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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먹는 플레이어-191화 (191/238)

#191미래의 기억 (6) - 자신의 몫

세상에 100퍼센트라는 건 없겠지만.

한건우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퍼즐이 맞추어지고 있었다.

원래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복잡한 퍼즐 조각을 쉽게 맞출 수 있는 법.

조각 하나하나를 연결시킬 수 있는 한건우에게는 답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네?”

그런 한건우의 호언장담에 놀랐는지.

이비현이 눈을 크게 뜨면서 반문했다.

“짐작이 가는 게 있어서.”

“어··· 그게, 저는···.”

이비현이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렸다.

“뭐 때문에 그래?”

“이건 제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인데요. 제 과거와 관련된 거라···.”

이비현의 목소리가 점점 힘을 잃고 작아졌다.

한건우가 그녀와 눈을 맞추고 되물었다.

“내가 네 일에 개입하는 게 싫어서 그래?”

조금 후, 이비현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작지만 확실한 의사를 드러내는 동작이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방금 한건우가 이비현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말했을 때.

분명히 그녀의 눈빛에서 놀람과 기쁨을 읽었다.

그런데 이비현이 왜 이럴까.

한건우는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를 깨달았다.

“너, 괜히 자기 일로 폐를 끼친다, 뭐 그런 생각을 한 거지?”

“....”

정곡을 찔렀는지.

이비현의 시선이 흔들렸다.

“이비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당연히 내가 해결해야지. 다른 사람도 아닌 네 일인데.”

“아···.”

이비현은 눈을 반짝이며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무척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큰 눈동자가 울 것처럼 울멍거리고 있었다.

“건우 씨.”

한건우는 부담 갖지 말라는 뜻으로, 이비현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그의 손길이 어깨에 닿자, 이비현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크흠!”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유영원이 헛기침을 했다.

그의 안색이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비현이가 다 크긴 됐지.”

유영원이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치 남자친구에게 푹 빠진 딸을 본 아버지 같은 표정이었다.

그제야 이비현이 유영원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표정을 갈무리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한 사람 몫을 한 지가 10년은 됐지 않나요?”

“...그런 뜻은 아니었다.”

유영원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요?”

유영원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한건우를 쳐다보았다.

복잡한 심경이 담긴 얼굴이었다.

“우리 비현이가 고생을 많이 하고 큰 아이입니다. 사나운 것 같아도 성격은 순수하고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왠 부탁을 하세요?”

이비현은 난데없는 말에 온몸이 간지러워진 듯했다.

‘아, 이런.’

한건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완전히 자신의 마음을 정의하지 못했건만.

이비현이 부모처럼 여기는 유영원이 이렇게 나오는데, 어물쩍 외면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건 잘 알고 있다. 비현이는 내가 잘 챙길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한건우가 분명하게 답했다.

“그렇습니까.”

유영원은 조금 홀가분해진 웃음을 지었다.

아직 일말의 걱정이 담긴 시원섭섭한 표정이었다.

‘꼭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얼굴 같은데.’

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두 분, 대체 무슨 얘길 하시는 거예요.”

이비현은 두 남자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무슨 뜻인지 몰라,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잠깐, 그런데.’

한건우는 뭔가 잊은 듯한 느낌에 눈을 굴렸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드래곤이 찾아오지 못했군.”

“어, 그러네요.”

드래곤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여기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한건우의 입김이 미치는 영역이었다.

드래곤을 위협할 만한 적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한건우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아직도 카메라 앞에서 그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음, 관심 받기를 좀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신나게 포즈를 선보이던 드래곤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온 이계를 통틀어 최강의 마수라는 드래곤이지만.

이럴 때는 천방지축 사춘기의 소녀 같았다.

“성격 때문에라도 비밀 병기로 키우는 건 불가능했을 거야.”

“아니면 음···. 그 타이밍을 놓쳐서 못 온 걸 수도요?”

이비현이 유영원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하도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바람에, 인간의 형태로 폴리모프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드래곤이 용인 형태로 변한다는 사실.

한건우와 친한 길드원 몇몇만 아는 사실이었다.

이비현은 유영원 앞에서조차 그걸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다.

한건우의 생각도 그쪽에 무게가 실렸다.

“아무래도 그럴 거 같군. 드래곤이 있는 쪽으로 우리가 찾아가야겠어.”

한건우가 돌아갈 듯한 기색을 보이자, 유영원이 아쉬운 표정을 했다.

“오랜만에 뵙는데, 벌써 돌아가십니까?”

“회포를 더 풀고 싶었는데 아쉽군.”

한건우도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유영원, 이런 사람이었군.’

예지자였던 유영원이 스스로의 신념으로 걸어온 길.

그의 선택으로 인해서 한건우 자신도 여기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외롭지 않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유영원은 미래를 본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미래를 만들었던 거야.’

유영원이 본 마지막 예지, 마치 신화 속 대서사시의 종장 같은 그 전투에서.

적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결국 자신이 이겼는지, 아니면 패배하고 죽었는지.

대체 어떤 수를 써야 이길 수 있는지.

한건우는 이제 예지가 궁금하지 않았다.

‘그 전투는 분명히 일어난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후부터는 자신의 몫이었다.

“대장님, 저도 가보겠습니다.”

이비현도 옛 대장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무뚝뚝한 성격의 이비현은 여전히 이런 순간이 어색했다.

그녀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가끔씩 뵈러 찾아올게요.”

“아니야, 비현아. 날 위해 시간을 낼 필요는 없어. 자기 자리에서 할 일을 하다가, 필요한 때가 되면 다시 보자.”

이비현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먼저 방을 나갔다.

담백한 작별 인사였다.

그런데 한건우가 나가기 전, 유영원이 그를 붙잡았다.

“한건우 씨.”

“음?”

유영원은 망설이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제가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유영원의 말이라면, 조금 시간을 끌더라도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중요한 팁을 알려주려는 것일까.

한건우는 귀를 기울였다.

“비현이, 너무 맘 고생 시키지 마십시오.”

“...?”

한건우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비현이는 자기 마음을 저렇게 투명하게 드러내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요.”

“....”

유영원이 정곡을 찌른 셈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드래곤을 타고 이비현과 날아오면서.

이비현은 먼저 한건우에게 마음을 표현했다.

- 한건우 씨, 지금 일부러 그러시는 거예요?

- 정말 제 마음을 모르세요?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한건우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여자의 고백을 듣고도, 한건우는 지금까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최악의 대답을 할 뻔한 걸, 드래곤이 막아줬다는 게 진실이었다.

이비현의 일이라면 뭐든지 해결해 주겠다고 말했고, 그녀도 크게 감동했지만.

그 정도는 동료에 대한 의리라고 둘러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예지자가 아니라 독심술사였나?’

한건우가 대답하지 않자, 유영원이 살짝 꼬리를 내렸다.

“이런,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상관할 바는 아닌데 괜한 말을 했군요.”

“아니.”

예상치 못한 단답에, 유영원은 당황했다.

“예?”

“고맙다.”

과연 많은 미등록자들이 부모처럼 따를 만했다.

한건우는 가볍게 몸을 돌려 자리를 빠져나갔다.

*

한건우가 드래곤을 찾는 건 누워서 떡 먹기였다.

사방에서 훤히 보이는 전망대 타워 위.

시민들의 관심과 경탄을 한껏 즐기면서, 날개죽지를 쫙 펴고 볕을 쬐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도록 예상과 같군.”

한건우와 이비현은 구경꾼들 속에 섞여서 고개를 젖혀 위를 바라보았다.

광장에 빽빽하게 들어찬 주위 사람들과 같은 자세였다.

“드래곤이 한국에서는 저러지 않는데, 오늘은 왜 이럴까요?”

“서울 사람들은 드래곤을 하도 많이 봐서 웬만하면 안 놀라잖아. 여기는 관심이 짱짱하니까 신이 난 거지.”

“아하.”

한건우의 길드 건물을 위풍당당하게 장식하는 최고의 상징물, 드래곤.

드래곤이 인공 균열에 들어가 있을 때가 아니면, 길거리에서도 훤히 보일 정도였다.

처음 몇 개월은 드래곤을 보러 온 사람들로 거리가 마비될 정도였다.

은설아가 마수를 길들여 처음 탈 때만 해도 난리가 났는데.

길들인 드래곤이 나타났다는데 오죽하랴.

드래곤이 잠깐 빠르게 움직이거나, 날개만 크게 퍼덕여도 탄성이 번졌다.

- 우와아아!

- 방금 봤어? 비늘이 좌르르 번쩍이는 거!

- 비늘 하나가 웬만한 보호구 아이템과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단단하다며.

- 브레스는 실제로 못 보겠지?

- 아서라. 행여나 그걸 봤다간 바로 황천길이야.

그러나 관심도 잠깐.

늘 그렇듯이, 사람들은 생각보다 금방 변화에 익숙해졌다.

그게 드래곤을 저토록 관심에 목마른 종자로 만들었을 줄이야.

“이렇게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폴리모프를 시도하는 것도 무리긴 하지.”

한건우가 드래곤을 위한 변명을 해주었다.

“어떻게 하죠? 밤까지 기다릴까요, 아니면 인적이 드문 곳에서 만날까요?”

“뭐 하러.”

삐익-

한건우는 손가락을 입에 넣고,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크르릉?

드래곤의 긴 목이 번쩍 올라갔다.

밝은 눈이 구경꾼들을 샅샅이 뒤지고,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한건우를 찾아냈다.

[아빠!]

선명한 용언이 한건우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수많은 군중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오직 한건우의 귀에만 꽂히는 용언이었다.

예전처럼 카랑카랑하던 아이 목소리가 아니었다.

사람으로 치면 열 서너 살 정도일까?

사춘기가 시작된 소녀의 목소리였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어! 칭찬해 줘요.]

방방 뛰는 듯한 목소리에, 한건우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 잘 했다.”

“네?”

한건우가 갑자기 혼잣말을 자자, 이비현은 그를 돌아보았다.

키에에에에!

그때, 드래곤이 하늘을 향해 크게 포효하더니, 날개를 펄럭였다.

펄럭-

퍼어어-

지상의 사람들은 엄청난 포효에 오금이 굳었다가, 날개의 바람에 일제히 정신을 차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풀썩 주저앉은 이들도 있었다.

「오, 세상에···.」

슈우-

드래곤은 공중으로 몸을 던지듯이 가볍게 날아 광장으로 내려왔다.

「으아아-!」

「도망쳐!」

광장에 모여든 군중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드래곤은 잠시 그 아수라장을 즐기다가, 빈 공간에 우아하게 내려앉았다.

구경꾼들이 부리나케 도망간 자리.

한건우와 이비현만이 망토를 휘날리며 서 있었다.

처억!

드래곤이 다리를 접고 한건우 앞에 엎드렸다.

한건우가 익숙한 자세로 드래곤 위에 올라탔다.

이비현도 가벼운 몸놀림으로 따라 올랐다.

군중이 입을 딱 벌리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자.”

한건우가 드래곤의 목덜미에 대고 말했다.

파아앗-

드래곤이 로켓처럼 솟구쳤다.

잠시 음이 소거된 듯한 침묵이 흐르고.

「우와아아아-」

지축을 뒤흔드는 함성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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