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미래의 기억 (4) - 제거 작전
“이주혁. 얌전히 투항하지 않으면, 예쁜 딸이 평생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니도록 해주지.”
어린 비현을 인질로 붙잡고, 요원이 경고했다.
불꽃이 이비현의 얼굴을 집어삼킬 듯 넘실대고 있었다.
이 자도 주혁이 모르는 요원이었다.
친하거나 안면이 있는 동료였으면 좋았을 텐데.
주혁과 가까운 요원에게 이 일을 맡길 리 없었다.
“아이는 놓아줘.”
“너희 둘 다, 얌전히 투항하면 놓아주지”
“그 약속을 어떻게 믿지?”
“너희에게 선택권이 있을거라 생각하나? 얌전히 이 구속구부터 차라.”
요원이 구속구를 주혁에게 건네주었다.
손목을 묶는 수갑 형태였고, 각성자가 힘을 쓰지 못하도록 만드는 물건이었다.
“네가 여자에게 직접 채워준 후 너도 차도록. 그 때 아이를 풀어주겠다.”
“아빠, 안돼요··· 악!”
어린 이비현은 겁에 질린 와중에도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화염의 열기가 뺨 가까이 다가오자, 놀라 비명을 지르며 눈을 꼭 감았다.
“알겠다. 받아들이지.”
주혁은 손을 뻗어 구속구를 받았다.
차칵-
그가 구속구를 호연의 손목에 채우고, 본인 스스로도 수갑을 찼다.
“자, 이제 내 딸을 놓아줘!”
“그러지.”
하지만 여전히 마력의 불꽃이 비현의 주위를 파고들 듯이 맴돌았다.
“아, 하지만 아이는 우리와 함께 가게 될 거야. 각성자의 2세가 실험 표본으로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었지.”
요원이 주혁을 보며 조롱 섞인 웃음을 보였다.
그때 주혁이 말했다.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게 특수안보부의 방식이니까. 나도 그에 맞게 대응할 생각이야.”
준혁이 손가락으로 집고 있던 작은 못 같은 물건을 보여주었다.
구속구를 구성하는 주요 부품이었다.
“내 연구 프로젝트에 이 구속구를 만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이런···!”
요원은 퍼뜩 놀라며 호연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호연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시에 요원의 목에 얼음처럼 차가운 미스릴 체인의 감촉이 느껴졌다.
호연이 섬광 같은 속도로 양 팔을 교차했다.
스걱.
요원의 목이 잘려져 나갔다.
눈을 부릅뜬 머리통이 땅에 떨어지기 전, 호연은 비현을 꽉 껴안았다.
“엄마!”
“우리 딸, 괜찮아. 이제 괜찮아.”
호연이 비현의 얼굴을 품에 묻었다.
“호연 씨, 빨리 호연이를 데리고 나가요. 아직 밖에 요원들이 포위하고 있을 거예요. 시선을 분산시켜야 그나마 탈출할 확률이 올라가요.”
무전이 터지지 않으니, 아직 내부 사정을 모르고 있겠지만.
바깥에 대기 중인 2선의 요원들이 진입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당신만 여기에 두고 갈 수는 없어요.”
호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과 비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난 뭐든 할 수 있어요. 당신을 만나고 비현이를 얻은 것. 내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어요.”
주혁이 담담한 어조로 말하며, 창문을 가리켰다.
“자, 10초 뒤에 조명탄을 발사할 테니. 그때 저 부서진 창문 쪽으로 나가요. 목적지는 알죠?”
밖에서는 요원들이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빠, 우리랑 같이 가요.”
“엄마 말 잘 들어야 한다.”
비현은 울면서 주혁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빠···.”
“엄마랑 먼저 나가 있으면, 아빠도 금방 뒤따라갈게.”
준혁이 벽지 뒤에 숨겨놓은 버튼을 눌렀다.
퍼어엉!
주택 주위에 설치된 조명탄이 터졌다.
저격용 렌즈로 이쪽을 보고 있을 요원들의 시야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호연은 비현을 꼭 감싸안고, 부서진 창문을 넘어 뛰었다.
뛴다기보다 나는 것에 가까운 속도였다.
온몸에 생채기가 났으나 이를 돌볼 틈은 없었다.
집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났을까.
뒤를 돌아보는 순간.
투콰아아-
큰 폭발음이 들렸다.
주혁이 특수안보부 요원들과 함께 자폭을 한 것 같았다.
‘주혁 씨.’
호연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떨어졌다. 남편의 죽음을 직감한 것이었다.
그러나 감상에 잠길 여유조차 없었다.
특수안보부에서 주혁만을 제거하려고 했으면, 다른 방법도 많았다.
‘그런데 굳이 자택에 찾아와서 가족 구성원 전부를 없애려고 했다···.’
주혁이 고민하던 각성자 등록 시스템의 문제.
그걸 알 만한 모든 사람을 없애버리려는 것이리라.
‘폭발 장소를 조사하면, 집안에 나와 비현이 없었다는 게 드러날 수도 있어.’
그러면 추격대가 붙을 것이다.
컹! 컹!
그때 군견들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호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특성을 계속 쓰면서 달리는 것은 바보 짓이었다.
마력이 금방 고갈될 뿐 아니라, 유사시에 적들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최대한 힘을 아껴 가며 탈출해야 했다.
호연은 비탈을 올라가 철조망을 넘었다.
수풀이 우거진 어두운 산비탈.
민간인은 들어오지 않는 야산이었다.
호연은 비현을 안고 익숙하게 길을 찾아갔다.
그녀는 수사망이 좁혀와 도망가야 할 경우를 대비해서, 주위 여러 군데에 탈출 루트와 보급로를 마련해 두었다.
먼저 산비탈의 나무그늘 속. 비상약품과 건조 식량을 보관해둔 곳이 있었다.
‘다행이야. 물건이 제대로 있어.’
호연은 비현을 수풀 옆에 내려두고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다음 루트를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바람을 가르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타앙!
호연을 스치고, 나무둥치에 총탄이 박혔다.
12.7mm 대물 저격용 총탄이었다.
“!”
벌써 여기까지 추적이 붙다니.
호연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스쳤다.
슈우웅-
타앙-
요원들은 호연의 특성을 파악한 듯.
아무도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속>으로 멀찍이 도망가도, 저격수는 금방 호연의 위치를 파악했다.
한밤의 피 말리는 사냥은 끝이 없었다.
그녀의 숨통이 조여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되는 순간 요원들에게 붙잡힐 것이었다.
마지막 도주로를 앞두고, 호연은 갈등했다.
그녀가 비현의 양 어깨를 잡고 눈을 들여다보았다.
“비현아 이제부터 엄마 말 잘 들어. 여기서 잠깐 엄마랑 헤어져야 해.”
“아뇨, 엄마랑 있을래요.”
“엄마는 나쁜 아저씨들 잠깐 혼내주고 따라갈 테니까, 먼저 이 땅굴로 들어가서 쭉 길을 따라가. 갈림길이 나오면 항상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칠흑같이 어두운 땅굴은 지옥의 문처럼 무시무시해 보였다.
비현은 눈물을 흘리면서 엄마를 바라보았다.
“싫어요! 엄마랑 여기서 같이 싸울래요.”
슈우웅-
아까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으윽!”
호연은 비현을 감싸며 회피했다.
총알이 호연의 등을 스쳤고 피가 튀었다.
호연은 비현을 땅굴 속으로 밀어넣었다.
비현은 입구 쪽에서 머뭇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까지 데리고 혼자 여기까지 오다니, 대단하군”
이제 사면초가에 몰렸다고 생각했는지.
한 요원이 다가왔다.
그는 다른 보호 장비도 없이, 얇은 전투복만 걸치고 있었다.
“도망치는 것도 이제 끝이다. 우릴 고생시킨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호연은 미스릴 체인 목걸이를 손에 감았다.
“글쎄, 과연 생각처럼 될까?”
“단순히 빠른 것만으로는 나를 잡을 수 없다.”
요원은 <아이언 스킨>을 발동하고 호연에게 덤벼들었다.
“!”
은색으로 변한 딱딱한 피부.
미스릴 체인의 공격이 제대로 먹혀들어갈지 알 수 없었다.
호연은 공격을 회피하면서, 총알이 발사된 쪽으로 몸을 날렸다.
적들의 허를 찔러서, 가까이 접근한 저격수부터 잡기 위해서였다.
[특성 발동 : 이속]
슈우우웅-
궤적이 휘어져 날아오는 총알이 호연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호연은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 저격수의 위치를 파악했다.
나무 뒤.
‘저기다!’
타다닷-
그녀는 저격수에게 접근해 미스릴 체인으로 목을 휘감았다.
스겅-
저격수를 해치우는 순간.
호연은 옆에서 불길한 기척이 엄습하는 걸 느꼈다.
‘저격수를 보호하는 요원이 붙어있었나!’
호연의 눈앞에서 칼날이 번뜩였다.
본능적으로 움직여 피했지만, 뺨에서 뜨거운 피가 흘렀다.
‘마음이 급해서 기본적인 실수를···.’
쉬이익-
호연은 미스릴 체인을 채찍처럼 수평으로 휘둘렀다.
“크억!”
칼을 휘두른 요원이 목을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호연은 이속을 쓰며 뛰어올라, 무릎으로 요원의 얼굴을 깨부쉈다.
타앗!
두 요원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러나 칼날에 맹독이 발라져 있었는지.
상처 부위의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윽···.”
온몸에 오한이 들고, 귓속이 울렸다.
어지러워 두 발의 중심이 잡히지 않았다.
이 상태로 이속을 썼다가는 오히려 목숨이 위험할 것 같았다.
호연은 비척거리며 돌아섰다.
비현을 추적하지 못하도록, 저 요원까지 해치워야 했다.
“이 년이!”
<아이언 스킨> 특성을 가진 요원이 호연에게 다시 덤벼들었다.
순식간에 동료 요원들이 죽어나가자 분노를 참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콰악- 쾅!
두 차례의 공격은 이속 없이도 피했다.
상대 요원은 신체가 무겁고 단단한 만큼 속도가 느렸다.
적이 한 명뿐이었다면. 호연이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비현은 엄마를 두고 멀리 가지 못하고, 땅굴 입구 쪽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부터 잡아라!”
도대체 이 작전 하나에 몇 명이 출동한 건지. 또다른 요원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특수안보부는 ‘제거’를 목표로 하면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요원들이 어린 비현이 있는 땅굴 쪽으로 다가갔다.
“비현아, 빨리 피해!”
“엄마···.”
요원들이 악마처럼 손아귀를 뻗었다.
비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까도 나 때문에, 아빠가···!’
깜빡-
순간 비현의 시야가 점멸했다.
파아앗!
비현의 온몸에서 흰 빛이 깜빡였다.
“뭐야!”
“이런 망할··· 자연 각성이다!”
“빨리 아이를 포획해.”
스으-
‘?’
그때 비현은 무척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온몸이 무생물이 된 듯도 했다.
[특성 발동 : 그림자 맹시]
이비현은 자신이 무엇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다만 요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르지 못하고 투과하며 흩어지는 걸 느꼈다.
‘내가 안 보이는 거야.’
이비현은 상황을 금방 받아들였다.
어린아이라서 가능한 유연한 사고였다.
‘엄마 말을 들어야 해.’
이비현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엄마 아빠가 있는 곳으로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었지만.
똑똑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이비현은 무작정 땅굴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림자에 스며든 눈은 칠흑 같은 어둠에서도 길을 찾아냈다.
“도망쳐! 빨리!”
뒤에서 엄마의 비명이 들렸다.
이비현은 그 말대로 속도를 높였다.
타다다다다-
비현의 기척이 멀리 사라지자, 호연은 안도했다.
‘행운이 따랐어.’
호연은 땅굴을 가로막은 채로, 특수안보부의 각성자 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더이상 이속 특성은 쓸 수 없었다.
그녀가 품 속에서 손을 넣었다.
언제 어디서든 품고 다니던 최후의 항거 수단.
총통 관저를 폭발시켰던 그 폭탄을 쥐었다.
“막아!’
콰아아!
땅굴 입구가 무너졌다.
이비현은 무너지는 굴의 진동을 느끼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눈물이 말라붙도록 빨리 뛰었다.
*
“....”
섣부른 위로는 와닿지 않을 것이다.
한건우는 침묵 속에 이비현을 바라보았다.
“저는 평생 희망을 가졌지만··· 결국 알게 됐죠. 그날 부모님이 확실히 돌아가셨다는 걸요.”
“그렇군.”
“작전 결과 보고, 관계자 사망 기록, 시신 안치 기록, 현장 사진까지···. 빠짐없이 다 찾았어요.”
이비현의 눈빛에는 긴 회한이 담겨있었다.
그녀가 확신할 정도면 얼마나 끈질기게 조사했을 것인지. 안 봐도 뻔했다.
실낱 같은 희망만 있어도 끝까지 찾아보고 쫓아갔을 테니까.
“그렇다면 <연옥경>을 구하려고 한 것도···.”
“....”
죽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게 해준다는, 신비스러운 아이템.
“부모님을 만나뵙고 싶어서인가.”
그러나 이비현은 섣불리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다음 말을 망설였다.
“아뇨. 확인하기 위해서였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게 정말 맞는지···.”
한건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거라 믿고 찾는다면 이해되지만.
죽었는지 확인을 한다는 건 이상하게 들렸다.
“모든 정황은 두 분이 돌아가신 게 확실한데···. 얼마 전에, 제가 직접 봤어요.”
“?”
한건우는 설마 했다.
“얼굴 한쪽에 검상을 입고, 미스릴 체인을 걸고 있는··· 젊은 시절 그대로의 어머니를요.”
이비현이 믿기지 않는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