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미래의 기억 (2) - 테러리스트
이비현은 과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오직 한 번, 한건우가 각성자 등록을 했다는 사실을 듣고서.
이비현은 고개를 저으며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 각성자 등록을 하면 안 돼요. 한건우 씨도 제 말을 듣는 게 좋았을 거예요.
- 왜?
- 제 부모님이 그것 때문에 돌아가셨으니까요.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아랫입술을 깨물며 후회하는 모습도 보았다.
‘그게 마지막.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지.’
솔직히 묻지 않아도 뻔하다고 생각했다.
균열 발생 1세대.
국가와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던 때였다.
그때 활동하던 사람들은, 재해나 사고로 죽은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한건우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생겨난 무수한 고아들을 ‘균열 고아’라고 부를 정도이니.
이비현도 그 중 하나이려니 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특수안보부의 연구원이었다고? 그럼 특수안보부 변혁기의 초기 멤버라는 건데···.’
과거, 그러니까 균열이나 각성자 같은 게 생기기 전.
특수안보부는 국가 안보를 지키는 고위급 정보조직이었다.
균열이 발생하고 세상이 격동하자, 그들은 누구보다 빨리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엘리트 각성자 조직으로.
“어머니도 연구원이셨나?”
“아니요. 저희 어머니는···.”
이비현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왼쪽 위를 향했다.
이제 전임 대장 유영원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
이비현의 어머니, 호연은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
호연은 어릴 때부터 아시아권을 돌아다니며 홀로 유학 생활을 했고, 성인이 되자 집안과 절연하고 뛰쳐나왔다.
호연은 혼자 사업을 시작했다.
여행업, 숙박업, 무역업까지. 핏줄의 내력인지, 수완이 좋았고 운도 따르는 편이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CEO가 되어, 남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살고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 사업가. 지역 유지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겉모습일 뿐. 실상 호연은 평범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정권은 부패하고 잔혹해. 국민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고.」
「기다리자. 혁명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호연이 대학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친구들.
모두 정의롭고 의지가 강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반정부 조직을 만들고, 총통을 몰아내고 새 정부를 세우기 위한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호연은 그 반정부 혁명 세력의 연락책이자 보호자 역할이었다.
혁명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부유한 외국인 여성. 무척 훌륭한 위장 신분이었다.
호연은 정부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고, 그걸 이용해서 친구들을 도왔다.
「이번에도 호연 덕분에 살았어. 혁명이 성공하면 꼭 보답할게.」
「보답은 필요없어. 너희들을 도울 수 있는 것만도 좋으니까.」
친구들이 각 지방으로, 또는 외국으로 움직일 때도.
중요한 인물들과 접선하거나 물건을 전달할 때도.
호연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몇 번이나 정부군의 추적을 따돌려 친구들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어느새 호연은 혁명군의 일원. 그것도 주요한 인물이 되어있었다.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생각은 버렸다.
그들과 삶과 죽음을 함께할 각오였다.
「총통 관저에 폭탄을 설치할 루트를 알아냈어. 폭파와 함께 수도를 점령한다.」
「이게 마지막 임무야.」
최종 작전을 설계할 무렵.
호연은 감시자가 따라붙는 걸 느꼈다.
‘정부군인가?’
동료들에게 연락을 자제하라고 비밀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감시는 점점 길어졌다.
거사를 앞두고, 더 이상 미루기 어려워진 시점.
‘강행해야 하나?’
항상 안전 불감증을 경계해야 했다.
여태까지 쭉 괜찮았다 해도, 한 번이라도 정체를 들키면 끝장이었다.
호연 정도의 위치라면, 아무리 외국 국적이라 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목숨뿐인가. 여태껏 쌓아온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고민하던 때.
호연은 몸의 이상을 느꼈다.
‘어···?’
며칠 사이, 수시로 구역질이 났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기도 했다.
귀에서는 이명이 울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병이라도 걸린 걸까. 아니면 정부군의 독에 당한 걸까.
호연의 가슴이 덜컹했다.
‘바닥이 울렁거리는···데?’
휘청이며 쓰러지려는 그녀를, 누군가 부축했다.
「괜찮습니까?」
젊은 한국인 남자였다. 오랜만에 듣는 한국말이 기꺼웠다.
「아, 고마워요.」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호연은 흐려진 시야로도 금세 그를 알아보았다.
남자는 호연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장기 체류하는 여행객이었다.
대학을 휴학하고,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러 온 학생이라고 했던가. 지적인 인상에 정중한 태도 때문에 호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
“물론 그게 제 아버지였죠.”
이비현은 약간 징그럽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럴 때는 평범한 또래의 여자애 같았다.
“아버지는 특수안보부의 블랙 요원이었어요. 해커 출신이었고, 보기 드문 천재셨대요. 감시대상 중에 어머니가 있었고요.”
이비현의 어머니, 호연은 그의 정체를 모른 채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 쪽에서도 호연에게 끌렸다.
물론 눈앞에 살아있는 증거인 이비현이 있으니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잠깐, 아버지가 특수안보부 소속 연구원이라고 하지 않았어?”
“당시에는 현장요원이셨죠. 나중에 균열 발생 이후에는 연구원으로 가셨고요. 아버지는 각성자가 아니셨거든요.”
이비현의 말투에서, 한건우는 힌트를 얻었다.
“어머니는 나중에 각성하셨다는 건가. 그렇다면 몸의 이상이라 느낀 건 각성 전조증세였군.”
“맞아요.”
이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성하기 전, 혁명을 위한 마지막 임무였어요. 총통 관저를 폭파하는 임무였죠.”
“....”
“그런데 누군가 밀고를 했는지, 함정이 있었고···. 어머니는 결국 정부군에게 붙들렸어요.”
이비현의 얼굴이 괴로운 듯 찌푸려졌다.
“외국인이더라도 반정부 세력에 협조하면 재판 없는 총살형을 당하는 분위기였대요. 그런데 그때.”
위험천만한 상황을 얘기하던 중.
이비현은 갑자기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이 이야기를 해줄 때의 표정이 그랬을까?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하러 나섰어요. 모든 매뉴얼과 수칙을 무시하고··· 다 포기하고 나섰던 거죠.”
“대단하군.”
한건우의 감탄은 진심이었다.
내부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기 때문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특수안보부 블랙 요원 출신으로, 비각성자이면서 연구원까지 자리잡았다면.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내부에서 실무와 지식을 고루 인정받던 인재라는 뜻이었다.
특수안보부의 가치관은 싫어도, 그들의 개인적인 능력은 인정했으니.
“처음에는 무사히 빠져나가는 줄 알았대요. 그런데 군인들이 계속 몰려들면서, 두 분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고···.”
이비현이 말을 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 일이 일어났다.
대격변, 신세기, 제로 그라운드.
여러 가지 거창한 별칭으로 불리지만, 간단히 말하면 이거였다.
‘균열 발생’.
그때 지구상에 살아 숨쉬는 생명체 중에 삶이 바뀌지 않은 이가 없었다지만.
이비현의 부모님은 조금 특별한 케이스였다.
“바로 앞에 균열이 터졌어요. 어머니가 이계의 기운을 맞고
각성하면서 <이속> 특성을 개화했죠.”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이속 특성이라.”
“네. 보통 사람 같으면 바로 도망갔을 텐데, 어머니는 좀 유별나셨어요.”
“그럼?”
“총통 관저에 설치하려던 폭탄. 그 기폭장치에 불까지 붙이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자리를 빠져나왔대요.”
“...정말 대단하셨군.”
한건우는 그녀를 인정했다.
당시 사람들은 각성자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를 때였다.
그것도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 스스로의 변화에 바로 적응하고, 그걸 응용해서 목적까지 달성하다니.
대단하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아버지는 한국으로 복귀하셨고, 그때 몸을 숨겨야 하는 어머니를 데려오셨죠.”
“누가 밀고했는지 모르니 떠난 것이군.”
“맞아요.”
중요한 일을 해내고도, 그 결과를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몸을 피해야 하는 처지라니.
그 속이 어떠할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그 후로는 한국에서 지내신 건가?”
“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주시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집에서 몰래 숨어서 지냈어요.”
주민등록 전산망에 접근해서, 존재하지 않는 허무인을 만들어내는 일.
과거 해커였던 이비현의 아버지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초기 각성자인데 숨어서 지냈다니. 어려움이 많으셨겠군.”
“맞아요. 그리고 곧, 음··· 제가 태어났고···.”
이비현은 살짝 민망한 기색이었지만,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다.
여기까지 듣기에는 조금 스펙타클한 연인의 사랑 이야기일 뿐.
비극의 전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해피 엔딩으로 끝날 것만 같은 이야기였다.
“어릴 적, 전 학교는 다니지 않았지만··· 부모님께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이비현이 추억을 되새기면서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이런 표정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반정부 테러리스트와 특수안보부 요원.
남다른 배경을 가진 부모지만, 딸에 대한 사랑은 보통 사람들과 같았다.
그들은 애정의 결실인 외동딸을 진심으로 아꼈다.
“어머니께 외국어를 배우고, 같이 사회학이나 인류학 원서와 논문을 읽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간단한 전투 기술과 해킹을 가르쳐 주셨구요.”
“흠··· 어릴 때라고 하지 않았어?”
한건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아홉 살 때까지요.”
“....”
이비현은 행복했던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 참. 이런 조기교육은 처음 들어보는군.’
거의 정보조직의 리더를 키우는 제왕학 교육이나 다름 없었다.
‘10대 후반의 나이부터 미등록자 조직의 리더를 맡은 것도 우연은 아니었군.’
가끔 이비현을 보면서 수수께끼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이제 그녀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리고는···.”
이비현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난생처음으로, 두 분의 의견이 부딪쳤어요.”
“처음?”
“네,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두 분이 싸우거나, 작은 갈등이라도 빚는 걸 본 적이 없었어요. 아마 항상 한쪽이 양보를 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어떤 것 때문에?”
부부끼리 싸우는 일이라면, 자녀 교육이나 금전 문제일까.
한건우의 상상력은 그런 쪽으로는 상당히 빈약했다.
그러나 누구라도 이 문제의 답을 맞출 수는 없었으리라.
이비현이 깊이 한숨을 쉬고, 회한을 담은 눈으로 한건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각성자 등록 시스템 때문에요. 그때 막 한국 정부에서도 도입하려고 준비 중이었죠.”
“....”
한건우의 눈빛도 어둡게 가라앉았다.
“저는 부모님의 대화에 완전히 끼어들지는 못했어요. 두 분이서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빠르게 언쟁을 하시는 바람에···. 하지만 어느 정도는 알아들었죠.”
“?”
“어머니는 그 시스템에 숨어있는 무언가를 세상에 밝히자고 하셨어요. 그게 옳은 길이라고···. 그런데 아버지는 고민하시는 것 같았어요. 바로 저와 어머니 때문에요.”
한건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각 정부의 각성자 등록 시스템에는 모용황과 아르고스의 입김이 닿아있다고 했다.
정확히 어떤 방식인지는, 한건우도 몰랐다.
이비현의 아버지는 그걸 혼자 힘으로 눈치챈 것일까?
“그때였어요. 저한테도 각성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한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