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200화 (200/238)

#200루마니아 (3) - 용의 아들

“됐어, 걸렸다.”

한건우가 웃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 측이 분명했다.

“엄청나네요.”

이비현이 혀를 내둘렀다.

“낚시에 성공한 거지.”

한건우가 단언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공들여서 연막을 피웠다.

경매를 하기 전에 초대손님에게 카탈로그를 보내는 건 기본.

거기에 <석판>이라는 이름으로 사진도, 설명도 없이 가격미정의 물건이 올라올 거라는 정보를 흘려 놓았다.

맛좋은 미끼를 뿌린 셈이었다.

아르고스의 주인들은 예언 석판을 백방으로 찾고 있었다.

한건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드 라모트 백작부인도 예언 석판 조각이 경매장에 흘러 들어오는지 관찰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어딘가 비밀이 있어 보이는 행동은 덤이었다.

물건을 경매장에서 보관하지 않고, 현장에서 주도록 했고.

한건우가 직접 물건을 노리는 것처럼 행세하며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렸다.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정체 모를 석판에 1억 유로라는 돈을 내려고 할까요?”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돈을 아끼지 않을걸.”

이비현은 아직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이었다.

아직 그녀는 예언 석판에 얽힌 주인들의 내기를 몰랐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잠시 휴식 시간이 있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준비한 음식을 드시며 즐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대에 선 사회자가 휴식을 선언했다.

“슬슬 움직이자.”

“어디로요?”

“손님이 아이템을 낙찰받기 위해서는 경매장 사무실에 가서 돈을 내고, 그와 동시에 낙찰받을 물건을 확인하고 교환하게 되어 있지. 그때 친다.”

저렇게 큰 거래를 하고서 음식에 관심이 있을 턱이 없으니.

아마 지금이 기회일 가능성이 높았다.

“....”

이비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가 반대쪽 귀빈석 발코니를 훑었다.

이제 두꺼운 커튼으로 좌석이 가려져 있었다.

말을 안 해도 이비현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여자.

그 여자가 이비현의 어머니인 호연일까?

“너희 어머니가 안 계신다고 해도, 이번에 꼭 위치를 알아내자.”

“네.”

한건우도 발코니의 커튼을 쳤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사생활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끼익-

발코니 뒤의 문이 아무도 모르게 열렸다.

그들은 각자 <그림자 맹시>로 복도의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경매장의 경비원을 피해서 조용히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한건우와 이비현이 경매장 사무실을 습격할 거라는 사실은, 오직 노네임 길드의 수장인 무명의 노인밖에 몰랐다.

‘서로의 행동에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게 깔끔하니까.’

나중에라도 특정 손님이 경매장과 짜고 쳤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좋을 건 없었다.

그들은 경비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두꺼운 돌문 앞에 섰다.

돌문에 손을 얹고 <진동 감지>를 발동하자, 문 안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먼저 석판을 넘겨라. 잔금은 곧바로 치르겠다.”

“아무리 그러셔도 규칙은 같습니다. 대금을 현금으로 완전히 지불하셔야 물건을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방금 석판을 낙찰받은 여자가 직원과 실랑이를 하는 것 같았다.

“물건을 직접 확인하지도 않고 대금을 전부 내라고?”

여자의 말을 듣고, 한건우는 확신했다.

‘직접 아이템 창을 확인해 보고, 예언 석판이 아니면 낙찰을 바로 포기하려는 거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군.’

단순한 변심으로 낙찰을 포기하면 30% 정도의 위약금을 물게 된다.

1억 유로를 통으로 날리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선택이리라.

“규정이 그렇습니다.”

직원이 딱딱한 목소리로 규정을 반복하자, 여자의 인내심은 금세 바닥났다.

“과연 네놈의 혀가 산 채로 뽑혀도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나 볼까?”

“손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으아악!”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내가 사무실 출입구를 막을 테니, 안쪽의 녀석들을 제압해줘.”

한건우가 이비현에게 눈짓을 하며 속삭였다.

“지금!”

쿠웅-

한건우는 어깨로 돌문을 부딪쳐 안쪽의 잠금쇠를 부쉈다.

이비현은 아직 은신을 풀지 않은 채로, 좁은 문 틈새로 들어갔다.

한건우도 따라 들어가면서 골렘을 불러냈다.

[특성 발동 : 골렘 소환]

드드득!

돌문 옆쪽. 단단한 바위 벽에서 단단한 팔이 솟아났다.

그어어···.

바위 골렘의 머리 형상이 돋아났고, 돌문을 닫으며 단단히 팔을 엮어 문 틈새를 막았다.

골렘을 부수지 않는 이상 문을 통과할 수 없게 되었다.

퍽!

그사이 이비현은 붙잡혀 있는 경매장 직원의 뒷목을 발로 차 기절시켰다.

“누구냐.”

바위동굴 같은 사무실 안,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상대편은 베일을 쓰고 있는 여자. 그리고 턱시도를 차려입고 가면을 쓴 3명의 남자.

이번에도 수를 맞춘 듯이 4명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한 무표정이었고, 섬뜩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생물체의 체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무실 안에 그들밖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한건우가 <그림자 맹시>를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권속들이로군.”

“너희들은 귀빈석 발코니에 있던 자들인가.”

여자가 베일을 살짝 들어올려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아 얼굴이 훤히 보였다.

이비현은 실망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엄마가 아니잖아?’

그걸 확인하자마자, 더는 볼 것도 없었다.

쉬익-

이비현은 드레스 자락을 들추고, 다리에 묶어두었던 칼집에서 시미터를 뽑았다.

“어딜!”

남자 권속들이 이비현에게 몸을 날렸다.

무기를 든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였다.

쉬익-

투두둑.

이비현이 시미터를 휘두르자, 권속들의 팔뚝이 잘려 떨어졌다.

그들은 팔이 잘려도 눈 하나 꿈뻑하지 않고 태연했다.

“아니!”

권속들이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잘린 부위에서 끈적한 피만 흘러내릴 뿐, 그들이 기다리는 일은 없었다.

“재생이 되지 않아.”

“물러나, 주의하라!”

이비현이 차가운 눈으로 시미터를 겨누었다.

미스릴을 코팅한 시미터가 빛을 발한 것이었다.

우왕좌왕하는 남자 권속들 뒤에서, 베일을 쓴 여자가 조용히 손을 펼쳤다.

시이이이-

“!”

바닥에 떨어진 잘린 팔뚝에서 검붉은 기운이 가늘게 뻗어나왔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혈술인가!’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쓰던 <피의 군주> 특성과 비슷했다.

혈액의 기운을 다루며 상대방을 공격하는 혈술의 일종으로 보였다.

시이익!

검붉은 기운이 한건우와 이비현을 덮쳤다.

스윽-

이비현은 <그림자 맹시>를 쓰며 피했지만, 그건 실수였다.

지난번에도 느꼈듯이 뱀파이어화된 피의 권속에게는 은신이 소용 없었으니까.

그들은 은신을 꿰뚫어볼 수는 없었지만, 피의 냄새와 온기를 알아챌 수 있었다.

[특성 발동 : 믿음의 방패]

- 아군 전체에 물리적 방어막을 형성한다.

치이이-

검붉은 기운이 방어막에 부딪히며 사그라들자, 여자의 표정이 싹 변했다.

“너를 어디서 보냈지?”

“그런 건 궁금해할 필요 없고, 내 물음에 순순히 답하면 고통없이 죽여 주지.”

“감히 어디서!”

티잉-

한건우가 네모난 프리즘을 허공으로 튕겨올렸다.

“?”

4명의 권속이 동시에 프리즘을 올려다보았다.

[특성 발동 : 빛의 군주]

파아앗!

강한 광선이 프리즘으로 들어가고.

그들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있던 그때.

파아아앗-

빛의 마법진이 펼쳐지며, 수백의 영롱한 무지개가 어두운 지하 사무실을 환히 밝혔다.

“크아아아아악!”

“그···그만!”

3명의 남자 권속들은 산 채로 불에 던져진 듯, 괴로움에 몸을 비틀며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허옇던 피부가 검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한건우가 예상한 모습 그대로였다.

“건우 씨!”

이비현이 외쳤다.

그전 균열 안에서는 모든 권속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그때와는 하나 다른 게 있었다.

“으윽···.”

바로 베일을 쓰고 있던 여자였다.

여자는 분명히 마법진의 빛에 괴로워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꼿꼿이 선 채로 버티고 있었고, 창백한 피부도 그슬리지 않고 여전했다.

시이익!

혈술로 뽑아낸 검붉은 기운이 그녀 주변에 보호막을 형성했다.

그녀의 몸 가장자리가 검붉은 입자로 스러지려는 것을, 한건우가 포착했다.

“어딜!”

<그림자 맹시>와 비슷하게 은신하며 회피하는 이동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터억!

한건우가 그녀의 목을 붙잡았다.

여자를 끝장내려는 순간. 한건우는 그녀의 얼굴이 묘하게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서 봤지?’

긴 금발을 늘어뜨린 그녀는 루마니아 사람으로 보였다.

회귀 전에 만난 게 아니고서야 낯익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회귀 전의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이런 여자를 만난 적은 없었다.

파스스스···.

한건우가 당황한 틈을 타, 여자는 다시 회피기를 발동하려 했다.

“아!”

그제야 한건우는 여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절대 못 놔주겠는데.”

[특성 발동 : 골렘 연성]

“으윽?”

여자가 목을 잡힌 채로 발버둥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 골렘이 그녀의 몸 주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한건우는 곧 손을 놓았고, 그녀는 공중에 두둥실 떠올랐다.

“으읍! 읍!”

한건우는 온몸이 투명한 바람 골렘으로 구속된 여자를 뒤로하고, 쓰러진 권속들에게 다가갔다.

마법진의 빛은 어느새 잦아들어, 권속들은 숨이 붙어 있었다.

이비현도 권속들에게 시미터를 겨누고 있었다.

티잉-

“허억!”

한건우가 프리즘을 장난감 던지듯 튕기자, 권속들이 크게 꿈틀거렸다.

오랫동안 통각을 잊고 살아가던 그들이었다.

방금 느낀 충격적인 통증이 트라우마로 각인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장영표가 개발한 프리즘은 유용하기 짝이 없어, 한건우는 다시 감탄했다.

‘아직 제대로 된 이름도 못 지었는데.’

거의 권속들에게 쉽게 자백을 얻어내는 고문기구나 다름없었다.

이왕 이런 분위기가 되었으니. 서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거 없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행하는 게 답이었다.

“자, 보이지?”

한건우가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권속들을 거느리고 있던 여자는 온몸이 꼼짝달싹 못하도록 구속되어 있었고, 출입구는 바위 골렘으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이제 너희를 도와줄 사람은 없어.”

“크윽···.”

“여기는 아무도 못 들어와.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많다는 얘기지.”

“끄으윽···.”

“대화할 준비가 된 사람부터 고개 들어.”

스윽.

“....”

엎드려 있던 권속들이 앞다투어 고개를 쳐들었다가, 서로 눈을 마주치고 환멸의 시선을 보냈다.

*

동유럽 최고의 정보 길드 <노네임>의 수장, 무명의 노인은 성주의 방에서 브란 성의 성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의 뒤에는 옛 왈라키아 공국의 16대 공작, 블라드 3세의 초상화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비록 블라드 3세가 잔혹한 통치로 후세에 ‘드라큘라’라는 오명을 얻기는 했으나.

실은 힘없는 국민을 외세의 침략에서 지키기 위해 싸운 조국의 영웅이라고, 노인은 평가했다.

‘지금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용의 아들, 블라드 3세가 돌아온다면 모를까.

루마니아는 이제 어린 자식들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였다.

‘내 딸아.’

사랑하는 딸이 실종된 그날부터.

노인은 이름을 버렸다.

오랫동안 딸의 뒤를 쫓았고, 이제는 그 배후를 알고 있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권속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노인의 냉정한 머리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사랑하는 딸은 아마도 인간의 피를 원하는 괴물들의 한 끼 식사가 되었으리라.

휘이잉-

바깥 바람이 없는데, 갑자기 열린 창문을 타고 돌풍이 불어왔다. 커튼이 둥글게 부풀었다.

“!”

커튼이 가라앉자, 한건우가 높은 창턱에 걸터앉아 있었다.

“맞는지 확인해 보시죠.”

“무엇을 말인가.”

한건우가 높은 창턱에서 방으로 훌쩍 뛰어들어왔다.

그의 뒤에, 천사 같은 금발의 여인이 눈을 감은 채로 밤하늘에 떠올라 있었다.

‘내가 너무 피곤했나?’

노인은 자신이 꿈을 꾸는 건 아닌가 싶었다.

“당신의 딸이 아닙니까?”

“....”

얌전히 눈을 감은 모습은, 노인의 회중시계 안에서 보았던 초상사진 그대로였다.

대답은 필요치 않았다.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한건우는 노인의 딸을 소파에 눕혔다.

노인이 달려와 딸의 볼을 어루만지려 했으나, 손가락은 허공을 떠돌았다.

아직도 바람 골렘이 딸을 구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지만, 현재 따님은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권속이 된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건우가 다시 창틀 위에 올라섰다.

슈욱-

한건우가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

노인이 급히 창으로 다가섰다.

창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검은 밤하늘에서 별만 요요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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