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188화 (188/238)

#188미래의 기억 (3) - 진퇴양난

“각성 전조증상?”

한건우가 되물었다.

각성 전조증상은 모든 각성자에게 나타나는 건 아니었다. 대개 체질이 예민한 사람들이 각성 직전 몸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각성이 진행된 것도 놀랍지만, 어머니와 딸이 2대째 각성자인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각성자 형질이 유전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들이 갑론을박 중이지만.’

대개 스무 살이 넘어서 각성하는 게 보통이기에, 아직 이론을 증명할 만큼의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지 않았다고 들었다.

“네, 그것 때문에 부모님이 이중으로 고민하느라, 방심하셨던 것 같아요.”

이비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방심이라면?”

“특수안보부에서... 아버지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감시를 강화했던 거죠.”

이비현의 눈빛에 오래된 증오가 떠올랐다. 이제 한건우가 익숙하게 본 그녀의 얼굴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

“호연 씨,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이비현의 아버지, 이주혁은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손등으로 이마를 짚고, 열이 오른 두뇌를 가라앉혔다.

그의 머리는 뜨겁게 열이 올라 있었다. 꼭 무리한 프로그램을 돌린 것만 같았다.

“자기, 지금 진퇴양난이죠?”

“...아직 결정이 안 돼요.”

호연이 이주혁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남편의 양 팔에 손을 얹고 말했다.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진실을 밝혀야 하는데, 그러면 가족이 위험해질 수 있고.”

“나는 괜찮아요. 하지만 당신과 비현이는···.”

“각성자 등록 시스템에 대한 사실을 묵과하자니, 거대한 악에 동조하는 것 같고.”

“....”

“곧 우리 비현이도 각성할 텐데, 그 시스템에 등록시킬 건가요?”

호연이 쐐기를 박자, 이주혁의 낯빛이 회색으로 변했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결정이 쉬웠을까.

“아니면 비현이도 나처럼 숨어서 평생을 살게 할 건가요?”

“그럴 수는 없어요.”

주혁은 아직 호연을 숨겨주고 있었다.

호연이 있던 나라의 사정 때문이었다.

호연의 마지막 활약에도 불구하고,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서인지. 아니면 균열 발생으로 인한 세력 변화 때문인지.

결국 동료들이 꿈꾸던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폭력배에 가까운 각성자 조직이 새롭게 나라를 장악했다.

그들은 국정을 다스릴 경험도, 능력도 없었다. 그저 지배 세력으로 군림할 생각뿐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바로 과거의 부패한 관료들을 다시 불러서 부하로 부리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호연이 총통실 관저를 폭파하고 나오는 걸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다.

호연은 국제 테러리스트로 수배가 되고 있었다.

세상이 바뀌고 나니 국제적인 수사망을 펼칠 수는 없게 되었지만.

어쨌든 호연은 떳떳하게 나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 호연을 남몰래 숨겨주고, 딸까지 낳았다는 게 밝혀진다면.

주혁도 상부의 추궁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호연도, 그리고 딸 비현도.

아직까지는 숨어서 지내는 처지였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권리가 있잖아요. 우리에게 비현이가 소중한 것처럼···.”

호연이 주혁의 마음을 읽어낸 것 같았다.

주혁 혼자뿐이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족이 있지 않나. 주혁은 아득한 두려움을 느꼈다.

주혁이 호연을 꽉 껴안았다. 그는 눈을 감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불안한 주혁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호연의 호흡과 맥박은 규칙적이었다.

“우리, 같이 이걸 막아봐요.”

“후우···.”

“옳다고 믿는 길을 같이 가요. 해낼 수 있어요.”

호연은 확실히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와 살을 맞대고 있으니, 그녀의 순수한 용기가 자신에게 스며들어오는 것 같았다. 주혁은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혁은 자신의 마음속에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길은 고난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지금 자신이 국가에서 받는 특별 대우, 안전 보장. 그런 것을 다 내버려야 했다.

그런데도 호연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주혁은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내가 끓여둔 수프의 내음.

아이와 같이 읽다 덮어둔 책, 손바닥처럼 작은 아이 옷.

작은방에서 새어나오는 아이의 색색대는 숨소리.

지금, 유리로 된 바닥 위에 세워진 행복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루만 더, 생각해 봐야겠어요.”

“좋아요.”

호연은 이해심 깊은 눈빛으로 덧붙였다.

“당신이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라면, 난 그게 어떤 결정이든 따를 거예요.”

도무지 세상에 순종할 줄 모르던 여자.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맹목적인 지지를 보여주자, 주혁은 가슴이 벅찼다.

*

그날 밤.

호연은 번쩍 눈을 떴다.

불길한 감각이었다.

평생 이방인으로, 몇 년간은 지하조직에서 혁명을 꿈꾸는 조직원으로, 지금은 각성자이자 어머니로 살고 있었다.

그녀보다 직감이 뛰어난 사람이 있을까?

호연은 자신의 직감을 백 퍼센트 믿었다.

“자기.”

“...응, 왜?”

주혁 역시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던 듯.

호연이 부르는 소리에 바로 일어났다.

“쉿.”

호연의 표정이 심각해 보였다.

주혁은 곧바로 침대 옆에 설치한 버튼을 눌렀다.

지잉-

주택 창문에 설치해둔 보호막 아이템을 가동한 것이었다.

투두두두-

“!”

보호막이 가동되자마자, 벼락같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격이에요. 폭발음은 없고, 소음기를 달았어요.”

주혁이 창문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깔끔한 탄착군을 이룬 저격 솜씨.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비현아···!”

슈우-

호연이 옆방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특성인 <이속>. 섬광이 스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빨랐다.

아홉 살 난 비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비비며 앉아 있었다.

“엄마, 밖에 무슨 소리예요?”

“쉿, 이리 와.”

호연은 비현을 데리고 움직였다.

지하실 쪽 통로로 도망가려는 생각이었다.

철컥.

주혁도 그들을 따라가면서, 침대 옆에 숨겨둔 라이플을 장전했다.

상대가 각성자라면, 일반인이 쏘는 총기는 크게 타격이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위협 사격 정도는 가능하리라.

지이익- 쿵-

“아....”

호연이 탄식했다.

귀가 밝은 그녀는 들을 수 있었다.

지하실 문이 제거되어 넘어지는 소리였다.

“이미 지하실 통로는 파악됐어요. 다른 길로 가야 해요.”

호연이 주혁에게 말했다.

창문 바깥쪽에는 저격수가 있고, 지하실로 연결된 통로도 막혔다.

현관문 쪽에서도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숨 쉴 틈도 없이 포위망이 조여들었다.

철저하게 계획된 사냥이었다.

이런 방식이 주혁에게는 익숙하게 느껴졌다.

바로 자기가 몸담고 있는 조직의 방식이니까.

“특수안보부···.”

들켰구나.

주혁의 마음속에 찬바람이 불었다.

정부를, 아니 특수안보부를 배반하려던 마음을 먹은 걸 들킨 모양이었다.

상대가 특수안보부라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주혁이 냉정하게 판단했다.

“곧 현관문이 열릴 겁니다. 내가 엄폐물 뒤에서 응전하면서 창고 쪽으로 끌어들일 테니, 당신은 비현이를 데리고 작은방 문 뒤에 숨어있다가 현관으로 빠져나가요.”

“뭐라구요?”

호연의 얼굴색이 변했다.

“할 수 있어요, 호연 씨.”

물론 이속 능력이 있는 호연이라면, 아이를 데리고 틈을 타서 빠져나가는 건 가능했다.

그러나 호연은 주혁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자기를 두고는 아무 데도 안 가요.”

“호연 씨, 걱정 말아요. 이들은 제 동료들일 겁니다. 대치하면서 협상할 여지는 있어요.”

동료라는 말에, 호연의 안색이 변했다.

상대가 특수안보부라면 더 문제였다.

그들의 임무 성공률은 100%.

실패를 모르는 무서운 집단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말대로 해요. 어떤 결정이든 따른다고 했죠? 이게 내가 내린 결정입니다.”

주혁이 날카롭게 말하면서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호연에게 작은방 쪽으로 들어가라고 손짓으로 지시했다.

“빨리.”

“엄마, 아빠···.”

겁먹은 비현이 부모님을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호연은 비현을 꼭 안고 작은방 문 뒤로 들어갔다.

타앗-

현관문이 안쪽으로 넘어져 열렸다.

슈웃-

매운 연기를 풍기는 연막탄이 집안으로 떨어졌다. 독성이 있는지 숨 쉬기가 어려웠다.

호연은 비현의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3명의 침입자가 고글과 마스크를 쓰고 집안으로 발을 디뎠다.

‘전부 각성자 요원들이야.’

호연이 바짝 긴장했다.

그녀의 눈이 요원들의 무기를 살폈다.

셋 모두 마력 탄환이 나가는 권총을 겨누고, 짧은 던파와 나이프 같은 근접 무기를 차고 있었다.

‘내부에 진입한 사람은 근접 전투요원이군.’

타앙- 탕!

창고 옆의 기둥 쪽에서 라이플이 불을 뿜었다.

주혁이 말한 대로, 눈길을 끌기 위해 공격한 것이었다.

세 요원들은 짧은 수신호를 나누었다.

두 명은 전진하고, 한 명은 주변의 엄폐물을 살피기로 한 모양이었다.

한 요원이 마력 권총을 겨누며 작은방 쪽으로 다가왔다.

호연이 비현을 안아서 내려놓고, 목에 걸고 있던 긴 체인 목걸이를 풀었다.

[미스릴 체인]

주혁이 선물해준 아이템이었다. 평소 목걸이처럼 두르고 있었지만, 위급할 때는 암살자의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다.

주우욱- 타앗-

호연이 긴 목걸이를 팽팽하게 당겨 잡았다.

[특성 발동 : 이속]

슈우-

그녀가 벽을 디디며 박찼다.

다가오던 요원의 고글 너머로, 동공이 커지는 게 보였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크헉!”

뎅그렁-

다가오던 요원이 권총을 떨어뜨리고,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미스릴 체인으로 목이 졸렸던 것이다.

타앙- 탕- 타앙-

다른 요원들이 호연을 노리고 마력 권총을 쏘았다.

호연은 보호구를 갖춰입은 요원의 몸을 총알받이 삼아 공격을 피했다.

“젠장, 지하에서 뭐 해. 지원 올려보내!”

“무전이 안 터져.”

이 집 안에서는 모든 무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

주혁의 솜씨였다.

“끄으으···.”

아무리 강한 각성자라도, 인간의 몸이었다.

뇌로 통하는 혈류가 차단되면 기절하는 건 당연했다.

‘7초, 8초, 9초.’

미스릴 체인이 목을 깊이 파고들었다.

요원의 몸이 축 늘어졌다.

호연은 기절한 요원의 몸을 앞으로 뻥 차면서, 옆으로 굴러 벽 뒤로 돌아갔다. 그녀의 손에는 요원이 떨어뜨린 권총이 들려있었다.

타앙- 탕-

“크윽!”

호연과 주혁이 앞뒤에서 동시에 응사하자, 두 요원은 당황했다.

호연은 그들의 태세가 흐트러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침입한 요원들은 전신에 방탄 보호구를 갖춰입고 있었다.

그들의 약점은 그 보호구의 틈새였다.

마스크와 목 보호구 사이의 틈.

그리고 고글과 마스크 틈.

보통의 상대라면 파고들 수 없는 약점이지만, 호연은 달랐다.

[특성 발동 : 이속]

슈우-

이속 특성으로 공기를 가를 때면.

호연은 자신이 빠른 게 아니라 세상이 느린 것처럼 느껴졌다.

1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보호구의 틈새.

그녀가 마력 총알을 박아넣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타아아아-

공이치기가 울리고, 파열음과 함께 두 발의 총알이 발사되었다.

탄환의 머리가 두 요원의 얼굴과 목덜미에 닿았다.

마력을 실은 탄환은 각성자의 몸 속을 나선으로 파고들어갔다.

“크허억!”

이속의 효과가 끝나고, 호연이 착지했다.

‘다행이야.’

고유의 마력을 탄환에 싣는 방식의 총기였다.

그게 아니라 순수한 마력만으로 탄환을 만드는 방식이었다면, 제대로 못 다루었을지도 모른다.

주혁과 함께 현관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막 활로가 보인 그때.

주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호연은 아차,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지하실에서 올라온 요원이, 이비현의 목에 팔을 두르고 붙잡고 있었다.

“엄마···?”

이비현의 얼굴 근처, 화염이 뱀처럼 물결치며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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