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미래의 기억 (10) - 고대 노예상의 카타콤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한건우는 조용히 적절한 때를 기다렸다.
*
각성자 전문 방송국 PBS의 편집국 사무실.
문철민 기자가 골방에 있는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직 안 떴습니까? 바로 알려주시는 것 아시죠?]
“아무렴요. 어려운 부탁도 아니신데요.”
수화기 너머의 한건우가 재차 부탁해 왔다.
한건우와 통화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PBS의 문철민 기자.
서로 워낙 바쁜 사람들이니 직접 만나기는 어려웠다.
가끔 통화로 소식만 나누곤 했다.
여전히 문철민 기자는 최고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한건우 플레이어와 직통 라인이 있는 유일한 언론인! 국내 유일, 아니 세계 유일!’
한건우의 영역이 넓게 뻗어나갈수록, 문철민 기자는 마치 자기가 성공한 것처럼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아니, 실제로 같이 성공하기도 했다.
‘같이 입사한 놈들 상당수는 각성자 열애 파파라치 기사나 받아쓰고 있는데 말이지.’
둘의 관계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계속될 수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먼저 당연히 한건우가 잘 나가기 때문.
기자 입장에서 한건우는 무척 가치 있는 인맥이었다.
두 번째 이유가 더 중요했다.
문철민 기자가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문철민 기자는 한건우가 비밀로 해달라는 건 끝까지 사수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별 일이냐고 하겠지만.
기자들은 알 것이다. 그 유혹을 이겨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서는 안되지, 암!’
문철민 기자는 오늘도 굳게 다짐하며 자료와 컴퓨터 화면을 번갈아 살폈다.
“어디 보자···. 제가 보기엔 오늘, 이 다음에 하나 터집니다.”
[그렇습니까?]
문철민 기자가 보고 있는 건 PBS의 내부 자료사이트였다.
거기에는 최근 전국에 터진 균열이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PBS는 AI를 이용한 자체 균열 예측 시스템을 개발했는데, 이건 외부에 공개되는 자료는 아니었다.
이제까지 전 세계에 나타난 균열 양상을 통째로 학습시키고, 다음 균열이 발생할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균열의 등급과 성질까지 예측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듣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아마 정부나 다른 기관에서도 비슷한 거 돌리고 있겠지만··· 형편없이 부정확하지!’
이 시스템의 정확도는 섣불리 계산하기조차 두려울 정도.
이것만 믿었다간 패가망신, 아니 망국을 면치 못하리라.
PBS의 기자들은 이 시스템을 쓰레기라고 욕하면서 멀리했다.
그러나 문철민은 조금 달랐다.
‘균열이 나타나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등급 예측은 엉망이지만···. 바로 다음에 나타날 균열의 성질 예측은 얼추 맞아들어. 한 80% 이상?’
거기다가 각성자 전문 기자로서의 경험에서 온 추정치까지 덧붙이면, 성질 예측만큼은 거의 100%에 가깝다고.
문철민 기자는 자신했다.
한건우가 부탁한 게 마침 그거였다.
시간, 장소, 등급.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다 틀려도 상관 없다며.
한건우는 오직 다음 균열의 성질만 예측해주면 된다고 했다.
‘등급 무관이라니··· 과연 엄청난 자신감이야.’
문철민은 혀를 내둘렀다.
역대 최강의 플레이어, 한건우다웠다.
호사가들은 태일제가 좀 더 젊은 시절에 만났다면 둘이 막상막하였을 거라고 떠들곤 했다.
과거의 최강자였던 노인과 떠오르는 초신성을 비교하는 게 무척 재미있는 모양이다.
‘모르는 소리. 언제의 태일제를 갖다 붙여도, 한건우 플레이어에게 비교가 안돼.’
문철민 기자가 딴 생각에 빠졌을 무렵.
띠링-
기자의 업무용 휴대전화가 울렸다.
균열 알림이었다.
길드나 일반 각성자는 지역이나 거리 등을 고려해서 알림이 선별적으로 가지만, 언론사는 가장 먼저 전국의 균열 알림을 받을 수 있었다.
균열 정보를 살펴본 문철민 기자가 환호했다.
“떴습니다! 지역은 동대문구 창신동이구요.”
[마침 가깝군요.]
“등급은 D등급입니다. 저, 한건우 플레이어가 직접 가시려고 하는 겁니까?”
문철민 기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협조 감사합니다. 오프 더 레코드고요. 끝나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한건우는 건조한 어투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프 더 레코드라면 이와 관련해서는 작은 기사 하나도 못 쓴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문철민 기자는 쾌재를 불렀다.
“야호!”
끝나고 연락 드리겠다니.
‘뭔가 싱싱한 단독 소재를 던져주겠다는 말이니까!’
문철민 기자는 콧노래를 부르며 소식을 기다렸다.
*
동대문구 창신동.
허공을 찢고 생겨난 균열 입구 앞에, 이비현이 홀로 서 있었다.
[D급 균열 - 고대 노예상의 카타콤]
- 공략 조건 : 카타콤 안의 스켈레톤을 모두 파괴한다
- 잔여 시간 : 23시간 56분 3초
다름아닌 언데드 균열.
한건우와 이비현이 기다리던 균열이었다.
끼이익!
구조대 승합차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원래 그들은 가장 먼저 도착해서 입구를 지키고 주변을 대피시키는 역할이었다.
이비현이 먼저 균열 앞에 우뚝 서 있자, 선임 대원들이 머쓱한 표정을 주고받았다.
멋 모르는 막내 순경이 외쳤다.
“거기 여자분! 피하셔야죠!”
구조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정의감이 투철한 신임이었다.
어리고 예쁘장한 여자가 보이자 더욱 열정이 샘솟은 모양이었다.
“어이쿠, 막내야.”
“예?”
이비현을 덮칠 듯 달려가던 막내 대원이 엉거주춤 멈춰섰다.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처음이라.”
“괜찮아요.”
슈우우-
이비현은 심드렁하게 대답하면서 균열로 들어갔다.
“아니, 저 아가씨가 누구인데 그러시는 거죠?”
막내 대원이 눈을 크게 뜨고 선배에게 물어보았다.
“랭킹 1위 한건우의 여자친구잖아. 미등록자라서 랭킹은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각성자일 걸.”
“네? 이럴 수가.”
막내 대원이 눈을 비비면서 이비현이 사라진 균열 입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언데드 균열 공략이라니. 꽤 강심장이네요.”
아무리 D급 균열이라지만.
어둡고 으스스한 언데드 균열에 아무렇지 않게 훌쩍 들어가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만 놀라고, 할 일이나 하자.”
“예에···.”
출동한 구조대가 다른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고 출입금지 구역을 설정하는 동안.
균열 주변에서 그림자들이 일렁이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구조대원들의 머리 위로 네 개의 그림자가 날아 들어갔다.
*
균열에 들어온 이비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대 노예상의 카타콤> 균열.
빛이 한 줄기도 없는 어두운 동굴이었다.
‘예상대로야.’
그녀는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는 스태프를 한 손에 들었다.
오래된 동굴처럼 보이는 벽에는 관이 들어갈 만한 홈이 빽빽하게 차 있었고, 기둥은 허연 해골로 이루어져 오싹한 분위기를 풍겼다.
‘건우 씨도 잘 들어왔겠지?’
한건우가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그의 움직임을 눈치챌 수 없었다. 일단 한건우를 믿고 전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비현이 동굴을 따라 조금씩 나아갔다.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딱··· 따닥. 뚜두두둑.
덜그럭, 덜그럭.
‘스켈레톤 워리어.’
허연 해골의 실루엣이 어둠 속에 나타났다.
생전에 전투 노예였는지, 목과 팔다리에는 아직도 사슬을 걸 수 있는 납 고리를 걸고 있었다.
그들이 낡은 무기를 들고 다가왔다.
걸어오는 속도는 느렸다.
이비현은 균열 공략 조건을 되새겼다.
‘공략 조건, 카타콤 안의 스켈레톤을 모두 파괴한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스켈레톤을 파괴하기 어려웠다.
일반 무기로 때려 부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뼈가 짜맞춰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쉬이익-
이비현의 환도가 허공을 갈랐다.
일부러 미스릴 코팅을 하지 않고 남겨놓은 무기였다.
차악- 티그르르···.
‘미스릴 코팅이 된 무기를 시험해보고 싶지만.’
진은이라 불리는 미스릴 코팅을 스켈레톤 따위에게 낭비하기는 아까웠다.
게다가 언데드 전용 무기가 있다는 걸 알면, 한건우와 이비현이 기다리는 상대가 접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비현의 관심사는 균열 공략이 아니었다.
이비현은 길을 뚫기 위한 정도로만 스켈레톤을 공격하면서 신속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묵묵히 30분 정도.
전방에 커다란 공동이 보였다.
‘이쯤일까.’
공동 구석, 이비현은 잠시 장비를 점검하고 쉬고 있었다.
그때 이비현의 감각에 무엇인가 걸렸다.
몸을 뒤로 날리자, 이비현이 앉아있던 자리에 단검 2자루가 부르르 떨리며 꽂혀 있었다.
“누구냐!”
“역시···.”
“솜브라의 리더 자리는 거저 얻은 것은 아닌가 보군.”
어두운 동굴 통로 사이로.
남자 4명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창백한 얼굴에 마른 체격, 아무렇게나 걸친 수트를 입은 채였다.
4명 다 인종과 국적이 달라 보였지만.
서늘한 인상은 소름끼칠 만큼 똑같았다.
‘엄마는 없어.’
이비현이 찾던 호연은 없고, 다른 놈들뿐이었다.
이비현은 실망감을 뒤로하고 감각을 끌어올렸다.
극도로 예민해진 이비현의 감각은, 차가운 동굴 속에서 사람의 체온을 잡아낼 정도는 되었다.
‘체온이 안 느껴져.’
인간도 언데드도 아닌, 기묘한 상태였다.
‘건우 씨가 말한, 뱀파이어화된 권속들···.’
이비현이 권속들을 노려보며 스르르 일어났다.
“네놈들이 우리 솜브라의 조직원을 죽였나?”
“그렇다.”
권속들은 자신이 한 행동을 순순히 인정했다.
“감히 그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나? 우리 솜브라가 당한 것의 몇 배로 갚아 주겠어.”
“호오, 무섭군.”
4명의 권속들이 한 사람처럼 기분 나쁘게 웃었다.
“이비현, 바로 너를 만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우리의 주인이 너를 원하신다.”
“너희 주인은 지금 어디 있지? 동유럽의 라모트 성? 그게 어디야?”
“!”
라모트 성을 언급하자, 권속들은 놀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비현이 환도를 고쳐 잡았다.
“괜찮아. 팔다리가 없어도 입만 있으면 대답은 할 수 있겠지.”
이비현이 <그림자 맹시>를 발동하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권속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네가 살아있는 인간인 이상 우리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의 눈에는 피의 흐름이 다 보이니까!”
4명의 권속은 동시에 이비현이 은신하고 있는 위치로 달려들었다.
쉬이잉-
그들의 손에서 단단한 손톱이 길게 뻗어나와, 마치 칼처럼 휘둘러졌다.
캉!
치리링-
이비현의 환도와 적들의 손톱이 맞부딪혔다.
낮은 직위의 권속들일까.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고, 체계적으로 무술을 배운 흔적도 안 보였다.
이비현은 어렵지 않게 그들의 공격을 회피하고, 단숨에 적 중 한명의 뒤로 돌아가 두 다리를 베어버렸다.
처억-
동료의 두 다리가 잘려나가도, 다른 권속들은 놀라지 않았다. 심지어 다리가 잘려 쓰러진 권속조차 덤덤했다.
“흐흐흐··· 어리석은 계집, 우리는 불사신이다. 그런 무기로는 우리를 잡을 수 없다.”
다리가 잘린 권속이 말하는 동안 잘린 다리와 몸통 사이로 끈적한 피가 흘러나왔다. 잘린 다리가 자연스럽게 다시 몸에 붙었다.
“!”
다시 4명의 권속들이 이비현을 둘러쌌다.
“걱정 마라, 죽이진 않을 테니. 다만 신선한 피를 맛보고 싶군.”
이비현은 냉정한 눈빛으로 권속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파앗-
별안간 환한 빛이 공동을 밝히며 모두의 눈을 찔렀다.
“뭐지?”
“저기 위에!”
눈썰미 좋은 권속이 공동의 천장 쪽을 가리켰다.
작고 네모난 유리상자 같은 것이 허공에 떠서 빙그르를 돌아가고 있었다.
‘프리즘.’
이비현은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려 했다.
그러나 곧 본능적으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전에 실험장에서 본 광경은 지금에 비하면 장난이었다.
파아아앗-
빛의 마법진이 어두운 공동을 환히 채웠다.
수천 개의 영롱한 무지개가 사방을 밝히며 떠올랐다.
파아아-
신성하고 순수한 빛의 범람 속에서, 4명의 권속들이 괴로움에 몸을 비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