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미래의 기억 (9) - 마스터의 아이템
“저를 노린 거라구요?”
이비현은 충격을 받았는지 조용히 되뇌었다.
한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해.”
이비현은 서류를 내려놓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게 날 유인하려고 한 거라면··· 분명히 효과는 있었던 셈이야.’
가족 같은 부하들이 넷이나 실종되고 나서.
이비현은 종일 그 생각만 했고,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조직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이비현 개인도 감정적으로 많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블랙마켓에서 임원 한 명의 시체가 발견되고.
그 자리에서 어머니의 모습과 똑같은 여자를 목격했다.
거의 정신 나간 것처럼 그 생각만 했다.
‘타이밍도 절묘했던 것 같아.’
그녀는 어느새 그 일에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연옥경>을 얻겠다며 위험한 균열에 뛰어들기도 했다.
원래 무엇을 찾고자 했는지.
처음의 목적도 희미해진 상태였다.
한건우가 짚어주기 전에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를 뻔했다.
한건우는 이비현이 간과한 사실을 짚었다.
“봐, 처음 발견된 임원의 시체가 왜 하필 블랙마켓 한복판에 놓아져 있었을까? 블랙마켓은 이제 네 구역이잖아.”
“그건··· 솜브라를 공개적으로 도발하려고 한 줄 알았어요.”
“네가 아무런 고민 없이 달려갈 만한 곳이기도 하지.”
“그렇죠.”
이비현은 순순히 인정했다.
실제로도 회의석상에 앉아있다가 한달음에 달려갔다.
“만약 이 상황에서, 다른 실종된 부하들이 나타났거나, 또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하면 어땠을까?”
“아···.”
이비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 장소가 어디든 간에 이비현은 똑같이 한달음에 달려갔을 것이다.
평소라면 조심했을 곳이어도 별다른 대비조차 없이.
“의도적으로 판 함정이라면, 너에 대해 잘 알고 심리전을 하는 걸거야.”
“앗, 그러고보니 하필 건우 씨가 한국에 안 계실 때였어요.”
이비현은 흠칫 놀랐다.
“맞아.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게 되어서 다행이었지.”
“아무래도 건우 씨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이비현은 뭐에 홀린 듯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찬물로 세수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 그러면 한번 시도해봐야겠군.”
“뭘요?”
이비현이 눈을 빛냈다.
그녀 혼자였다면 결론이 보수적으로 나왔을 것이다.
상대의 의중을 모르니 조심하자거나, 상황을 보며 기다리자고.
한건우도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상대를 찾으려 해도 어디에 숨어있는지 모르잖아?”
“네.”
바로 그게 문제였다.
“그러니 이쪽에서 역으로 함정을 파야지.”
“!”
놀란 이비현의 입술이 벌어졌다.
“만일 내 예상대로 적들이 너를 노리고 있는 것이 맞다면, 분명히 빠른 시일 내에 너를 습격할거야.”
“....”
“너를 습격하지 않는다 해도, 거기에 대비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거고.”
낚싯대를 드리우며 이비현을 유인히는 적.
그런 자들을 상대로 함정을 파려는 한건우.
“괜찮을까요?”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게.”
‘나를 지켜준다니.’
한건우의 한 마디가 얼마나 무거운지, 이비현은 잘 알고 있었다.
이비현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남자는 한건우뿐이었다.
이비현을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녀를 두려워했으니까.
친한 부하들조차 그녀에게 경외감을 품고 있었다. 즉,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말은 항상 이비현의 몫이었다.
이비현은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
다음날 아침.
한건우와 이비현은 장영표가 있는 지하 벙커를 찾았다.
“연구는 잘 되어가나?”
벙커 안은 언제 보아도 신기했다.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곳이랄까.
어제와 오늘 연달아 찾아왔는데도, 벙커 안의 기물들은 상당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시커멓게 타고 부서진 부분도 보였다.
장영표가 활기찬 얼굴로 뛰어나왔다.
“아, 마스터 오셨군요! 어제 가져다주신 총기 아이템을 가지고 이것저것 실험해봤습니다. 마스터가 없으면 실험해 볼 수 없는 것도 있고요.”
장영표는 온통 검댕이 묻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그는 벙커에 연결된 무기 실험장으로 둘을 데리고 갔다.
“아, 그때 공사했던 게 여긴가.”
“맞습니다.”
결재판 위의 문서로만 봤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지하 벙커를 확장해서 공간을 더 판 것이었다.
“꼭 체육관 같네요.”
새로운 무기 실험장은 이비현이 감탄할 만큼 넓었다.
내벽에는 보호 결계가 쳐져 있어, 어지간한 폭발로는 끄떡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어린애처럼 신이 난 장영표는 총기 아이템이 가득 담긴 카트를 밀고 왔다.
자랑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장영표, 그 전에 먼저 부탁하고 싶은게 있는데”
“무엇이죠?”
한건우가 이비현을 데리고 여기 찾아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
“언데드··· 특히 뱀파이어와 비슷한 적을 상대할 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이 없을까? 시간이 없어서 무기를 새로 만들 순 없을 것 같은데.”
정확히 말하면 상대가 언데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균열에서 보았을 때.
드 라모트 백작부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뱀파이어와 상당히 흡사했다. 그녀의 권속들도 유사한 성질을 가지고 있겠지 싶었다.
“마스터 말씀입니까?”
“나와 이비현, 둘 다.”
“아, 그런 것이라면 간단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장영표가 눈을 반짝였다.
“그래?”
“영화에서 보면 드라큘라를 상대할 때 무슨 무기를 쓰죠?”
장영표가 낸 수수께끼에 이비현이 답했다.
“음··· 은탄환과 은으로 된 칼을 쓰지 않나요? 아니면 고전적으로 마늘이나 햇빛?”
언데드가 햇볕에 약하다는 거야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영화와 달리 은으로 된 무기는 뱀파이어에게 효과가 없었다.
마늘은 말할 것도 없고.
‘언데드에게 효과가 있는 아이템은 신성력이나 태양광 종류 아니었나?’
한건우가 고개를 갸웃할 무렵, 장영표가 신나게 설명을 이었다.
“하하 맞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느 정도 유사한 부분이 있죠! 비현 님은 날무기를 주로 쓰시죠?”
“네, 맞아요.”
이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미터, 환도, 그리고 이번에 얻은 사슬낫까지.
모두 예리한 날로 공격하는 암살자의 무기였다.
“제게 무기를 주시면 바로 은 코팅을 해드리겠습니다. 영구적으로 사용할 순 없더라도 며칠 동안은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뱀파이어는 냉병기에 상처를 입더라도 금방 회복이 가능하지만, 은으로 된 무기에 상처를 입으면 그 회복 속도가 현저히 느려집니다.”
“잠깐, 장영표.”
한건우가 말을 끊었다.
“은 코팅이 뱀파이어를 공격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데, 정말인가?”
“그러면요! 아하, 이런···.”
장영표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퉁겼다.
“?”
“제가 그냥 은이라고 했던가요. 제가 말씀드린 건 진은, 트루 실버입니다.”
“진은이라. 미스릴을 말하는 거군.”
“맞습니다. 마침 지난달 예산으로 한 괴를 주문해놓았더니, 이렇게 쓰는군요!”
“미스릴 코팅을···.”
이비현은 그런 걸 받아도 되는지, 얼떨떨한 눈치였다. 장영표는 두 사람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리고 두 분 다. 망토를 주시면 풀을 발라드리겠습니다.”
“풀이라니?”
“네, 이계에서 발견된 독초인데 신기하게 마수들의 시체가 있는 곳에서만 자랍니다. 인간이나 다른 마수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고 냄새도 맡을 수 없는데, 언데드가 다가오면 마비를 시킨다고 하네요.”
“그래, 부탁할게.”
한건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장영표의 말이니, 효능은 확실할 것이다.
“참, 그리고 마스터!”
“음?”
장영표는 한건우를 불러서 붙잡고, 실험용 총기가 가득 쌓인 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아까 부탁드리려고 했던 일인데요, 어, 이게 어디 있담···. 마침 마스터가 언데드를 상대하려 하신다면··· 이게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한건우가 어딜 가버릴까봐 그러는지.
장영표는 서둘러서 카트를 뒤적였다.
“마스터는 김도경처럼 빛을 다룰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계시지요?”
“응, 비슷하지.”
“이전 만주 전투에서, 언데드 몬스터가 나온 웨이브 때 아크 리치가 태양을 가리는 바람에 원정대 측이 막대한 피해를 본 사실을 기억하실 겁니다.”
“어, 그랬지. 나는 균열 안에 있어서 늦게 확인했지만 말이야.”
장영표도 현장에 있던 건 아니었다.
당시에도 아마 이 지하 벙커 안에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장영표는 마치 자기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했다.
한건우, 그리고 원정대의 전투에 대해서 샅샅이 조사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제가 그런 상황이 또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서 이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장영표는 한건우에게 주먹만한 아이템을 건네주었다.
유리로 된 정사면체 형태의 물건이었다. 사면체의 주변에 조그맣게 무지개빛이 감돌았다.
“...프리즘?”
“비슷합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잘 가늠이 가지 않았다.
“이걸로 어떻게 그 상황을 막는다는 거지?”
“빛을 비추면, 반경 500미터 정도의 범위 내에 빛의 필드가 생성되는 물건입니다.”
“그래?”
한건우가 관심을 갖고 프리즘 형태의 아이템을 돌려보았다.
“아직 따로 이름은 붙이지 않았는데요···. 각도를 맞추어서 일정량의 마력과 빛을 넣어주면 됩니다. 그러면 태양광의 필드가 생기고, 그 안에서는 언데드가 맥을 못 출 겁니다.”
태양광에 디버프를 받는 마수라면, 뭐든지 큰 타격을 입을 거라며. 장영표는 자신감을 보였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권속들이 언데드와 똑같이 태양광에 디버프를 받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집트의 균열에서도 백작부인의 권속들은 온몸을 검은 망토로 꽁꽁 둘러싸고 있었다.
미이라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리고 이비현의 어머니가 나타난 곳도 햇볕이 없는 지하 블랙마켓 안이었다.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겠군.’
한건우가 생각에 잠긴 동안, 장영표는 설명을 이어갔다.
“다만 단점이 하나 있습니다. 웬만한 빛으로는 빛의 필드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특히나 빛이 한 줄기도 존재하지 않는 동굴 같은 환경에서는요···.”
“빛의 세기 문제인가?”
“네, 어두운 곳에서는 보통 각성자들이 사용하는 조명 아이템 정도로는 역부족이라 고심 중이었거든요. 마침 마스터를 뵈니 그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그렇군. 그러면 이 프리즘에 빛의 힘을 넣으면 되는 건가?”
“예, 지금 한번 빛의 특성을 발현해서 프리즘에 넣은 후, 여기 가운데에 던져보시죠!”
[특성 발동 : 빛의 군주]
한건우는 마력이 담긴 빛줄기를 몇 초 정도 프리즘에 흘려넣었다.
실험용이니 그다지 세게 넣지도 않았다.
타앗-
한건우가 프리즘을 무기 실험장 가운데로 던졌다.
정사면체 형태의 프리즘이 데구르르 구르면서 자리를 잡았다.
파아아앗-!
“앗!”
“우와아악!”
이비현과 장영표가 나란히 탄성을 질렀다.
한건우도 놀라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무지개색의 빛으로 된 현란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무기 실험장의 어둑하던 천장과 바닥을 가득 채우고, 온 시야가 밝고 영롱한 빛으로 어지러웠다.
신비하다 못해 신성한 느낌까지 주었다.
파아아아-
프리즘이 만든 빛의 마법진은 한참 동안 공간을 밝히다가 꺼졌다.
“...오.”
가까이서 모닥불을 쬔 듯 볼이 홧홧해졌다.
장영표는 프리즘을 주워서 한건우에게 넙죽 내밀었다.
“받으십시오! 마스터의 아이템입니다.”
“실험은 완료된 건가?”
“예, 마스터 덕분에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영표는 드디어 아이템 제작이 완료되었다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뿌듯한 건 장영표뿐만이 아니었다.
“고마워. 마침 우리가 가려는 곳에 꼭 필요한 아이템일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