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자백제
“어···.”
어느 누구 앞에서도 말문이 막혀본 적이 없건만.
지금의 한건우는 말문이 턱 막혔다.
높은 곳이라 산소가 희박해서일까?
어쩐지 숨쉬기 어려운 듯한 느낌이었다.
한건우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지만,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
심리적으로는 30대 후반이 아닌가.
한건우의 눈에는 갓 스무 살이 된 이비현이 귀엽게만 여겨졌다.
한마디로 여동생 같았고, 어쩔 때는 은설아와 비슷하게 소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비현이 나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녀는 원래 전임 대장 유영원을 부모처럼 믿고 따랐다.
이제 그 대상이 자신으로 바뀐 것일까?
한건우가 막 대답하려던 참.
푸르르···.
퍼덕!
드래곤이 말처럼 큰 숨을 내쉬더니, 날개를 쳐들었다.
슈우우-
“악!”
예상치 못한 급가속.
한건우는 대답을 못한 채로 넘어갔다.
이비현의 뾰루퉁한 뒷모습을 보고, 한건우는 다른 걸 물었다.
“<그림 리퍼의 사슬낫> 말이야.”
“네?”
이비현이 한건우를 돌아봤다.
“균열에서 악마종을 잡고 얻었다고 했지?”
“운이 좋았어요.”
이비현은 겸손하게 답했지만 속으로 은근히 뿌듯한 듯.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전설급 무구가 나올 정도면 보통 균열이 아니었을 텐데?”
검귀가 쓰던 요검 이페탐, 그리고 염제 신광우가 쓰던 발록의 화염 채찍.
모두 전설급에 속하는 무구였다.
같은 전설급이라도 케파는 조금 낮아 보였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급수라는 게 있지 않은가.
무구 자체가 훌륭한 건 물론이고, 다른 능력도 담겨있을 것이다.
“괜찮았어요. 제가 직접 훈련시킨 솜브라의 각성자들과, <홍염>의 최정예가 함께 공략했거든요.”
“홍염?”
간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만주에서 함께한 게 1년 전이던가.
그때 홍염은 이미 10위권 길드였고, 지금은 라이벌이던 <기사단>과 함께 더욱 가파르게 성장 중이었다.
둘 다 ‘친 아레스’ 계열로 통하기도 했다.
“네, 홍염의 길드 마스터 홍가영 씨도 왔고요.”
이비현이 그쪽과도 관계를 맺고 있는 줄은 몰랐다.
“멤버가 쟁쟁했군.”
“그렇죠.”
새삼 변화상이 느껴졌다.
미등록자가 균열에 들어가 공략한다는 것.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이제는 각성관리청에서도 눈감아 주고 있었다.
그만큼 미등록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도 했고, 자정 작용도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비현이 미등록자 범죄 조직을 쳐부수면서 통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특하긴 했지만.
한건우는 의문이 들었다.
“왜 굳이 악마종 균열에 들어갔어? 은신도 잘 안 먹히고 상성이 안 좋았을 텐데.”
홍염의 길드 마스터, 홍가영의 힘을 빌린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악마종에 대항할 수 있는 화염 법사니까.
그런데 암살자인 이비현은 꽤 고생했을 것이다.
이비현은 갑자기 풀이 죽어서, 뜻밖의 대답을 했다.
“...<연옥경>을 구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악마종의 균열에서 직접 얻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결국 이번에도 안 나와서 얻지 못했지만요.”
아무래도 악마종 균열에 한두 번 들어간 게 아닌 듯했다.
연옥경.
한건우도 이름만 들어본 희귀한 아이템이었다.
비전투 아이템이라 한건우의 관심 밖에 있는 물건이었다.
“꼭 직접 균열에서 얻어야 해? 얼마든 좋으니 사 줄게.”
한건우는 이제 부호, 재벌이라는 호칭으로도 부족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걸어다니는 다국적 기업 수준.
무엇을 사들일 때도 가격표를 보지 않고, 오직 필요성과 품질로만 판단했다.
길드의 전속 계약 대상이자, 한건우의 최측근인 이비현.
그녀가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갖고 싶어하는 물건이 있다면, 그 정도는 사줄 용의가 있었다.
이비현은 살풋 웃었다.
“귀속 아이템이고, 횟수도 제한되어 있어서요. 한 번 균열에서 발견되어서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면 거의 끝이에요. 이건 직접 구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군.”
귀속 아이템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귀속되는 아이템.
아이템과의 종신 계약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귀속 아이템은 횟수 제한이 있었고, 사용 횟수가 끝나면 파괴되었다.
한 번 귀속을 수락하면, 아이템을 남에게 줄 수도 없었고, 잠깐 사용하도록 빌려주는 것도 불가능했다.
귀속 아이템을 남에게 넘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소유주가 사망하는 것이었다.
‘마리아 베르타의 <일렉트릭 건 스톤>도 귀속 아이템이었지.’
회귀 전의 이비현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템을 가진 상대를 알아내서 죽여서 빼앗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당장 아이템을 구하는 데에는 제약이 있었다.
‘잠깐, 그런데 연옥경이라는 아이템이 무슨 용도였더라?’
한건우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죽은 사람과 관련이 있는, 어딘가 수상한 아이템이라는 기억이었다.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연옥경은 무슨 일로 쓰려고?”
“....”
이비현이 다시 입을 다물려고 했다.
또 비밀스러운 부분인 건가, 하던 차였다.
하늘부터 땅까지, 다른 사람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는 드래곤의 등 위.
그녀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연옥경은···. 죽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이에요.”
“음.”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한건우는 반박하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진짜 이름처럼 연옥에 있는 망자와 연결되는 건지, 아니면 각성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파편을 그럴싸하게 짜맞추는 건지. 그건 저도 써보지 않아서 알 수 없어요.”
“누구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한건우가 물었다.
“네.”
“그게 누구인데?”
“도착하면 말씀드릴게요. 우리, 유영원 전임 대장님을 만나러 가는 거죠?”
“맞아.”
한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유영원이 보인 행보는 심상치 않았다.
파고들수록 무언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범죄자나 도망자도 아닌데 미등록자 조직의 리더였지. 암흑 균열에 들어가 실종되어 있던 것도 미심쩍고···.’
그뿐 아니었다.
아크 리치와 싸울 때, 이비현이 유영원의 <스톰 브링거>를 타이밍 좋게 건네주지 않았다면.
싸움의 결과는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영원은 그 후로 티 나게 한건우를 피했다.
의도적인 행동처럼 보였다.
이비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일본 지부로 가더니, 한국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매우 희박한 가능성이겠지만.
한건우는 한 가지 추측도 마음속에 떠올랐다.
‘설마, 유영원도 나와 같은 경우인가?’
시간을 거슬러 온 회귀자.
강한 의지와 목적만 있다면, 엄청난 기회와 보상을 독식할 수 있는 자.
한건우와 똑같은 방법은 아니더라도, 방대한 시스템 속에 어떤 히든 루트가 또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드래곤이 날개 각도를 바꾸어,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구름 알갱이 속으로 들어갔다 빠져나오자 시야가 트였다.
‘도쿄.’
서울과 닮은 대도시의 전경이 보였다.
슈우우-
드래곤이 날개를 접어 급강하했다.
*
마천루 꼭대기.
나뭇가지에 맹금이 내려앉듯이, 드래곤이 발톱을 걸고 앉아 있었다.
드래곤이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불시에 구름을 뚫고 나타난 거대한 드래곤의 위용에, 도쿄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대피 경보가 울릴 뻔하기도 했다.
곧 한국의 랭커, 한건우의 드래곤임이 확인되면서,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생방송으로 드래곤의 고화질 영상을 내보내려는 방송인과 기자들이 달려와 북새통을 이루었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PBS 재팬에서 알려드립니다. 지금 이 모습이 믿어지십니까?」
「여기는 동경경제TV, 생방송으로 전해드립니다!」
처억!
드래곤이 고개를 당당하게 쳐들고 날개를 쫙 폈다.
「오오!」
「대단합니다. 과연 믿기지 않는 광경!」
「아레스 길드의 마스코트, 보라색 드래곤! 대관절 무슨 일로 이 땅을 찾은 것일까요?」
‘어휴.’
한건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드래곤이 관심을 너무 좋아해서 큰일이었다.
‘지윤이는 어릴 때 저러지 않았는데.’
그와 이비현은 이미 조용히 지상에 내려와 있었다.
그들은 망토 후드를 눌러쓴 채 구경꾼들에 섞여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드래곤을 데려오려다가는, 괜히 눈에만 띌 판이었다.
‘잘 있다가 따라오겠지.’
여하튼 한건우가 말한 몇 가지 원칙만 지켜준다면.
크게 거리낄 것은 없었다.
‘민간인을 해치지 말 것. 모르는 사람 앞에서 인간으로 변하지 말 것.’
드래곤이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한건우가 많은 주의를 기울여 키우기는 했지만.
단체로 안전불감증에 걸린 듯한 도쿄의 시민들은 놀랄 노자였다.
‘길드의 마스코트는 또 뭐야?’
호들갑을 떠는 게 도통 한건우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한건우는 이비현의 안내를 따라 솜브라의 도쿄 지부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대로변 안쪽, 고즈넉한 골목길.
서울 솜브라 본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건물이 있었다.
3층의 낮은 건물.
건물 벽에 그려진 서투른 낙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큰 마당.
그리고 구석에 놓여진 아이들 놀이기구.
‘뭐야 이건. 보육원?’
예상치 못한 그림에 한건우는 조금 당황했다.
그때 유영원이 그들을 맞으러 나왔다.
“오랜만입니다, 한건우 플레이어. 도쿄 시민들이 많이 놀랐더군요.”
유영원이 웃으며 그들을 맞으러 나왔다.
그는 은퇴한 직장인처럼 편안한 얼굴이었다.
차림새나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졌다.
지부 운영 일만 맡을 뿐, 플레이어 생활을 안 한 지 오래되어 그렇다기에는···.
“대장님, 완전히 유치원 선생님이 다 되셨네요.”
이비현이 콕 찝었다.
한건우가 생각하던 게 바로 그거였다.
“비현이 너는 얼굴이 좋아졌네. 난 애들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라.”
그때 무릎을 조금 넘을까 하는 어린애들이 우르르 뛰어와 유영원의 다리에 매달렸다.
「원장님!」
「손님 오셨다!」
「안녕하세요.」
올망졸망한 어린아이들이 배꼽 인사를 했다.
이비현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유창한 일본어로 말했다.
「들어가서 선생님들하고 놀고 있어, 알겠지?」
「네, 누나.」
건물 안에서 젊은 여자가 다급히 뛰어나왔다.
아마 보육원의 선생님인 모양이었다.
「어머, 애들아. 안으로 들어와야지. 선생님이랑 간식 먹··· 헉!」
그 여자는 한건우를 보고, 귀신이라도 본 듯 멈춰섰다.
한건우는 뭔가 해서 여자를 바라보았다.
“!”
한건우는 한 번 본 얼굴은 쉽게 잊지 않는 편이었다.
젊은 여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대마도에서 본 여자군. 검귀가 막 베려고 했던.’
- 나의 요검은 3일에 한 번은 사람을 베어야 날이 유지되지.
검귀의 광기 어린 중얼거림을 들으며, 눈물 콧물을 쏟으며 체념하고 있던 여자였다.
그 여자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한건우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과 한건우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한건우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녀들의 운명은 뻔했다.
요검 이페탐의 희생물이 되던지, 검귀의 부하들에게 죽던지.
어느 쪽이든 살아서 고향 땅을 밟을 수 없었을 여자들.
그때 구출한 여자들은 이비현이 끝까지 책임지고 배에 동승해서 보호해주었던 기억이 났다.
‘일본에 데려다준 게 끝이 아니라, 지금까지 일자리를 주고 보호하고 있었군.’
한건우는 새삼 이비현을 다시 보았다.
어쩌면 목숨을 살려주는 것보다 더 까다롭고 어려운 일. 남의 미래를 책임지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별다른 힘은 없지만··· 할 수 있는 한은 꼭 보답하겠습니다!」
“뭘요. 잘 지내주시는 것만 봐도 다행입니다.”
통역 스킬로 전달되는 말을 듣고, 여자는 감격한 나머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머리가 땅에 닿겠다 싶을 정도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한건우는 유영원을 돌아보았다.
그도 마찬가지.
의뭉스럽고 비밀스러운 남자인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영원은 그들을 2층의 원장실 팻말이 붙은 방으로 안내했다.
소박한 사무실 같은 모양새였다.
“제가 비록 <예지시>는 잃었지만, 한건우 씨가 무슨 일로 오셨는지 맞춰볼까요.”
유영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니죠, 어떤 걸 갖고 오셨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유영원이 캐비넷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물약 형태의 섭취형 아이템.
한건우는 그것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마아트의 눈물]
“?”
바로 특수안보부에서 애용하는 자백제였다.
한건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