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199화 (199/238)

#199루마니아 (2) - 드라큘라 성

자신을 ‘노네임’이라 소개한 무명의 노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름진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놀랍군, 정말이지 놀라워. 젊은이, 그 이름은 어디에서 들었나?”

“이름만 들은 것이 아니라, 그녀를 직접 본 적도 있습니다.”

“크흠···.”

무명의 노인이 짐승의 울음 같은 거친 신음을 내뱉었다. 한건우의 말을 얼른 믿지 못하면서도, 혹시 모를 기회를 놓치기 아까운 듯했다.

“동유럽에서 가장 큰 정보 길드, <노네임>의 수장이라면 진실과 거짓을 가릴 방법 정도는 있을 테죠? 검증해 봐도 좋습니다.”

한건우의 말을 듣고, 이비현은 흠칫 놀랐다.

‘이 평범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정보 길드의 수장?’

이비현이 눈앞의 노인을 새삼 다른 눈으로 보았다.

유럽은 정보 조직이 길드 형태로 운영되었고, 세력도 큰 편이었다.

각성자 등급은 A급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훨씬 대단할 것이다.

“아니, 아니야. 자네의 말은 분명히 진실이네. 내 그 정도는 알지.”

무명의 노인이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리고, 상체를 앞쪽으로 기댔다.

푸른 눈이 광채를 띠며 한건우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역시, 확실하군.’

한건우는 노인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노인이 한건우와 시선을 맞춘 채로 말했다.

“날 일부러 속이려고 했다면 조금 더 믿을만한 위장을 했을 터. 가장 허무맹랑해 보이는 것이 때로는 진실이지.”

“믿는다니 다시 묻겠습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사라지는 것을 원하십니까?”

“물론이고말고!”

노인이 주먹을 부르쥐었다.

‘예전 그대로군.’

한건우는 괴로운 마음으로 과거를 떠올렸다.

회귀 전, 루마니아 작전.

한건우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국제 용병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루마니아에 파견되었다.

당시 루마니아의 내부 정세는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국민들은 계속 실종되고, 정부는 무능하여 치안을 유지하지 못했고.’

한건우가 활동하기는 편했지만,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정보 길드 <노네임>.

그들 역시 이능력 특수전단의 암살 목표물 중 하나였다.

‘대체 우리 정부는 왜 이들을 공격하는 거지?’

원래 상부의 명령에 의문을 품지 않던 한건우지만.

잠깐 그런 의문이 들기도 했다.

무언가 각국 정부 사이에 비밀스러운 협정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할 따름이었다.

‘이제야 오랜 수수께끼가 풀리는군.’

이능력 특수전단을 루마니아에 보낸 건 특수안보부가 아니었던가.

특수안보부는 초기부터 드 라모트 백작부인 측과 소통하고 있었으니.

‘드 라모트 백작부인은 남의 손을 빌려서 내부의 적들을 없애고 싶었던 거야. 용병으로 위장한 타국 군대를 통해서 내부의 적들을 해치운 거다.’

철저하게 흑막 뒤에서만 활동하는 여자였다.

과거의 한건우는 자기도 모르게 드 라모트 백작부인을 도와준 셈이었다.

한건우가 씁쓸하게 말했다.

“백작부인을 전면으로 끌어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맞다네. 그동안은 마치 고성에 사는 허깨비를 쫓는 것 같았지. 그녀의 존재를 아는 자도 몇 없을 정도이니.”

무명의 노인의 눈에 회한이 어렸다.

한건우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똑똑히 기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귀 전 한건우가 자기 손으로 노인을 직접 죽였으니까.

‘아마도 <거짓 간파> 특성의 원래 주인.’

한건우가 이제껏 유용하게 사용해 온 특성.

그건 바로 정보 길드 <노네임>의 수장인 무명의 노인에게 흡수한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속일 수 없기에, 대화는 빠르게 진전되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녀의 적이 되었습니까?”

“나뿐이겠는가? 온 유럽에 걸쳐서, 그 마녀 때문에 눈물 흘린 자들이 너무나 많아.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라네.”

무명의 노인의 얼굴에 오래된 분노가 서렸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과 그녀의 권속들은 인간이 아니네! 그들은 인간을 먹이로 하는 포식자야.”

“...!”

‘인간을 먹이로 하는 포식자.’

그보다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싶었다.

아르고스의 주인들은 각기 모습이 달랐지만, 본질은 마찬가지였다.

사냥꾼이 산짐승을 대하듯, 농부가 비료를 대하듯.

주인들은 철저히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이용하고 짓밟았다.

“우리 쪽 정부는 무능과 두려움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고 있지. 그들을 박멸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걸 걸겠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그녀에게 협조한다면 큰 보상이 있을 텐데요.”

한건우는 마지막으로 노인을 떠봤다.

“보상이라.”

노인은 허리춤에 단 회중시계를 보여주었다.

“?”

티잉-

맑은 소리와 함께 둥근 시계판이 옆으로 돌아갔다. 아름다운 소녀의 초상 사진이 보였다.

“어떤가, 내 귀여운 딸일세.”

“....”

한눈에 봐도 사진은 낡아 있었다.

“자네는 아직 자식이 없을 나이지만, 언젠가는 아버지의 마음도 알 날이 오겠지. 자식을 잃고서 한평생 복수의 칼을 가는 아버지를 상상해 보게. 그 어떤 보물을 준다 한들, 눈에 들어오겠는가?”

한건우는 조용히 고개를 젓고, 노인에게 말했다.

“냉정하게 말씀드리면, 당신의 힘으로는 아무리 해도 복수는 불가능합니다.”

“뭐라?”

그것이 사실이었다. 노인이 아무리 수완 좋게 행동한들, 아르고스의 주인에게 대립각을 세우기에는 실력이 모자랐다. 실제로 한건우의 기억이 그걸 증명했다.

“하지만 저와 손을 잡는다면 다를 겁니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밤의 가면무도회>에 참석해서 물건을 하나 경매에 올리겠습니다. 가짜 신분을 준비해 주십시오.”

한건우의 제안을 듣고, 무명의 노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밤의 가면무도회가 무엇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겠지.”

“물론입니다. 동유럽 블랙마켓에서 열리는 아이템 경매 아닙니까?”

“올릴 물건은 준비했나.”

“네, 이겁니다.”

한건우가 품 속에서 꺼낸 것은 검고 매끈한 석판이었다.

“그게 무엇인가?”

“백작부인을 유인할 물건입니다. 이게 들어왔다는 소식이면 한달음에 달려올 겁니다.”

노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 간파>를 쓰고 있다는 걸, 한건우는 잘 알고 있었다.

“좋네! 내 자네를 믿지.”

“해주실 일이 또 있습니다.”

한건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무명의 노인은 한건우의 제안을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다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자네는 타이밍이 좋군. 밤의 가면무도회는 바로 이번 주말에 열 예정이네.”

*

“건우 씨, 그 석판을 경매에 올리신다구요?”

고풍스러운 리무진 안. 이비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흑조처럼 검은 드레스를 입고, 깃털로 장식된 베네치아 가면을 들고 있었다.

노네임 길드에서 준비해준 복장으로, 이비현의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렸다.

“지금 이런 물건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어.”

“전에 저희 블랙마켓 경매장을 습격한 무칸의 부하처럼요?”

“그래.”

한건우는 몸에 맞는 수제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경매에 올릴 석판은 가죽 가방에 넣었다.

경매가 열리는 곳은 드라큘라가 살았다는 브란 성이었다.

‘드라큘라라니, 우습군.’

흡혈귀의 전설을 내세워 관광객을 끌어모았던 작은 성.

지금은 노네임 길드의 사유지로, VIP를 위한 어둠의 경매장이 되어 있었다.

평소 브란 성의 출입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고 했다.

‘유럽에서 손에 꼽는 지하 경매소인데, 그럴 만도 하지.’

유럽의 수집가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곳.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사악한 아이템은 물론, 노예 경매까지 이루어진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비현은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거, 경매에 내놔도 괜찮은 거죠?”

“대어를 낚으려면 좋은 미끼를 걸어야지.”

리무진이 노을 지는 성에 가까워졌다.

을씨년스러운 성 앞.

벌써 고급 차량과 전통적인 마차가 진을 치고 있었다.

연회라도 열린 듯. 성으로 향하는 손님은 하나같이 드레스와 턱시도 차림이었다.

공통점은 모두들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살기가 엄청나요.”

이비현이 속삭였다.

“손님들도 그렇고, 경호원들도 한 가닥씩 하는군.”

입구의 경비가 삼엄했다.

그들은 무명의 노인이 준 가짜 신분 증표로 성문을 통과했다.

‘VVIP 신분을 준다고 했지.’

한건우의 신분 증표를 보고, 경비원이 놀라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스으-

성문을 지나자, 미세한 마력 경계가 느껴졌다.

이 안쪽에서는 아무도 아공간을 쓸 수 없다고 했다.

시험삼아 아공간 주머니를 불러내려 했지만, 손은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생각보다 성이 작네요.”

“경매장은 이쪽이야.”

한건우가 지하로 향하는 비좁은 계단을 가리켰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 문을 열자, 이비현이 탄성을 질렀다.

“와···.”

바깥의 소박한 성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빛나는 샹들리에가 매달린 널찍한 공간이 나왔다.

마치 상류층의 비밀 파티에라도 온 듯.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들리고, 백여 명의 손님들이 가면을 쓴 채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건우의 날카로운 시선이 연회장을 훑었다.

‘큰 통로가 하나, 직원용 작은 통로는 여럿.’

손님들 중 반 이상은 각성자의 기운이 풍겼다.

“꼭 오페라 극장 같아요.”

이비현의 말대로였다.

지하 연회장 가운데에는 공연을 올려도 될 만한 큰 무대가 보였다.

사람들이 술잔을 들고 무대 주위를 거닐고 있었다.

“손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경호원의 안내를 따라가자, 귀빈을 위한 자리가 있었다. 무대 양옆의 날개처럼 된 높은 발코니였다.

무대는 물론이고, 손님들의 움직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발코니 좌석에 앉은 이비현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물었다.

“그쪽에서 정말 나타날까요?”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나 그 심복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번 일은 허탕이었다.

한건우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백작부인도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테니,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그렇군요. 혹시··· 제 어머니가 오실까요?”

한건우도 내심 그걸 바라고 있었다.

어차피 드 라모트 백작부인을 공격하기 전에 이비현의 어머니를 미리 빼낼 수 있다면 가장 좋을 테니까.

“그래 준다면 좋을텐데. 꼭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지. 다른 부하들이 온다면 그들을 붙잡아서 제압한 후 라모트 고성 내부에 관한 정보를 얻어야 할 것 같아.”

라모트 고성은 수도 부쿠레슈티 인근의 버려진 성이었다. 위치는 알아냈지만, 모든 게 수수께끼인 상태였다.

백작부인은 무칸이나 마리아 베르타와는 다르니.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만일 이번에 어머니를 만난다면··· 제가 엄마의 딸이라는 걸 알려줄 기회가 있을까요.”

“혈족이 된 상태에서 과거의 기억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부딪혀 보면 알겠지.”

그들이 있는 발코니 좌석으로 <노네임>의 길드원이 들어왔다. 지난번 바에서 본 바텐더였다.

“경매에 올릴 물건을 제출해 주십시오.”

원래 경매에 올리는 물건은 며칠 전에 경매소로 넘겨서 감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경매를 주관하는 노네임 길드에서 특권을 주어, 경매 직전까지 한건우가 보관하고 있었다.

물론 경매 의뢰인은 한건우도 이비현도 아니었다.

존재하지 않는 제3의 신분으로 되어 있었다.

석판을 받으며 부하가 물었다.

“경매 시작 가격은 어떻게 할까요? 특별히 원하시는 가격이 있다면 그 가격부터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건우는 원하는 시작가를 말했다.

부하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추가 질문 없이 석판을 받아 돌아갔다.

“너무 비싸서 아무도 안 사는 건 아니겠죠?”

“백작부인 쪽 사람이 온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석판을 가져가려고 할 거야.”

그 사이, 사회자가 무대로 올라왔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경매가 시작되었다.

“첫번째 아이템입니다! 아이템 장인이 제작한 마석 고글입니다. 열과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물건으로··· 시작가는 1만 5천 유로입니다. 아, 벌써 시작가의 10% 높여 응찰이 들어오셨습니다!”

유럽에서 제일 규모가 큰 지하 경매라는 명성답게, 여러 희귀한 물건이 올라왔다. 아직 초반이라 그런지 한건우의 관심을 끌 만한 아이템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자, 다음으로···.”

화악!

아이템을 가린 흰 천을 걷고서, 사회자가 당황했다.

“흐음, 이건 독특하군요.”

평범해 보이는 검고 네모난 석판이었다.

아무런 기능 설명도 없었고, 심지어 아이템 이름조차 확인 못하도록 유리상자 안에 들어있었다.

“아이템 이름은 ‘noname’. 무명의 석판입니다. 기능은 낙찰받으신 후에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방식도 재미있지 않습니까? 경매 시작 가격은··· 엇.”

큐시트를 본 사회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000만 유로. 1000만 유로 계십니까?”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 석판이 무슨 아이템인지는 몰라도, 전투에 쓸 수 있는 장비는 아닌 게 분명했다.

애초에 비전투용 아이템은 비싼 가격에 팔리기 어려웠다.

심지어 기능 확인도 안 하고, 한화로 100억이 넘는 돈을 태운다니.

“저게 정말 아이템이긴 한가?”

“그냥 쓸모없는 돌판이면 어쩌나. 마석 한 덩이 가치밖에 못하는 것 아냐?”

참석자들의 볼멘 소리가 들렸다.

온갖 미사여구로 경매 분위기를 북돋아 온 경험 많은 사회자도 딱히 할 말이 없는 상황.

장내를 둘러보던 사회자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발코니 위에서 1100만 유로 나오셨습니다!”

“?”

당연히 한건우는 아니었고, 정반대 쪽 VVIP 발코니였다.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응찰 표지를 들고 있었다.

한건우도 손을 번쩍 들었다.

“반대쪽 발코니, 1200만 유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우왕좌왕했다.

저 석판에 무언가 있는 거냐는 분위기였다.

“처··· 천이백일만 유로!”

아래쪽에서 용감하게 응찰에 참여하는 대부호도 있었다.

“오오!”

“쯧, 어리석기는. 전형적인 수법에 넘어갔군!”

두 명의 VVIP가 짜고 사기를 친 게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심도 잠시.

“...2000만 유로 나왔습니다.”

“허억!”

한건우가 2000만을 부르자, 사람들이 헛숨을 삼켰다.

사회자의 목소리에도 긴장이 묻어났다.

“2000만, 2000만, 더 이상 응찰자가 없으면 마감을···.”

상대편 발코니에 앉은 여자가 다시 표지를 들었다.

“1억... 유로··· 나왔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이템 낙찰 되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