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루마니아 (1) - 무명의 노인
“으음.”
“아셨죠?”
한건우는 곤란한 표정으로 이비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처럼, 이비현을 놓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국내에서 조직을 좀 추슬러야 하지 않겠어?”
한건우의 완곡한 말을 듣고, 이비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말도 안 되죠!”
이비현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최근 멕시코 작전을 염두에 둔 것 같았다.
이비현을 놔두고 갔는데, 생각보다 위험한 작전이었다고 하니까.
“무엇보다 이건 제 일이에요. 원래 저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고, 건우 씨는 도와주신 건데. 어떻게 저 대신 건우 씨를 보내고 편히 쉬겠어요?”
“그렇게 생각할 건 없어.”
“왜요?”
“드 라모트 백작부인은 내 목표물 중 하나야. 이번 일이 아니었어도 공격했을 거야.”
“하지만 건우 씨.”
“게다가 드 라모트 백작부인은 너를 노리고 있다잖아. 굳이 적의 소굴로 알아서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아까 마지막 남은 권속을 심문하면서 들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직접, 이비현을 산 채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고.
그 자세한 이유는 권속들도 몰랐다.
이비현의 어머니, 호연에 대해서도 재차 물어봤지만.
권속은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호연이라는 이름은 모르지만, 자신들은 그녀를 ‘바로네즈’라고 불렀다고.
그녀는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혈족이자, 자신들보다 상위의 존재라고 했다.
호연에게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그리고 호연의 딸인 이비현을 노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새삼 그런 걱정을 하시나요. 저는 늘 그런 식으로 싸워 왔는걸요.”
“....”
“이번에는 꼭 제가 가야 해요.”
물러나려는 기색이 안 보였다.
더 권해도 설득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억지로 한국에 눌러 앉히면 따르기야 하겠지만.’
한건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었다.
“좋아. 그러면 대책도 세워 놓자.”
“대책이요?”
“일단 너희 부하들부터 구하고 나서.”
“그건 나오면서 미리 손을 써놨죠.”
다시 얼음이 녹듯이, 이비현의 표정이 풀렸다.
*
솜브라의 조직원들은 이비현의 지령에 따라 한 장소를 덮쳤다.
바로 권속들이 쓰던 은신처였다.
부촌 단독주택의 어두운 지하실 안.
이비현의 부하들 셋은 산 채로 발견되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부하들은 거의 죽기 직전까지 피가 빨려 빈사 상태였으니까.
- 뱀파이어에게 납치됐습니다···. 아니, 뱀파이어인데 사람이었습니다.
구조된 부하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고, 보고가 올라왔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모두 함구하도록 하세요.”
“!”
이비현이 엄격한 함구령을 내리자, 도열한 부하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사건을 묻겠다는 건가?’
뜻밖이라는 반응이었다.
“우리 조직원 한 명이 죽었고, 세 명이 고초를 겪었습니다. 모두 제 가족처럼 여기는 이들이죠.”
“...그런데 어째서 함구령을 내리십니까?”
부관이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복수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피의 값을 치르게 해야죠.”
“아아···.”
조직원들이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비현이 복수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경우는 딱 정해져 있었다.
바로 솜브라의 조직원이 죽거나 다쳤을 때였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 복수가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복수의 반쯤은 이미 이루었지만.’
4명의 권속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하급자에 대한 복수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진짜 배후는 따로 있었으니까.
‘드 라모트 백작부인.’
감히 이비현의 부하들을 건드린 죗값을 치르게 하고, 억울하게 동유럽 땅으로 보내진 어머니를 되찾겠다고.
이비현은 결심했다.
그리고 한건우가 당부한 일도 잊지 않았다.
“한동안 혼자 움직이겠어요. 블랙 마켓에서 시체가 나왔으니, 거기부터 이번에 발견된 은신처 주위를 샅샅이 살펴봐야겠어요.”
“알겠습니다.”
이비현은 동유럽에 갈 예정이지만, 일부러 대외적으로는 거짓된 행적을 흘렸다.
어차피 그녀가 작정하고 은신하면 아무도 그녀를 추적할 수 없으니.
- 너를 납치하지도 못했고, 권속들이 실종되었으니. 그쪽에서 또 다른 권속을 보낼 가능성이 커.
한건우의 말이 맞았다.
지금 한건우와 이비현은 남몰래 움직여야 했다.
그러려면 둘 다 한국에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게 현명했다.
다음날 오전, 성남군사공항에 한건우와 이비현이 나타났다.
“길드원들에게는 뭐라고 말하셨어요?”
“홍대 미공략 균열에서 수련을 하겠다고 했지. 좀 오랫동안.”
원래도 미공략 균열에 며칠씩 들어가서 드래곤과 훈련을 하곤 했으니.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공항을 담당하는 소장이 다가와 깍듯하게 경례를 했다.
만주 원정 이후에, 군인들이 한건우를 이렇게 베테랑 취급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건우는 까딱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직접 부탁하셨습니다. 필요한 모든 편의를 봐 드리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명령이 없더라도, 군인이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한건우 각성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소장이 대답했다.
한건우가 대통령에게 부탁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 가려는 국가에는 직통으로 연결된 포털이 없었다.
군사공항을 통해 이동하면 행적을 지울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른 부탁하실 일이 있습니까?”
“네, 지금 멕시코시티에 몇몇 각성자들과 권석진 대장이 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전언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누구에게 보내도록 할까요?”
대륙 간 전신이 끊겨 소식이 쉽게 전해지지 않는 지금.
멕시코에 있던 위성전화마저 고장 나면서 멕시코 현지와는 전화 연락이 끊겼고, 무선통신으로 연락하는 실정이었다.
한건우가 간단한 메시지를 써서 소장에게 건넸다.
“박이경 각성자에게 보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비행기에 타시지요. 곧 출발하겠습니다.”
군항기가 이륙을 시작하고 한건우와 이비현은 좌석에 앉았다.
“이게 군항기군요. 뭔가 익숙해 보여요, 건우 씨.”
“얼마 전 멕시코에 다녀와서 그런가.”
이비현의 말에 한건우는 다시 과거가 생각났다.
군용기를 타고 여러 작전에 투입되었던 때.
그중에는 현재 가려는 곳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와 인연이 많군.’
하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었다.
지금은 모든 작전을 자신이 결정한다는 점이었다.
*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
한건우와 이비현은 시내로 들어와 조용한 호텔을 잡았다.
장비를 정비하면서, 한건우가 물었다.
“아직 솜브라 지부의 영향력이 이쪽에까지 미치진 못하지?”
“네, 아직 제 역량이 부족해서···.”
“탓하려고 얘기한 게 아니야. 오히려 잘 됐어.”
한건우가 이렇게 쉽게 접근할 줄은 상상도 못 할 테니까.
이비현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놈들도 너를 꾀어내기 위해 함정을 팠으니, 우리도 그래야겠지.”
둘은 호텔 밖으로 나와 유흥가가 몰려 있는 지역으로 향했다.
유흥가 한복판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
제법 역사가 깊은 듯 낡고 고풍스러운 술집이 있었다.
끼익-
둘이 문을 열고 술집으로 들어가자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망토와 후드로 얼굴을 가렸지만, 동양인의 눈매를 알아본 것이다.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시끄러운 대화를 이어갔다.
똑똑.
한건우는 바 테이블을 두드려서 바텐더를 불렀다.
“좋은 위스키 온더락으로 한 잔, 이 여성분에게는 블러디 메리 칵테일 한 잔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아시아인을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허니문인가요? 아니면 사랑의 도피?”
바텐더가 능글거리는 태도로 묻자, 한건우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겸사겸사죠. 알아볼 게 있어서요.”
바텐더가 주문한 술을 내오자, 한건우가 먼저 물었다.
“밤의 가면무도회가 그렇게 아름답다던데. 저도 가볼 수 있습니까?”
그 순간.
장난기 있던 바텐더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주변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취객들 역시, 언제 취했냐는 듯이 매서운 눈길로 살기를 풍겼다.
금방이라도 한건우와 이비현에게 덤벼들려는 듯했다.
한건우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여기 싸우러 온 것은 아니다. 당신들이 내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만.”
[특성 발동 : 그래비티 필드]
채애앵!
그들이 품에 숨기고 있던 비수와 단도가 바닥에 먼저 떨어졌다.
“끄윽!”
“어어억!”
터엉!
사람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중력 특성으로 주위 사람들을 모두 속박한 것이다.
“이, 이 정도의 힘이라니···. 원하는 게 뭡니까?”
바텐더의 눈에 공포가 담겼다.
“다시 말하지. 당신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한건우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부쿠레슈티의 밤거리에서 사람이 실종되는 사건이 오래되었겠지. 다른 나라보다 열 배 이상 많을 거야.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
“....”
바텐더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당신이 결정하기 힘든 문제라면 더 높은 사람을 데리고 와도 돼. 난 이 호텔 303호에 머무르고 있으니, 연락을 기다리지.”
한건우는 호텔 명함을 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서서히 <그래비티 필드>를 풀자, 주위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 가자.”
한건우는 이비현을 데리고 술집을 나왔다.
이비현이 술집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긴 대체··· 그리고 이런 곳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죠?”
술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전투 각성자인데다, 하나의 조직에 속한 이들인 듯했다.
“이곳은 한국만큼 안전한 곳이 아니야. 밤에 저렇게 모인다는 것은 믿는 것이 있다는 얘기지. 아마도 정보조직과 연관된 술집일 거야. 특히 그 바텐더는 상당히 강했어. B급은 넘을 것 같더군.”
한건우는 그 정도로 둘러댔다.
회귀 전에 알았다고 할 수도 없고, 루마니아 쪽에 다른 정보원이 없다는 건 이비현도 잘 알고 있으니까.
“저들이 저희의 얘기에 응할까요?”
“둘 중 하나지. 만약 백작부인과 한패라면 우리를 습격할 것이고, 대립하는 관계라면 무조건 내 도움이 필요할 거야.”
“그러면···.”
“우린 호텔로 가서 쉬자고.”
한건우는 먼저 호텔 쪽으로 향했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강심장이야?’
이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호텔로 돌아갔다.
두 개의 침대가 있는 방.
이비현은 침대에 걸터앉아 밤을 꼴딱 새웠지만, 한건우는 숙면을 취한 것 같았다.
아침이 되자 호텔 방의 전화가 울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손님. 조식 룸서비스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언제 보내드릴까요?]
“8시까지 보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정확히 8시 정각이 되자,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룸서비스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흰 유니폼을 정갈하게 입은 노인이 트레이에 음식을 담아서 왔다.
노인이 테이블에 음식을 차리고서 고개를 숙였다.
“컨티넨탈식 조식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그래요, 저희의 제안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노인이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 동네는 A급 각성자가 호텔 룸서비스를 해주나보죠?”
“대단하군요. 나름대로 기운을 갈무리하는 것엔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이 늙은이를 부끄럽게 하는군요.”
노인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니 옆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다시 내 소개를 하겠네. 나는 루마니아의 밤의 세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네. 이름은 없으니 편할 대로 불러도 되고, 사람들은 날 ‘노네임’이라고 부르지.”
“노네임이라.”
“우리 부쿠레슈티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그렇습니다.”
무명의 노인은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네가 강한 각성자인 것은 알겠으나, 아무것도 모르고 호언장담을 한 것은 아니리라 믿고 싶군. 우리의 투쟁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서 말이야.”
“드 라모트 백작부인을 아시죠?”
무명의 노인이 놀란 표정으로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없애고 싶은 것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