 있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이론적으로는 후계자에게 영혼을 옮기면서 영생을 할 수도 있다는 건데.’

순간적으로 한건우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 나는 모용씨의 59대 직계 가주, 황이라고 하네.

‘모용황···?’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의 손녀라던 소소도 생각났다.

‘설마 그 여자가 나중에 모용황의 영혼을 받는 건가?’

늙은 각성자들이 새로운 몸으로 옮겨가려고 젊은이들을 물색한다니. 생각만 해도 역겨운 일이었다.

한건우는 눈앞에 보이는 아르고스의 주인들을 경멸을 담아 노려보았다.

“사도 한건우, 죽이기 전에 하나만 묻겠다.”

아소카 싱이 입을 열자, 한건우는 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혹시 우리를 위해 일해볼 생각은 없나?”

“내 몸도 사용하려고 하는 건가?”

아소카 싱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자네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네. 일개 사도가 두 명의 주인을 없애다니.”

“모용황의 칼이 되지 말고 우리를 섬기는 건 어떠냐? 이후의 세상에서 우리 바로 아래, 세 번째 자리를 약속하겠다.”

한건우는 조용히 창을 돌렸다.

“모용황도 그다지 좋아하긴 어렵지만, 너희들도 마찬가지군.”

아소카 싱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더이상의 협상은 없다.”

아소카 싱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

한건우가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머리를 노리고 마창 게이볼그를 던졌다.

[특성 발동 : 마창 게이볼그의 주인]

명중할 수밖에 없는 거리였다.

“주인이시여!”

쉬이익-

드 라모트 백작부인 앞으로 수십의 권속들이 재빨리 몸을 날렸다. 권속들은 자기 몸으로 창의 진행을 막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둑-

권속들이 한데 뭉쳐서 창에 연속으로 뚫렸다.

그러자 창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런!”

먼저 프리즘을 써서 권속들을 무력화시킬 것을.

한건우는 뼈아픈 후회를 했다.

슈우우-

수십의 권속을 뚫고도, 마창 게이볼그는 여전히 드 라모트 백작부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터억!

“!”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장갑을 낀 손으로 마창 게이볼그의 창대를 붙잡았다.

한건우의 염동력으로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소카 싱이 양손을 기도하듯 모으자, 그의 두 눈이 푸른빛으로 빛났다. 아소카 싱의 몸 주위에 거센 회오리바람이 일며 흰 비단 옷자락을 휘날렸다.

“일 주일 치의 수명.”

[특성 발동 : 강신]

힌두의 신을 몸에 강림하는 아소카 싱의 특성이었다.

쿠웅-

거대한 신의 격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소카 싱의 온몸이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초점 없는 눈동자가 한건우를 향했다.

- 이 놈이 7일의 수명을 주면서까지 나를 불러내다니. 이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아소카 싱은 입을 벌리지 않았건만.

죽음처럼 끔찍한 여신의 목소리는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칼리 신격이 강림했군요.”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감탄했다.

아소카 싱이 복잡한 수인을 맺었다. 그의 몸이 가부좌를 튼 채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 칼리의 속박.

한건우의 주변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마치 두터운 사슬로 몸이 속박되는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움직임뿐이 아니었다. 마력의 움직임도 수월하지 않았다.

아소카 싱은 공중에서 웃었다.

- 속박의 저주다. 이 공간 안에서는 아무도 이전과 같은 힘을 쓸 수 없지.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다가왔다.

“네 힘을 다 빼고 나면, 나의 훌륭한 권속으로 만들어주마. 자유의지를 잃은 노예가 되면 볼만하겠구나.”

백작부인은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틀어올린 비녀를 풀었다. 비녀의 끝으로 스스로 손목에 칼을 긋자, 피가 안개처럼 흘러나왔다.

그녀가 혈술로 만들어낸 피안개에 속삭였다.

“자, 나의 아이들아. 저 자를 죽기 직전까지 물어뜯어라.”

그리고 호연에게 이비현을 다시 맡기며 명령했다.

“이 아이는 곧 혈족으로 만들 테니, 제단에 묶어두어라.”

“예, 주인님!”

한건우는 마음이 급해졌다.

‘제길, 여기서 시간을 오래 끌면 안돼!’

그러나 <칼리의 속박> 안에서는 수많은 특성도, 무기도 소용없었다.

마치 온몸에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수영을 하는 것처럼 답답했다.

칼리의 신격이 내린 저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다.

드래곤 갑주에도 기본적인 저주 방어 능력이 있었고, 방어 특성도 있었지만. 그걸로는 소용없었다.

[특성 발동 : 위상 교환]

현재 위치에서 벗어나고자 다른 권속과 <위상 교환>을 시도했지만, 실패에 그쳤다.

[특성 발동 : 골렘 소환]

바깥쪽의 돌과 바람을 골렘으로 불러일으키려 하였으나, 미미한 바람이 부는 데 그쳤다.

한건우는 우선 적을 상대하는 면적을 줄이기 위해, 벽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 등을 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끝없는 언데드 권속들의 물결이었고,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보낸 피안개까지 자욱하게 밀려왔다.

저 피안개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한건우는 한손으로는 <아그니의 화염>을, 다른 손으로는 <빛의 군주>를 발동했다.

그의 다섯 손가락에서 빛과 화염이 기관총처럼 날아갔다.

파바바바···.

평소였다면 권속들을 즉시 제압할 수 있었겠지만.

한건우의 능력은 아소카 싱이 건 속박으로 매우 약화된 상태였다.

한마디로 평이한 각성자가 한 공격 수준.

권속들은 부상을 입고 밀려나는 정도에 그쳤다. 그마저도 점차 회복되는 것이 보였다.

‘이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어.’

당장 적들의 돌진을 어느 정도 막을수는 있었으나 이 상황에서 이들을 뚫고 앞에 나아가기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야 해.’

[특성 발동 : 디그]

‘그래!’

본래 기초적이고 단순한 특성인만큼, 속박의 저주를 받고도 크게 타격이 없었다.

한건우는 <디그>를 이용하여 주변의 땅을 움푹 꺼지게 만들었다.

구덩이의 크기는 작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무작정 달려오던 권속들이 서로 엉켜 넘어졌다.

혼란이 일어난 사이.

한건우는 미리 빛을 넣어두었던 프리즘을 치켜올렸다.

파아아앗!

“크아아악!”

속박되기 전에 넣어둔 <빛의 군주>의 기운인데다, 프리즘을 통해 반사되니,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권속들이 혈술로 펼친 진형이 약화되었다.

한건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상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혹시나 자신을 둘러싼 속박의 저주가 약화되지는 않을까.

천장을 무너뜨리며 겨우 지상층까지 올라왔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 사이 피의 안개와 권속들은 다시 한건우를 추격해왔다.

한건우는 또다시 포위되었다.

“하하하···.”

- 깔깔깔···.

드 라모트 백작부인과 칼리의 신격은 서두르지 않았다.

한건우를 비웃는 듯이, 부서진 계단을 타고 천천히 한건우를 따라 올라왔다.

한건우는 한 손에 프리즘을 들고, 다른 손에는 발록의 화염 채찍을 휘둘렀다.

이미 약해진 <빛의 군주>라도 프리즘을 통하면 충분한 위력을 발휘했기에, 임시방편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언데드들을 뚫고 이비현을 찾으러 가기는 쉽지 않았다.

‘이비현··· 어디 있어?’

그때였다.

갑자기 성 지상층의 한쪽 벽이 부서지며 큼직한 인영이 등장했다.

“형님!”

박이경이 거대화를 한 채로 나타났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 녀석들은 제가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어, 내 몸이 왜이렇게 둔해지지?”

“나한테서 떨어져!”

한건우가 박이경을 밀어냈다.

한건우에게 가까이 오기만 해도 칼리의 속박이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거리를 두는 박이경에게, 한건우가 물었다.

“차은비는? 같이 안 왔어?”

그때 거대한 빛의 십자가가 1층 홀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크어억!”

“그어어어···.”

언데드 권속들이 괴로워했고, 피의 안개도 옅어지며 물러났다.

“뭐죠? 이 정도로 사악한 기운이라니.”

차은비가 안으로 훌쩍 뛰어내리더니, 한건우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건우는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와 줘서 고맙다.”

그들의 등장이 이렇게 감동적인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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