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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먹는 플레이어-201화 (201/238)

#201루마니아 (4) - 라모트 고성

한건우가 호텔 방으로 돌아가자, 이비현은 창가에 서서 길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돌아보았다.

“어떻게 됐어요?”

“아버지 품으로 잘 돌려보냈지. 아직 깨울 순 없겠지만.”

한건우가 장비를 풀어 점검하며 대답했다.

“한 명이라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서 다행이에요.”

이비현이 안도했다.

어머니를 찾고 있는 그녀의 상황이 겹쳐져서인지. 그녀의 표정이 깊었다.

그러나 한건우는 한 차례 고개를 저었다.

아직 구출이 완수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결국 머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임시방편에 불과할 거야.”

한건우는 탁자 앞에 앉으며, 지도를 꺼내 펼쳤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현재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아지트는 여기 있다는 거지.”

그가 가리킨 곳은 수도에서 50km 정도 떨어진 외곽이었다.

버려진 숲 속, 고성을 표시하는 마크가 보였다.

보통 유럽의 고성이 관광지나 저택이 되어 있는 것과 달리, 그곳은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폐성이라고 했다. 그 폐성 안에서 많은 부하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네, 생각보다 그들의 본거지가 인간들의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니. 뻔뻔하다고 해야 할까요.”

“오히려 그렇기에 사람들이 크게 의심하지 못한 걸수도 있어. 게다가 식량 공급이 필요할 테니까.”

“아히···.”

이비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건우는 프리즘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미리 빛을 채워놓았다.

이대로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두면 촌각을 다툴 때 곧바로 꺼내서 쓸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비현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밤하늘에 뜬 보름달은 완벽한 원 모양에서 살짝 모자란 모양이었다.

“내일이면 완벽한 보름달이 뜨겠어요.”

“그렇지.”

“매달 보름달이 뜨면 드 라모트 백작부인은 소수의 혈족들과 자리를 비운다고 했어요. 가서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붙잡아 심문한 권속들은 급이 낮았고, 그들은 모르는 게 많았다.

“뭐든 간에 보통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꾸밀 리 없지.”

이제까지 만난 아르고스의 주인들의 패턴을 보면.

돈이든 정치든 자기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반쯤은 오락을 위해.

죄없는 이들을 죽이고는 했다.

“제 어머니도··· 거기에 따라가지는 않을까요?”

이비현은 걱정하는 눈치였다.

“주로 백작부인의 바로 옆에서 수행하는 혈족은 남자 둘이라고 했으니, 일단은 거기에 희망을 걸어봐야지. 내일 고성에 가서 백작부인이 없는 틈을 타서 일단 너희 어머니부터 구해내자. 드 라모트 백작부인을 없애는 것은 그 다음이야.”

“정말··· 고마워요.”

이비현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야 전투에 방해될 요소가 없을 거야. 그쪽에서 인질로 삼으려 할 수도 있고.”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비현이 품속에 손을 넣어 무기를 잡으며 한건우에게 눈짓했다.

한건우가 문을 열자, 호텔의 제복을 잘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한건우 님. 호텔의 총지배인입니다. 길드 마스터가 감사의 인사를 보내시면서, 손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부족함이 없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필요하신 사항을 말씀해 주십시오. 길드의 명예를 걸고 완벽하게 도와드리겠습니다.”

“!”

노인이 객실 담당 직원인 양 들어올 때부터 미심쩍었지만.

이 호텔 전체가 <노네임> 길드의 세력 안에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마침 잘됐군.’

한건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남미 쪽에서 저를 도와줄 동료들이 도착할 겁니다. 그들이 온다면 길드에서 책임치고 신속하게 제 쪽으로 보내주면 좋겠습니다.”

호텔 총지배인이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미리 영사에 준하는 자격을 부여하여 공항 수속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나오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거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건만.

이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가운데, 지배인이 은쟁반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뭡니까?”

은쟁반 위에는 콩알만한 물건 두 짝이 올라와 있었다.

마치 무선 이어폰처럼 생긴 아이템이었다.

한건우가 그걸 집어들었다.

“저희 길드의 간부들이 쓰는 물건이죠. 이걸 착용하시면 원거리에서도 대화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고유의 진동을 느끼게 되어 서로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서로 떨어지는 일이 생길 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잠깐, 아이템이라면···.”

“맞습니다. 균열 안이나 마력장의 간섭이 있는 상황에서도 사용할 수 있죠. 균열 안팎의 소통은 안되지만, 같은 균열에 들어가 있다면 바깥에서와 똑같이 사용이 가능합니다.”

웬만한 위치 감지 아이템보다 훨씬 기능이 좋았다. 균열 안에서는 전파를 이용한 기기가 작동하지 않는데, 이런 게 있다면 상당히 편리할 것 같았다.

한건우가 이어폰을 들고 물었다.

“제 동료들이 도착할 때 이걸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렇다면 동료들이 한건우의 위치로 찾아오는 것도 손쉬울 것이다. 오랜만에 욕심이 나는 아이템이었다.

“감사합니다. 잘 쓰고 돌려드리죠.”

“저희 마스터가 드리는 선물이니 부디 받아주십시오.”

총지배인이 격식을 갖추어 감사의 인사를 했다.

다음날. 한건우와 이비현은 호텔에서 나와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고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호텔 지배인이 지프 차량까지 빌려준 덕분에 시간을 절약했다.

수도를 벗어나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된 듯한 숲길 쪽으로 접어들었다.

원래는 차도였던 흔적이 보이지만, 수십 년간 낙엽과 덩굴이 층층이 쌓여 거의 자연 상태의 흙길이나 다름없었다.

차도 주변의 숲은 처음에는 낮은 관목 수풀로 시작하다가, 점점 우거진 고목들이 우뚝 솟았다. 마침내 햇빛이 가려져, 아직 낮인데도 한밤중처럼 느껴졌다. 습기가 없는 건조한 숲이었다.

“뱀파이어들이 좋아할 만한 곳이네요. 괜히 으슬으슬한 것 같고.”

“이 땅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아예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으로 바뀐 것 같아.”

“한국보다 더 심하네요···.”

“성 근처에 도착하면, 차를 숨기고 대기하다가 걸어서 접근할 거야.”

“알겠어요.”

이비현이 지도를 보면서 이어폰을 만지작거렸다.

우거진 숲 때문에 고성의 위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도상으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나뭇가지와 잎으로 숨겨두었다.

한건우와 이비현은 발소리를 죽여 라모트 성이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동유럽의 가을 해는 짧았다. 벌써 흐린 해가 뉘엿뉘엿 저물려는 기색이 보였고, 음산한 숲은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저기다.”

드디어 폐성의 성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라모트 고성은 작지만 위치가 좋았다.

“천혜의 요새로군.”

성의 3면은 완만한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성에 들어가려면 전부 언덕을 걸어 올라와야 하는 구조였다. 누구든지 성에 접근하다가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언덕이 아닌 나머지 1면은 높은 절벽과 맞닿아 있었다.

차량이나 사람의 걸음으로는 올라갈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이었으나, 한건우에게는 해당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한건우와 이비현은 절벽 위에서 성을 바라보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저기 보름달이 뜨고 있어요.”

“들은 대로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성을 나가주면 좋을 텐데.”

[특성 발동 : 화식조의 눈]

한건우의 동공이 커지면서 오렌지색을 띠었다.

망원경도, 열 감지 고글도 필요없는 밝은 시야로 성안을 샅샅이 훑었다.

겉으로는 작은 고성이지만, 지하에 거대한 공간을 파서 많은 부하들이 지내고 있다고 했다. 드라큘라의 전설이 있는 브란 성과 같은 구조였다.

“지상층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기척은 느껴지는데, 불이 켜진 방은 하나도 없군.”

“굳이 빛이 필요없나 봐요.”

흡혈귀에 가까워 빛을 싫어한다는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

“지상층에는 하급 권속들이 위치하고, 상급 권속은 지하 1층, 혈족들은 지하 2층 창고의 관에서 잔다고 하니까. 지붕으로 접근한 후 하녀 방을 통해서 바로 지하로 내려가자.”

“네.”

끼이이이-

성문이 열렸고, 4마리의 말이 모는 마차가 나타났다.

말들은 체온이 감지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말처럼 움직였다.

‘동물도 권속으로 부리는 것인가!’

마차가 시야에서 숲길로 사라지자, 한건우가 말했다.

“자 내려가자.”

한건우와 이비현은 바람처럼 절벽에서 내려와 성벽을 뛰어넘고 지붕 위에 착지했다.

은신으로 몸을 숨긴 채, 하녀 방으로 쓰이던 빈 다락방 창문을 열고 성 안으로 들어왔다.

성은 숨막힐 듯 조용했으나, 이제는 이비현도 움직이는 존재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로.”

한건우가 가리킨 곳은 하녀 방 옆, 상하로 연결된 굴뚝 같은 자리였다.

중세시대에 하녀들이 도르래로 음식이나 빨랫감을 오르내리던 통로로, 사람 하나쯤 들어갈 너비는 되었다.

“!”

수십 겹의 거미줄을 뚫고, 그들은 지하 2층에 소리없이 착지했다. 한건우는 이비현에게 경고했다.

“어머니를 찾더라도 제압하기 전까지는 방심하면 안돼.”

“네, 조심할게요.”

‘조금 불안한데.’

이비현은 평소에는 냉정하지만, 가까운 사람의 일에는 감정적이 되는 단점이 있었다.

와인 창고로 썼을 법한 지하 동굴 안.

고급스럽게 꾸며진 낡은 관 4개가 놓여져 있었다.

그 중 2개는 열려있었고, 2개는 닫혀있었다.

한건우와 이비현은 남은 2개의 관뚜껑을 동시에 열었다.

“헉!”

이비현이 비명을 삼켰다.

한건우가 연 관은 텅 빈 채였지만, 이비현이 연 관에는 호연이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한건우도 내심 깜짝 놀랐다. 호연은 이비현과 꼭 닮았기 때문이다. 쌍둥이 자매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거짓말 같은 상봉에, 이비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엄마···.”

한건우는 호연을 잘 살피면서, 여차하면 제압할 준비를 했다. 그때 호연이 갑자기 눈을 떴다.

“비현··· 비현이니? 우리 딸 맞니?”

“...!”

“애기였던 우리 딸이 언제 이렇게 컸어?”

“엄마, 괜찮아요? 날 알아보겠어요?”

비현은 기억 속의 엄마와 너무나도 똑같은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어버렸다.

“그럼, 눈이 아빠랑 똑같네. 그날 엄마가 시킨 대로 잘 도망갔었구나···. 잘했어.”

“엄마, 이럴 때가 아니에요. 빨리 여기서 나가요. 자세한 얘기는 나가서 해요.”

“그래, 엄마가 아는 통로가 있어. 거기로 가자.”

한건우는 조용히 모녀의 뒤를 따라갔다.

이비현이 먼저 모서리를 도는 순간. 갑자기 호연이 손으로 이비현의 어깨를 찔렀다.

“악!”

“이런 제길!”

한건우가 자책했다. 이비현이 방심한다고 자기까지 마음을 놓으면 안 됐는데, 실수였다.

“호호호.”

손톱에 독이 있는 것인지, 비현은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었다. 호연은 비현을 안고 중앙 계단을 따라 날듯이 내려갔다.

지하 3층. 연회라도 열 법한 거대한 홀 가운데.

호연은 사악한 표정으로 비현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어리석은 것들, 나는 오로지 드 라모트 주인님만을 섬긴다. 인간이었을 때의 사사로운 기억에 좌우될 것 같으냐!”

“원하는 게 뭐냐?”

한건우가 물었다.

조금 이상했다. 단순히 한건우를 죽이려 했다면 바로 공격했을 것인데, 왜 인질을 잡고 지하로 유인한 것인지.

“그건 내가 설명해주지.”

차라락!

홀을 둘러싼 백여 개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검은 옷을 입은 권속들이 나타났고, 홀 가운데에 핏빛의 회오리바람이 불더니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나타났다.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검은 드레스에 검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있어 독특한 모습이었다.

“성을 나간 게 아니었군. 함정이었어.”

한건우가 쓰게 되뇌었다.

“감히 나의 권속들을 죽여놓고도 네놈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멍청한 무칸 놈이나 오만한 마리아 년은 몰라도,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한건우가 물었다.

“우리라는 건···설마?”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네, 한건우 군. 자네가 지나치게 위협적으로 움직이니 우리도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소카 싱··· 당신까지 있을 줄이야."

한건우가 쓰게 웃었다.

아르고스의 주인이 둘이나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포기하게. 자네는 오늘 여기서 반드시 죽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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