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미래의 기억 (12) - 무덤 주인이 죽으면
“10분도 안 걸렸군.”
한건우가 시간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특성 발동 : 부패의 시간]
스스스스···.
권속 4명의 시체는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곧 말라 부스러진 뼛가루가 공동 속에 날렸다.
그들이 세상에 존재했던 흔적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저들이 자초한 일이지.’
균열 안은 무법지대.
바로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 정부는 균열 출입을 관리하고 통제했다.
현재 한건우는 물론이고, 4명의 권속들도 균열에 몰래 잠입했으니.
공식적으로 이 균열에 출입한 사람은 이비현뿐이었다.
정부 구조대 덕분에 깔끔한 완전범죄가 완성된 셈이었다.
“정말 감사해요. 부하들이 죽었다는 말, 순순히 믿어버릴 뻔했거든요.”
“그러게. 살려두었다니 다행이야.”
실종된 부하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이비현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그때, 공동으로 통하는 바깥.
무수한 소음이 들려왔다.
투둑. 뚜두두둑.
덜그럭.
“아 참, 진짜 언데드가 있었죠.”
프리즘으로 만든 빛의 마법진이 공동 주변에 퍼질 때.
주변에 기웃거리던 스켈레톤은 함께 타 죽었다.
그러나 균열 안에는 여전히 스켈레톤 부대가 많았다.
이곳이 아직 공략되지 않은 균열 안이라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이비현이 그림 리퍼의 사슬낫을 고쳐 잡으며 알림창을 확인했다.
[D급 균열 - 고대 노예상의 카타콤]
- 공략 조건 : 카타콤 안의 스켈레톤을 모두 파괴한다
- 잔여 시간 : 23시간 10분 31초
“잠깐.”
“네?”
한건우가 이비현을 막았다.
“이런 데다 미스릴 코팅은 안 쓰는 게 좋겠어.”
미스릴 코팅은 일시적인 효과뿐, 벗겨지고 나면 끝이었다.
비용 문제가 아니었다.
아레스 길드의 예산, 그리고 한건우의 개인 재산만 해도 돈 걱정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진은이라 불리는 미스릴은 대단히 희귀해서,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손에 꼽지만.
그것보다 공급이 훨씬 적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 측과의 일전이 예상되는 지금.
D급 균열의 스켈레톤 따위에게 미스릴 코팅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기다렸다가 공동 안으로 유인해서 빛의 마법진을 쓸까요?”
“그것도 좋지만, 공략 조건이 문제야.”
“<카타콤 안의 스켈레톤을 모두 파괴한다>. 그게 왜요?”
“이 균열, 생각보다 훨씬 넓어. 거의 작은 지하도시 수준이야. 구조도 개미집처럼 복잡한 미로로 되어있고.”
어느새 그렇게 균열을 자세히 둘러보았는지.
이비현은 감탄하면서도, 표정이 심각해졌다.
“스켈레톤을 하나라도 놓치면, 균열이 닫히지 않을 텐데요?”
“바로 그거야.”
굽이굽이 뻗은 어두운 지하 동굴 속.
단 한 마리의 스켈레톤만 숨어있어도, 균열은 공략되지 않는 것이다.
스켈레톤이 언데드치고는 약하다고 해도.
균열 공략 시간으로 최소한 일주일은 주어져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균열 공략 시간으로 24시간 정도밖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극악의 난이도에, 이비현이 황당해했다.
“아니, 말이 안 되는데요. 고작 D급 균열인데···.”
“등급과 안 맞긴 하지.”
“균열을 빠르게 돌아다니면서 프리즘으로 빛의 마법진을 넓게 펼쳐볼까요? 그 방법뿐인 것 같은데.”
하지만 한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 보니, 빛의 마법진은 균열의 벽을 통과하지는 못하더라. 그런 식으로는 무리야.”
“하긴···.”
이비현은 자신이 타고 온 길을 떠올렸다.
넓은 공동 쪽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대로처럼 넓었지만, 좌우에 좁은 방과 틈새가 많았다.
분명히 몇 마리라도 놓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여긴 D급 균열이야. 중간 정도의 각성자도 옳은 방향으로 노력하면 깰 수 있다는 거지.”
“그렇기야 하죠.”
“무언가 힌트가 숨어있을 거야.”
한건우는 공동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카타콤, 거대한 지하 무덤···.’
여기까지 오는 카타콤의 통로.
바깥의 벽에는 수도 없이 구멍이 뚫려 있었다.
스켈레톤이 누워있었을 법한, 관이 들어가는 크기의 구멍이었다.
그와 달리, 이 거대한 공동 안의 벽은 매끈했다.
덜그럭, 덜그럭.
스켈레톤이 뼈마디를 부딪치며 행진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차르르르···.
다리 한쪽에 매어진 사슬을 끌면서 오는 놈들도 있었다.
“아하.”
“왜요?”
이비현이 그림 리퍼의 사슬낫을 들고 한건우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뭐라도 해야 할 때였다.
“이 커다란 공간, 정체가 뭔가 했더니.”
“여기 말인가요? 꼭 균열의 주인이 나올 것처럼 보이는 공간인데.”
이비현이 주위를 둘러 살폈다.
“맞아.”
“하지만 이 균열에는 주인이 따로 없는 것 같아요. 공략 조건에도 언급이 없고, 여기까지 왔는데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그래, <고대 노예상의 카타콤>. 균열 이름에 힌트가 숨어있었군.”
“네?”
이비현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했다.
뚜벅 ,뚜벅.
한건우는 거대한 공동의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울퉁불퉁한 동굴 바닥 중에서, 그쪽에만 이질적인 부분이 있었다.
유난히 매끈하고 네모진 부분이 보이는 것이었다.
마치 직사각형의 커다란 바닥 타일이 박혀있는 것처럼.
한건우는 네모진 타일처럼 된 곳 위에 섰다.
그가 창을 거꾸로 잡아서, 날 끝이 아래를 향하게 했다.
쉬익- 번쩍!
번개가 내려치듯이, 한건우가 바닥을 내리찍었다.
맨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전광석화 같은 일격이었다.
쿠르릉- 콰직.
한건우가 내리친 네모진 바닥 부분이 쩍 갈라졌다.
“앗!”
이비현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파스스스···.
바닥이 네모진 모양으로 뻥 뚫리며 무너져 내렸다.
아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숨겨진 공간이 드러난 것뿐이었다.
“거긴 대체···?”
처억!
바닥에 숨겨진 공간에서, 흰 뼈마디만 남은 손이 올라왔다.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주렁주렁 유색의 보석 반지가 몇 겹씩 끼어있었다.
척!
다른 쪽 해골 손도 올라왔다.
이쪽 손은 숫제 황금과 백금으로 뒤덮여 있었다.
스으으-
두개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해골의 이마에는 색색의 마정석 왕관이 얹혀 있었다.
삐걱대는 목뼈에는 보석 목걸이가 몇 겹이나 둘러진 채였다.
캬아아-
스켈레톤이 턱뼈를 열었다.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마수의 목소리를 듣고, 한건우가 대답했다.
“이 카타콤에 있는 전투 노예들의 주인.”
이비현은 그제야 새로 나타난 화려한 스켈레톤의 정체를 깨달았다.
[알면서도 내 잠을 방해했다고?]
노예상 역시 한 마리의 스켈레톤에 불과했다.
바깥에 있는 노예 스켈레톤들과 달리, 온몸이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는 차이는 있었다.
희귀한 보석을 주렁주렁 걸친 스켈레톤을 보고, 한건우는 혀를 찼다.
“뼈만 남아서 무슨 탐욕이 이리 많은지.”
한때 고운 색을 뽐냈을 비단옷은 마른 지푸라기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나의 영면을 지키는 전투 노예들이여! 적들을 물리쳐라!]
촥!
노예상 스켈레톤이 뼈만 남은 손가락을 쫙 펼쳤다.
노예에게 낙인을 찍는 인장이 달린 반지가 수상하게 번뜩였다.
캬아악!
타다다닥!
바깥에 있던 스켈레톤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달려왔다.
쉬이잉!
한건우의 창이 번뜩였다.
창의 궤적은 정확하게 노린 대로 뻗어 나갔다.
[감히-]
파아앗-
창날이 노예상 스켈레톤의 머리뼈를 갈랐다.
그 손가락뼈에 끼워진 낙인 반지까지도.
터억- 치이이이-
노예상 스켈레톤의 머리가 깔끔하게 반토막 났다.
미스릴 코팅이 된 창날이 훑고 지나간 곳에서 푸른 연기가 솟았다.
낙인 반지가 파괴되자, 뛰어오던 스켈레톤들이 동시에 멈춰섰다.
캬아아악-
뎅그렁-
스켈레톤들은 손에 쥔 무기를 떨어뜨리고, 눈에 띄게 비틀거렸다.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저러죠?”
그리고서 펼쳐지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드드드···.
털그럭!
터그르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스켈레톤 전부가 일제히 힘을 잃었다.
그들의 몸을 이루는 뼈마디가 조각조각 떨어지며 무너져내렸다.
“하···.”
공동 안은 허옇게 쌓인 뼈 무덤으로 가득했다.
“이제 됐어.”
한건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이비현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기감을 한껏 세워 사방을 살폈지만, 숨 막히는 어둠과 고요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D급 균열 - 고대 노예상의 카타콤, 공략 완료]
“세상에, 거기 균열의 주인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이비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예상 스켈레톤이 누워있던 비밀 공간으로 다가갔다.
한건우는 이미 노예상 스켈레톤이 끼고 있던 아이템을 파밍하는 중이었다.
“여기만 벽에 시체 들어가는 구멍이 없잖아.”
“그게 왜요?”
“이 공간 전체가 한 놈의 무덤 구멍이라는 소리지. 그놈이 균열의 주인일 가능성이 클 테고.”
“아하!”
한건우는 창을 어깨에 걸치고 돌아섰다.
“서둘러야겠다. 가끔 그러잖아?”
“뭐가요?”
“무덤의 주인이 죽으면, 무덤이 무너지는 거.”
아니나 다를까.
쿠르르···
푸스스스.
천장에서 돌먼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하···.”
급박한 상황이건만.
이비현의 얼굴에는 어쩐지 미소가 떠올랐다.
한건우와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있는 확신이 들었다.
*
“이비현 님, 정말 감사합니다!”
균열 입구를 지키고 있던 구조대원들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균열이 공략될 때까지 계속 바깥을 지키고, 분위기를 봐서 심상치 않으면 재빨리 상부에 보고해서 대책을 마련하는 게 정부 구조대의 역할이었다.
‘혼자서 바람처럼 나타나서, 순식간에 균열을 닫아버리다니!’
구조대는 이비현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대원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있었다.
우호적인 분위기 속.
아까 섣불리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막내 대원은, 이비현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멋쩍은 얼굴로 멀리서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놈아. 하고 싶은 말 있잖아. 이리 와.”
“아, 선임님! 아니라니까요.”
이비현이 그쪽에 눈길을 주자, 막내 대원이 흠칫 놀랐다.
막내 대원이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사과했다.
“이, 이비현 님. 아까는 실례 많았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
이비현이 새침한 얼굴로 말을 끊었다.
“아닙니다. 전 이만.”
그녀가 조용히 묵례를 하고, 올 때와 똑같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휴우.”
막내 대원은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숙였다.
선임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인마, 잘했어. 앞으로는 유명한 각성자는 얼굴 잘 외워두고.”
“전 진짜 몰랐어요. 그리고 저, 기관에서 교육받을 때는 미등록자는 사람 취급도 하지 말라고 배웠다구요.”
“거 강사가 누구야? 이러니까 요즘 나오는 신참들이 더 모르지.”
“그건 옛날 고릿적 얘기야. 요새 현장에서는 미등록자도 이렇게 활약하잖아. 오히려 웬만한 등록 각성자보다 나을 때도 많다고.”
“우리는 땡큐지. 대통령령이 개정되면서, 단순한 미등록 각성자는 체포할 필요도 없고 권고만 하면 되니까.”
선임들이 한 마디씩 거들자, 막내 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대단하긴 대단하네요. 아무리 D급 균열이라도 혼자서 뚝딱 해결하다니.”
“놀랄 만한 일인데. 우린 한건우 플레이어 때문에 눈이 많이 높아졌다니까. 하하.”
한편, 인적이 드문 골목 안.
이비현이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 민망해 죽는 줄 알았어요.”
스으으-
이비현의 등 뒤. 한건우가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났다.
“뭐가?”
“제가 한 일도 아닌데 구조대한테 감사를 받으려니까.”
한건우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황급히 자리를 뜬 거야?”
이비현은 생각만 해도 어색해서 닭살이 돋는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저, 건우 씨.”
“응?”
“라모트 성이요. 지금 혼자서 가려고 생각하고 계셨죠?”
이비현은 결연한 표정으로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
“절대 안 돼요. 이번에는 무조건 같이 가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