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미래의 기억 (5) - 해결해 줄게
‘무언가 착각한 건 아닌가?’
한건우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이었다.
이런 경우는 <거짓 간파> 특성도 소용 없었다. 실제 사실인지 여부와는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면 진실이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시신을 두 눈으로 확인한 건 아니니, 만에 하나 살아계시다 쳐도···.”
“저도 알아요. 젊은 시절 그대로의 모습이란 건 이상하죠.”
노화, 즉 시간의 흐름.
아무리 강한 각성자라도 그걸 피해갈 수는 없었다.
높았던 체력 스탯도 깎여나가고, 집중력도 떨어진다.
훈련으로 보완할 수는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물론 노익장을 보이는 나이든 각성자들도 있었다.
일성의 태일제나 아르고스의 모용황 같은 이들.
둘 다 물질 계열 능력자인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건 경험에 의해 강해질 수 있는 능력인 거지.’
젊은 시절의 강대한 힘을 잃어버린다는 것.
어쩌면 보통 사람보다 더 큰 타격을 입는다고 볼 수 있었다.
‘많은 각성자들이 노화를 멈추려는 시도를 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했어.’
그렇다면 외모가 변하지 않았다는 건 어떨까.
가까운 예로 환인의 원유선이 있었다.
‘태일제와 비슷한 나이라고 들었는데, 겉모습은 30대 여성처럼 보이지.’
혹자는 이렇게 추측했다.
원유선의 외모는 실제로 젊지 않은데, 보는 사람의 정신을 미혹시켜서 젊어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몰랐다.
‘이비현의 어머니는 <이속> 능력자다. 이론적으로는 시간을 빠르게 달리니, 오히려 노화가 빨라야 맞아.’
환각 마법에라도 걸린 것일까?
그냥 닮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목걸이나 상처 같은 특징까지 일치했다면 그쪽이 신빙성은 있었다.
‘그래도 이비현 정도 실력의 각성자가 환각인 줄도 모르고 당했다는 건 납득이 안 되는데.’
한건우의 눈빛을 보고, 이비현은 그가 하는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도 알아요. 이걸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
“하지만 확실해요. 절대 착각이나 환각 같은 게 아니었어요.”
이비현은 이제 그 후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
그날 부모를 잃은 이비현은 땅굴의 끝에 다다랐다.
그곳은 또다른 야산으로 통하고 있었다.
보통의 산처럼 사람이 없는 곳인가 했더니.
그곳에는 예상치 못한 건물이 있었다.
‘...오두막집?’
산그늘에 둘러싸인 숲속.
언제 떠돌이 마수가 나올지 몰라,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 위험한 곳.
그곳에 버려진 별장이 있었다.
그 별장에서 한 청년이 은신처를 만들어 지내고 있었다.
그는 험한 세상에서 숨어 지내며, 고아가 된 각성자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가 바로 유영원이었다.
유영원은 이비현의 부모님과 안면이 있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비현을 거두어 키웠다.
이후에 ‘각성자 등록 시스템’이 강요될 때.
유영원이나 이비현은 그걸 거부했다.
그들은 범죄자 낙인이 찍혀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함께 자란 아이들에게, 유영원은 그런 삶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가족이나 다름없었고, 모두 핏줄보다 더한 끈끈한 관계로 맺어졌다.
그 특별한 공동체가 지금 <솜브라>의 전신이었다.
세월이 지나, 최근.
이비현은 솜브라 한국지부의 임원급 부하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최근 소식,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이제 제 선에서 해결할 테니, 아는 대로 말해 보세요.”
다들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솜브라 내부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중요한 일을 맡고 있던 임원 한 명이 연락이 두절되고, 그에 관해 소문이 무성하던 차.
세 명이 추가로 실종된 것이다.
모두가 침묵하던 순간.
입이 무거운 부관이, 다수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무래도··· 타 조직으로 이동한 것 아니겠습니까?”
“....”
“젊은 친구들이니, 중국이나 필리핀 쪽 정보 조직으로 건너갔을지도 모릅니다.”
이비현은 고개를 저었다.
“속단할 건 아닙니다.”
나이는 어리다지만, 처음부터 몇 년을 함께한 부하들이었다.
말이 부하지 친형제나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대장님, 추적은 안 하십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내부 정보를 들고 팔아넘기러 갔을지도 모릅니다.”
임원들이 걱정 섞인 충언을 했다.
“추적이라··· 사라진 이유를 모르는데 죄인이라 할 수는 없겠죠.”
몇몇 부하들이 귀를 쫑긋하며 고개를 들었다.
주로 나중에 들어온 이들이었다.
이비현이 평소와 달리 감상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력이 오래된 부하들은 알고 있었다.
초기 멤버에 대한 이비현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면 그냥 놔두십니까? 그랬다간···.”
“아니요, 찾아야겠죠.”
이비현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한 명 한 명 얼굴을 살폈지만, 원하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정보를 모르는 듯하니, 제가 직접 나서겠습니다.”
투두두···. 콰앙!
회의실 문이 열렸다.
“대장님!”
이비현의 어린 비서가 헉헉거리며 문틀을 잡고 멈춰섰다.
심부름을 다녀오려 블랙마켓에 갔던 사이.
회의실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모습에, 그는 깜짝 놀라 벙어리가 되었다.
이비현이 침착하게 말했다.
“말해 보세요.”
“시체가··· 시체가 나타났습니다!”
“자세히 설명하세요.”
“블랙마켓 한복판에, 실종되었던 임원 분의 시체가···.”
거기까지 듣고, 이비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누가 이런 짓을···.”
비서의 말대로였다.
이비현과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부하.
솜브라의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창백한 시체가 되어 블랙마켓 한복판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비현은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무시무시한 불꽃이 어려 있었다.
‘감히 누구인지 몰라도, 반드시 복수하겠어.;
그녀의 옆얼굴에는 서릿발 같은 냉기가 가득했다.
이비현의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대장님.”
“....”
“시체가 조금, 이상합니다. 몸에 피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뭐?”
이비현은 무릎을 꿇고 자신의 부하를 살펴보았다.
그 말대로였다.
일반적인 시체와는 조금 달랐다.
피부는 백짓장처럼 창백했고, 온몸의 체액이 빨린 듯, 살갗까지 쪼그라든 채였다.
스으-
그때 블랙마켓의 구경꾼 가운데.
이비현은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전투 관련 특성!’
한껏 예민하게 감각을 끌어올리고 있던 이비현이었다.
슈우우- 카앙!
<그림자 맹시>를 이용해서, 점멸하듯이 빠르게 덮쳤다.
이 정도 속도의 기습이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한건우 정도 말고는 거의 없을 것이다.
‘어?’
이비현은 허공을 잡은 듯한 느낌에 놀랐다.
쉬이익-
이비현의 시미터는 적의 목덜미 대신, 회색 망토 자락을 찢었다.
파라라-
찢겨진 망토 사이.
이비현은 분명히 보았다.
흰 피부와 검은 눈, 길고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카락.
미형의 얼굴 한쪽에 난 긴 상처.
그리고 목에 걸린 <미스릴 체인>까지.
‘엄마?’
분명히 호연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호연이 발로 바닥을 박찼다.
파아-
호연이 엄청난 속도로 사라졌다.
이비현은 황망한 얼굴로 그녀의 망토 자락만 붙잡고 있었다.
*
한건우는 유영원을 흘깃 보았다.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무 말도 거들지 않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모릅니다.”
유영원은 깔끔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기억의 수첩>을 접어서 품속에 넣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비현이가 말하는 일에 대해서는 작은 실마리조차 모르겠습니다. 저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나 봅니다.”
역할이라는 단어를 듣고, 한건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같은 언어로 말하는데도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어.”
“물으십시오. 가능하면 대답해 드리죠.”
유영원은 마음이 홀가분해진 듯, 평안한 표정이었다.
“당신 같은 예지자가 보는 미래 중에는 아마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많을 거야. 안 그런가?”
예상치 못한 질문인 듯.
유영원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건··· 대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군요. 답을 이미 알고 계시니까요.”
평화가 쉬웠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평화를 추구할 것인가.
행복이 흔했다면, 사람들이 행복하려고 이토록 애쓸 것인가.
그에 비해 악은 너무나 평범하게 도처에 널려 있었다.
아르고스의 주인들이 지배하던 땅에는 고통받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건우가 알던 회귀 전의 한국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나쁜 일을 막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뭐지?”
한건우는 그게 진심으로 궁금해다.
그의 속마음은 이랬다.
‘내가 현재를 바꿀 수 있었던 건, 미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미래를 아는 예지자들은 왜 나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얼른 생각해도 몇 가지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자기가 한 사소한 개입이 나비 효과를 일으켜서 전혀 예상치 못한 재앙을 불러올까봐?
이타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걱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사사건건 예지로 본 미래를 이용하려다가, 미래가 크게 바뀌어서 예지 능력이 쓸모없게 될까봐 두려울 수도 있었다.
최근에는 한건우도 마찬가지 일을 겪고 있었다.
마치 궤도가 바뀐 열차에 탄 것처럼.
자신이 기억하는 이 시점과 현재는 한참 멀어져 있었다.
유영원이 한건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우선 한 가지 사실을 알려드려야겠군요.”
“뭘?”
“다른 예지자들의 능력은 저만큼 뛰어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과거형이지만···. 제가 예지를 꿈에 비유했듯이, 보통 예지자들이 본 미래는 모호하고 애매한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행동은 이해가 안 돼.”
한건우가 유영원을 마주보며 물었다.
유영원은 오히려 의문스러운 투였다.
“제가 본 미래 중에 무엇을 바꿨어야 합니까?”
“당신은 암흑 균열 속에서 몇 년 동안 가사 상태로 있다가 깨어나서 나를 만나는 미래를 본 것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 일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한건우는 그게 납득이 안 되었다.
아무리 미래의 영향을 주니 마니 해도, 본인이 위험해지면 무슨 소용인가.
왜 그 미래를 회피하지 않고, 굳이 실현한 걸까.
“....”
“왜 암흑 균열에서 나를 기다렸던 거지?”
유영원은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첫 번째 예지 때문입니다.”
“그 금환일식이 나왔다는 예지?”
- 태양은 완벽한 원을 그린 반지 모양으로 떠 있다.
거대한 악마의 형상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에 맞서 한 남자가 싸우고 있다···.
- 마치 전쟁의 신과 같은 모습. 남자는 빛나는 창을 휘두르는데, 그 창날은 산맥과 바다를 가를 듯하다.
남자의 손짓에 대지의 거인들이 일어나 싸운다.
지옥의 화산이 폭발한다.
검은 태양을 향해 유성우가 치솟는다···.
한건우가 마치 신화 속의 한 장면처럼 싸우고 있었다는 그 아리송한 장면.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본 예지 중에 일어나지 않은 일은 없었죠.”
“그렇군.”
“그 장면에서 당신의 모습··· 세상을 구할 영웅의 모습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그 장면을 수수께끼로 품고, 기다리며 살아왔는데요.”
유영원은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나중에야 추측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첫 번째가 아니라, 마지막 예지일 수도 있다고···.”
“마지막?”
“당신에 대해서는 예지의 시간 순서가 거꾸로였던 거죠. 그리고 당신을 그 길로 이끄는 데 제 역할이 있었던 걸, 저는 이제야 발견한 겁니다.”
수수께끼 같은 생각을 품고 살던 예지자.
유영원의 말은 해석하기 어려웠다.
한건우는 무언가에 압도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른 누구의 의견과도 상관없이, 자신의 뜻을 품고 나아가는 구도자의 모습을 본 듯했다.
이제까지는 한건우가 그를 살려줬다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가 한건우를 도와준 것이었을까?
“유영원, 고마웠다.”
늦었지만, 한건우가 그에게 말했다.
그걸 지켜보던 이비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비현아.”
“네?”
“네 문제는, 내가 해결해 줄게.”
온몸의 피가 사라진 시체.
그리고 젊음이 유지된 듯한 어머니의 모습.
한건우는 짚이는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