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미래의 기억 (1) - 예지시
“<마아트의 눈물>이군. 그건 왜 가지고 있지?”
한건우가 묻자, 유영원이 수수께끼 같은 답을 했다.
“이제까지 모두 13번입니다.”
“뭐?”
“누군가 제 음식에 자백제를 타려고 했던 게요.”
한건우는 유영원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예지자들에게는 흔한 일이겠지?”
“그렇습니다. 저는 자백제에 면역이 되어 있어요. 그 외에 한건우 씨가 어떤 수를 준비하셨어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유영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무리하지 말고 돌아가 달라는 듯.
단호한 태도였다.
“과연, 정말로 예지 능력을 잃긴 했군.”
“...!”
한건우가 시니컬한 어조로 말하자, 유영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비현은 대화를 따라가지 못해, 불안한 시선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억지로 정보를 얻어낼 생각은 없다. 난 대화를 나누러 왔을 뿐이야.”
“....”
미래를 바꾸어버린 회귀자가, 미래를 보지 못하는 예지자에게 말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비슷한 처지의 두 사람.
“내게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당신이니까.”
유영원이 처음으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한건우는 암흑 균열에서 유영원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사람을 매정하게 뿌리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이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별로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지시>도 힘을 잃었으니까요.”
“그랬지. 암흑 균열에서 나를 만나는 장면. 그게 당신이 본 마지막 예지라고 했었지.”
한건우가 그를 떠보았다.
당시에 <거짓 간파>까지 쓰면서 검증했던 내용이었다.
“그건···.”
유영원의 얼굴에 처음으로 난처한 기색이 나타났다.
‘그래, 이거지.’
유영원의 말대로라면, 더는 유영원에게 얻어낼 것이 없는 게 사실일 거다.
그러나 한건우는 유영원만 생각하면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와중, 유영원은 도피하듯이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한건우가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다면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었어.”
한건우는 천천히 설명했다.
“첫째, 당신은 가사 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내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지.”
“그게 무슨 문제인가요?”
이비현이 한껏 궁금한 기색으로 물었다.
“정말로 그게 마지막으로 본 예지의 장면이라면, 내 이름은 어떻게 안 거지?”
“어···.”
이비현이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든 건 한건우의 추측이었다.
그러나 여러 추측이 얽히자, 점점 한 가지 길을 만들어갔다.
“둘째, 당신은 마수의 알을 보고 이렇게 말했지. <제가 본 미래에서는 깨어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르죠>.”
“!”
한건우의 드래곤이 태어난 마수의 알.
회귀 전에는 깨어나지 않았던 그 알에 대한 이야기.
그 말이 한건우에게 수수께끼를 던졌다.
한건우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유영원이 본 예지시의 시간 흐름이 자신이 거쳐온 시간 흐름과 똑같은 게 아닌가 하고.
그러나.
“셋째, 당신은 이비현을 통해서 내게 마검 스톰 브링거를 전해줬어. 너무나 적절하고 필요한 타이밍에.”
폭풍을 불러오는 그 검이 없었더라면, 아크 리치를 단신으로 쳐부술 수는 없었으리라.
고마운 일이었지만, 한건우의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마치 유영원이 회귀 후의 미래까지 예지로 엿보고 도와준 듯했기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이상했어. 당신은 마수의 알이 부화하지 않는다는 예지를 보았으면서, 목숨을 걸고 위험한 균열에 들어갔어. 그리고 정작 마수의 알의 행방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지.”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 듯, 이비현이 앉은 자리에서 들썩였다.
한건우는 유영원의 무표정한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 균열에 들어가서 나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내 결론이야.”
유영원이 반론하거나 회피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건우가 쐐기를 박았다.
“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야. 아주 작은 단서라도 좋으니, 미래에 대한 힌트를 알고 있다면 말해줘.”
총력을 건 전면적인 결전을 앞두고, 아무런 의문도 남겨두지 않도록.
한건우는 모든 돌다리를 다시 두드려보기로 했다.
이게 유영원을 찾아온 첫 번째 이유였다.
“후우···.”
유영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젊은 나이에 하얗게 세어버린 백발의 머리카락이 유난히 처량하게 보였다.
“...일부러 거짓을 말한 건 아니었습니다.”
한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 간파>를 썼으니, 그건 알고 있었다.
“예지자는 자신이 본 예지를 누설하지 않으려 한다면서? 누설하게 되면 미래가 바뀔 수 있고, 자신의 예지 능력도 희미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상관없지 않나?”
“....”
어차피 예지 능력이 없는 판에, 페널티를 먹을 것도 없지 않냐는 뜻이었다.
그때, 한숨을 내쉰 유영원의 눈빛이 바뀌었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아득한 과거를 돌아보는 것 같기도 했다.
유영원이 품속에서 검은 수첩을 하나 꺼냈다.
가죽 장정으로 된 튼튼한 물건이었다.
[기억의 수첩]
“대장님, 그건···!”
이비현이 깜짝 놀랐다.
무언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 아이템인 모양이었다.
“제 기억의 수첩입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받아쓰고,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해주는 아이템이죠.”
차라락···.
유영원이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겼다.
수첩에는 검은 펜으로 빽빽하게 글씨가 쓰여있었다.
아주 빠른 속도로 뭔가를 휘갈겨 받아쓴 듯했다.
각각의 메모에는 날짜와 숫자가 어지럽게 쓰여있었고, 서로 연결된 화살표와 참조 표시로 복잡했다.
그 화살표와 줄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개기 일식, 아니 금환식. 태양은 완벽한 원을 그린 반지 모양으로 떠 있다>.”
“?”
유영원이 수첩에 쓰인 메모를 읽기 시작했다.
“<거대한 악마의 형상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에 맞서 한 남자가 싸우고 있다. 마치 전쟁의 신과 같은 모습. 남자는 빛나는 창을 휘두르는데, 그 창날은 산맥과 바다를 가를 듯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남자의 손짓에 대지의 거인들이 일어나 싸운다. 지옥의 화산이 폭발한다. 검은 태양을 향해 유성우가 치솟는다>.”
“뭐라고?”
전설이나 신화, 아니면 고대의 서사시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차라락.
유영원은 대답 없이 수첩을 바라보았다.
수첩의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갔다.
“<한 남자가 용을 타고 검을 휘두르며 마물들을 무찌른다. 일전의 그 남자다. 그가 손에 든 것은 마검 스톰 브링거. 이곳은 이계인가? 알 수 없다. 어쩌면 스톰 브링거가 겪을 미래인지도 모른다>.”
차라라라···.
또 페이지가 넘어갔다.
“<비현이가 그 남자를 부른다. 남자의 이름은 한건우. 그는 이계인이 아니었다>.”
“!”
자기의 이름이 나오자, 이비현이 움찔했다.
차라락!
유영원의 시선은 마지막 메모에 이르렀다.
“<어두운 균열 안. 태양처럼 밝은 돌이 빛나고, 수천의 벌레 마물들은 불타 죽는다. 그 남자, 한건우가 나를 노려보며 서 있다>.”
암흑 균열에서의 장면.
그 다음부터는 백지였다.
“그게 <예지시>로 본 장면을 기록한 건가?”
한건우는 어안이벙벙해서 물었다.
“예, 그 중에서 당신이 나오는 장면만 추려서 말씀드린 겁니다.”
유영원은 묘하게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한건우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래, 유영원은 내가 회귀한 후의 미래도 확실히 봤어.’
두 번째 예지.
만주에서 스톰 브링거를 들고 싸울 때의 장면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예지, 금환 일식이 일어난 날의 전투.
그건 아직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었다.
유영원의 예지가 적힌 가죽 노트를 바라보면서, 한건우는 물었다.
“원래 <예지시>라는 게 그렇게··· 확실하게 보이는 건가?”
“아니오, 제 경우는 조금 특별합니다.”
유영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설명을 이었다.
“예지는 꿈과 비슷합니다. 막 깨어났을 때는 선명하지만, 모래가 손바닥에서 빠져 나가듯 점점 흐려지고, 까맣게 잊히기도 하죠.”
“그런가.”
“일반인도 꿈을 매일 기록하기 시작하면, 점점 꿈의 시야가 선명해집니다. 저는 <예지시>를 개화했을 때부터, 기억의 수첩에 제가 본 것을 남김없이 기록해 왔습니다. 그래서 꽤 선명한 예지를 가지고 있었죠.”
“....”
“그런데 바로 이때. 한건우 씨가 첫 등장할 때부터, 예지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 순서도 뒤엉키고, 뒤죽박죽이 됐죠.”
“혹시 첫 번째, 금환일식이 일어날 때의 예지는···?”
한건우가 가장 궁금한 장면에 대해 물었다.
“확신은 없습니다만, 그 일은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지?”
“제가 본 많은 예지들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유영원은 수첩의 옆 부분을 보여주었다.
모서리 끄트머리가 접힌 부분이 무수히 많았다.
“분명히 보았으나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이렇게나 많습니다.”
“....”
한건우가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시간을 거슬러 회귀해 오면서 벌써 많은 사건들을 막았고, 흐름을 바꾸었다.
다른 이들의 운명도 달라졌다.
그 때문에 유영원이 본 예지도 쓸모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건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금환 일식이 일어날 때의 미래. 저건 진짜 일어난다.’
유영원의 예지 중에서 오직, 한건우에 대한 예지는 회귀 후의 미래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도 시간 순서는 거꾸로.
한건우는 유영원의 첫 번째 예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추상적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뜯어볼 여지가 있었다.
- <개기 일식, 아니 금환식. 태양은 완벽한 원을 그린 반지 모양으로 떠 있다>.
가까운 미래에 금환 일식이 일어나는 시간과 장소는 많지 않을 것이다.
당장 이비현에게 부탁해서 찾아보면 되었다.
- <거대한 악마의 형상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에 맞서 한 남자가 싸우고 있다. 마치 전쟁의 신과 같은 모습. 남자는 빛나는 창을 휘두르는데, 그 창날은 산맥과 바다를 가를 듯하다>.
‘창이라면 마창 게이볼그를 뜻하는 게 분명해. 산맥과 바다를 가를 듯하다는 건, 길이가 길다는 뜻이지. <빛의 군주> 특성을 입혔다고 하면 이해가 돼.’
그 다음부터는 추측이 필요했다.
- <남자의 손짓에 대지의 거인들이 일어나 싸운다>.
‘이건 골렘 소환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 <지옥의 화산이 폭발한다. 검은 태양을 향해 유성우가 치솟는다>.
‘....’
어떤 특성을 이용한 공격일까.
저렇게 거창하게 표현한 것을 보면 보통 규모가 아닐 듯한데, 딱 떨어지는 것은 없었다.
한건우는 예지를 기억에 담아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 해도 상당한 수확이었다.
그러나 아직 두 번째 목적이 남아있었다.
이번에는 이비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잠입해서 싸우고 있는 조직, 그 이름은 아르고스야.”
“네.”
이비현은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한건우가 자세한 설명을 피하던 이야기.
그녀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특수안보부를 추적하다 보니, 아르고스라는 조직에 대해 알게 되었지. 바로 그들이 세계에 각성자 관리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도.”
유영원의 얼굴 근육이 꿈틀 움직였다.
“아마도 이게 너희들이 미등록자로 살아가는 것과 관계가 있는 듯한데. 알고 있었나?”
“...!”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유영원이 입을 열었다.
“비현이의 부모님과 관계가 있다고 해야 정확하겠네요.”
이비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제가 직접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
“제 아버지는 특수안보부 소속의 연구원이었어요.”
“!”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