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193화 (193/238)

#193미래의 기억 (8) - 유인

“이게 무슨 뜻이죠?”

이비현의 눈이 멍해졌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들었다.

특수안보부의 연구소에서 다룬 사례가 적힌 보고서였다.

대상번호 AWG03.

그 딱딱한 명칭 아래에 몇 차례에 걸쳐 날짜와 설명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비현은 도무지 믿기지 않아, 그 보고서를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대상번호 AWG03(특급 비밀)]

- 대상자는 이주혁 선임연구원과 사실혼 관계임.

- 20XX. X. X.

대상자는 현장요원들과 교전 중 빈사상태로 연구소 이송.

이주혁 선임연구원은 현장에서 사망.

- 20XX. X. X.

대상자는 마력 구속구를 부수고 탈출 시도.

“한건우 씨. 이게 대체?”

이비현의 머리가 핑 돌았다.

보고서의 날짜와 내용을 몇 번이고 살펴봐도, 문구는 그대로였다.

“대상번호 AWG03··· 제 어머니를 말하는 것이군요.”

한건우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더욱 심각했기 때문이다.

- 20XX. X. X.

대상자에게 전신 구속구 적용

- 20XX. X. X.

대상자를 지속적으로 심문했으나 묵비권 행사.

반항이 심해 약물 투여 후 냉동 상태로 대기

이비현의 눈에 핏발이 섰다.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어머니가 한동안 살아 계셨다니.

그것도 연구소에 실험대상으로 붙잡혀서, 죽은 것만도 못하게 물건 취급을 받았다니.

“여기 관여한 인간들, 다 죽여 버릴 거예요.”

이비현이 복수심에 이를 빠득 갈았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다. 몇몇 관계자가 연구소에 남아 있었다 해도, 조승재가 난동을 부릴 때 다 죽었을 것이다.

“그럼··· 제가 블랙마켓에서 본 사람도 진짜로 어머니···!”

흥분에 차서 말하던 이비현의 말이 뚝 끊겼다.

그녀가 힘없이 말했다.

“어머니가 정말로 살아 계셨다면··· 왜 그동안 저를 찾아오지 않으셨을까요?”

“비현아.”

이비현의 목소리에 회한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왜 저를 보고도 아무 말도 없으셨을까요?”

“....”

한건우는 대답 없이 그녀가 들고 있는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이비현의 시선이 페이지의 마지막 줄로 항했다.

- 20XX. X. XX.

라모트 고성에서 긴급 요청.

협조 규약 제317호에 따라 대상자를 동유럽 라모트 고성으로 전달.

연구소 공식 기록에는 사망자로 처리(뱀파이어 화 추정)

이비현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어머니가 뱀파이어 화? 말이 안되잖아요···.”

한건우와 이비현은 만주에서의 전투를 똑똑히 기억했다.

언데드의 제왕, 아크 리치가 백여 마리의 뱀파이어 일족을 소환하지 않았던가.

아크 리치의 소매에서 나타난 박쥐 떼가 뱀파이어로 변해 덤벼들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뱀파이어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어 기운을 흡수하고, 피의 안개를 뿌려 공격하기도 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내밀고 흡혈 박쥐처럼 날아다니는 모습. 도저히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네 말이 맞아. 뱀파이어는 인간형 마수일 뿐, 인간이 변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

뱀파이어나 리치 같은 중상급 언데드에게 죽으면, 하급 언데드인 구울로 변하기도 했다.

옛 전설처럼 뱀파이어에게 물린다고 해서 뱀파이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요?”

“여기서 말하는 뱀파이어는 우리가 아는 그 뱀파이어가 아닌 것 같아.”

이비현은 아직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기록의 마지막 줄을 곱씹었다.

“...라모트 고성?”

“그래.”

라모트 고성, 이비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녀는 곧 뛰어난 기억력으로 그 연결고리를 되살려냈다.

“건우 씨, 이거 그때 알아봐달라고 한 사람의 정보와 관련 있는 거죠?”

“아마 그런 것 같아.”

이비현이 직접 입수해 왔던 인물 정보.

바로 아르고스의 세 번째 눈, 드 라모트 백작부인에 관한 기록이었다.

■ 드 라모트 백작부인(19XX. X. X. ~ 20XX. X. X. 사망), 여

- S급으로 추정되며, 별칭은 <피의 백작부인>

- 북유럽 왕족의 후손이자 대부호, 미술 애호가

- 흡혈 특성으로 상대의 HP를 흡수하고 자신의 권속으로 만들 수 있음

한건우는 드 라모트 백작부인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회백색의 피부에 키가 190cm가 넘는, 위압적인 인상의 여인.

그리고 그녀가 거느리고 있던 권속들도.

드 라모트 백작부인과 관련해서, 풀리지 않는 난제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나이였다.

각성자도 노화를 완전히 피해 갈 수는 없다.

최강의 각성자인 모용황도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쪼그라든 백발의 노인이 아닌가.

환인의 원유선이 나이에 비해 스무 살은 젊어 보인다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었다.

그런데 아르고스의 주인인 드 라모트 백작부인과 아소카 싱은 차원이 달랐다.

생년월일만 보면 이미 죽었어야 마땅할 두 사람.

마치 그들에게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한건우는 둘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둘은 이미 인간의 신체를 벗어난 단계인 거야.’

아소카 싱은 <강신>의 특성으로 이계의 신을 몸에 받는 자였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피의 군주> 특성 역시, 뱀파이어에 가까운 늙지 않는 신체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잠깐.’

한건우는 문득 등이 선뜩한 느낌이었다.

‘모용황은 대체 몇 살인 거지? 분위기를 보면 그들 둘보다 어린 것 같지는 않은데.’

모용황이 자기를 모용씨의 후손이자 천망의 주인으로 소개했지만.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손녀인 소소에게 <주시자의 뱀>도 심어놓은 상태이니,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비현이 뭔가를 깨달은 듯 물었다.

“권속··· 어머니가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권속이 된 걸까요?”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유력하다고 봐.”

한건우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을 권속으로 만드는 특성은 매우 희귀했고, 알려진 사례도 손에 꼽았다.

타인을 정신적인 노예로 만들어 인형처럼 부리는 것.

어떻게 보면 마수를 테이밍하는 것보다 더 지독했다.

<마인드 컨트롤> 같은 정신 조종 특성과도 달랐다.

그런 특성이 일시적인 효과라면, 권속은 한번 맺으면 계속 이어졌으니까.

게다가 권속을 맺으면, 주인의 능력을 나누어 받기도 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권속들은 <피의 군주> 특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비현의 어머니가 젊은 시절의 모습 그대로라는 얘기도.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능력을 나누어 받았다고 하면 어느 정도 설명되었다.

“뱀파이어 화라는 게··· 그런 뜻이었군요.”

“아마도.”

이비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온몸의 피를 빨려 죽은 솜브라 부하들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면 제 부하들이 죽은 것도, 어머니가 한 행동일까요?”

“그건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지. 어머니를 만나 뵙기 전까지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고, 이비현은 두려워진 것 같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가 걸어볼 만한 희망은 있어.”

이비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떻게요?”

“테이머가 죽으면 테이밍이 풀리는 것처럼, 권속을 만드는 특성을 가진 각성자가 죽으면 권속도 자동으로 풀릴 거야.”

“아···!”

“드 라모트 백작부인을 죽이고, 너희 어머니를 무사히 구해낸다, 그게 내가 생각한 방안이야.”

한건우는 의견을 구하는 듯이 이비현을 바라보았다.

이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겠네요.”

“그런데···.”

한건우는 말을 흐렸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걸려있는 일이니.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비현이 먼저 나섰다.

“저도 알아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걸.”

“....”

“드 라모트 백작부인이 위험한 상대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지금 어머니의 이성이나 기억도 또렷하지 않으시겠죠.”

“그럴 수도 있어.”

블랙마켓에서 이비현을 마주치고도 도망간 걸 보면.

이비현에 대한 기억은 확실히 사라진 것 같았다.

“어쩌면 권속이 풀린다 해도, 모든 기억이 제대로 돌아오시리라는 보장도 없고요.”

“....”

한건우도 내심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는 있었다.

“그런데, 어차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고 풀리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머니를 구해낼 희망이 보이는데 그냥 놔둘 수는 없죠.”

이비현의 눈빛은 이미 단단해져 있었다.

그녀의 말은 한건우의 생각과 같았다.

나쁜 결과가 될까봐 두려워서 도전도 안 하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직접 부딪쳐야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좋아. 그런데 어머니가 달려 있으니, 조금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네.”

한건우는 지금까지의 퍼즐 조각을 시간 순서대로 이어붙여 보았다.

“첫째, 특수안보부는 예전부터 드 라모트 백작부인 측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 것 같아요.”

협조 규약 제317호인가 뭔가가 그 증거였다.

당시 특수안보부는 이비현의 어머니, 호연을 계속 심문했고, 호연은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나왔다.

‘아마 심문에 순순히 응하지 않자 처분할 겸 실험대상으로 쓰려던 모양인데···.’

어찌 되었던 호연은 특급 비밀 수준의 대상자였다.

그런 호연을 순순히 넘겨준 걸 보면, 드 라모트 백작부인 측과의 관계가 꽤 깊은 것으로 추측되었다.

“둘째, 너희 어머니는 아마도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권속이 되었을 거다. 특수안보부 측에서는 그걸 ‘뱀파이어 화’라고 불렀고. 그런데 그 과정이 조금 특이해.”

“왜 하필 드 라모트 백작부인 측에서 저희 어머니를 요구했는지 모르겠어요.”

이비현의 어머니에게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것일지.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셋째, 최근에 너희 조직원이 공격을 받았지?”

“네.”

이비현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권속인 호연이 대체 왜 솜브라의 조직원들을 노렸는지.

여기부터는 도무지 짐작이 안 되었다.

“임원 한 명이 실종되었다가 시체로 발견되고, 부하 세 명은 아직도 실종된 상태라고 했지.”

“맞아요··· 서로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건이 우연히 일어날 리 없어. 분명히 실종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을 거야.”

“있어요.”

이비현이 무겁게 긍정했다.

“그게 뭐지?”

한건우는 대강 추정을 하고 있었다.

실종된 부하들이 유사한 업무를 하고 있었다던지, 특정한 다른 조직과 원한 관계가 있다던지.

아무래도 그런 데서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비현의 대답은 전혀 다른 쪽이었다.

“업무적으로 묶이는 점은 없지만, 다 오래된 멤버들이에요. 그 오두막에서 저와 함께 자라난 사람들이죠. 지금은 부하로 있지만, 저에게는 가족이나 같은···.”

“....”

한건우의 머리가 다른 쪽으로 돌았다.

아니, 머리가 아니라 감각이었다.

“비현아.”

“네?”

“이건 지금 드는 직감이야. 근거는 희박해.”

“...!”

이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건우는 전략과 심리전에도 능했지만, 진짜 독보적인 능력은 따로 있다고.

이비현은 항상 생각해 왔다.

한건우의 직감은 동물적이었고, 틀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드 라모트 백작부인 측에서··· 너를 노리고 유인하려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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