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말할 수 없는 비밀
소소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평소와 달리 무언가 미련이 남은 듯.
그녀는 한건우를 슬쩍 돌아보기도 했다.
소소가 그렇게 가 버리고 나자, 이비현이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비현은 소소가 사라진 방향을 놓치지 않고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매가 사냥감을 쫓는 암사자처럼 매서웠다.
한건우는 그녀의 새각을 알 것 같았다.
“왜 놓아줬는지 불만이지?”
“저 여자가 한건우 씨를 공격했잖아요. 그런데 왜 살려 보내죠?”
이비현은 아직도 무법지대에서 살던 야생의 감각이 남아있었다.
자신이나 동료를 먼저 공격한 자는 반드시 죽여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후환이 되기 마련이다.
바로 그 원칙이 그녀를 지금까지 살아남게 했다.
물음표가 가득 띄워진 이비현의 얼굴을 보고, 한건우가 말했다.
“맞긴 한데, 아니기도 해.”
“네? 저 여자가 정신 조종이라도 당했다는 건가요.”
“음···.”
모용황이 그녀의 몸에 강림해서 공격한 것이니.
어느 정도는 사실과 가까운 추측이었다.
이비현은 원래 질문이 없는 편이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성격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한건우의 안위가 달린 일이었다.
“저 여자, 예전부터 감이 안 좋았어요.”
“그렇긴 하지.”
“아무리 파고들어도 정체를 알 수 없고, 꼭 뱀 같기도 하고요.”
“정체? 소소의 뒷조사를 더 해봤어?”
한건우는 처음에 소소를 알게 되었을 때, 솜브라를 통해 그녀의 신원을 캐봤다.
그녀는 서로 다른 3개의 국적과 신분을 가지고 천망과 특수안보부, 일본의 야쿠자 조직에 모두 소속되어 있었다.
그외에는 모조리 비밀에 싸여 있었다.
거기서 포기하고 그친 줄 알았더니, 꿋꿋이 계속 조사한 모양이었다.
이비현은 살짝 민망한 듯 멈칫했다가,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한건우 씨가 옆에 두어도 될 사람인지, 당연히 끈질기게 조사해야죠!”
“더 나온 게 있어?”
“아뇨, 하지만 그게 더 이상해요. 일부러 흔적을 지우며 살고 있다는 건데.”
“그렇군.”
“죽이면 안 되나요?”
이비현은 간만에 암살자의 시선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비현이 이렇게 누군가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건 오랜만이었다.
원래는 차은비와 앙숙이었는데, 요새는 사이가 많이 개선되었다.
그래봤자 으르렁거리지 않고 소 닭 보듯 하는 정도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돌리는 걸로 넘어가지 않겠군.’
한건우는 잠시 고민했다.
한건우는 아직 아무에게도 <아르고스>라는 조직에 대해서 터놓고 말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이비현에게조차.
모용황의 정체도 마찬가지였다.
세계를 지배하는 각성자 조직, 아르고스의 창시자이자 첫 번째 주인.
중국 정보조직 천망의 지배자이자, 모용세가의 59번째 가주.
한건우가 회귀 전에 겪은 끔찍한 세상을 만든 원흉이자, 한건우가 이겨야 할 마지막 적수.
‘자세히 알수록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비현은 한건우가 어떤 강한 각성자 무리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석판’에 대한 이야기도, 만주와 아프리카, 남미에서의 싸움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 돌아보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아르고스라는 이름만 모를 뿐이지. 사실상 알 건 다 안다고 봐야 하나?’
이번에 남미에서도 느꼈다.
어차피 한건우가 솔로 플레이를 하는 게 아닌 이상, 동료들은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게 되어 있었다.
한건우가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걸 겪고 나니, 한건우의 심경이 조금 변했다.
‘알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는 알려야겠군.’
만주에서 천망과 특수안보부의 합작 음모를 밝혔을 때에도.
어쩌면 발을 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동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한건우를 따라와 주었다.
이미 한건우의 주변인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비현에게서 들을 말도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이비현도 한건우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사실 정말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왜 미등록자가 되었는지.
각성자 시스템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으며, 한건우가 등록 각성자가 되는 걸 말린 건 왜인지.
부모님이 그것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건 무슨 말인지.
무언가 트라우마와 관련되어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곤 했다.
‘서로 비밀이 많군.’
한건우는 이비현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게 딱 두 가지 있었다.
한건우가 15년을 회귀해서 돌아왔다는 사실.
그리고 회귀 전 그녀를 죽여서 <그림자 맹시> 특성을 흡수했다는 것이었다.
한건우가 사슬낫을 돌려주며 말했다.
“비현아. 내일 시간 돼?”
“엇? 그게··· 아, 그럼요!”
이비현은 어쩐지 허둥지둥했다.
“잠깐 얘기 좀 하게.”
*
푸르르···.
드래곤은 못마땅하게 고개를 돌렸다.
“말 들어야지?”
한건우가 날개죽지를 두드리자, 드래곤은 반항을 그만두고 순순히 날개죽지를 내려주었다.
“방향은 동쪽. 일본 도쿄로 갈 거야.”
드래곤이 제자리에서 날개를 쳤다.
강한 힘줄과 근육이 정교하게 움직이며, 범선의 돛처럼 큰 날개를 펼쳤다.
펄럭- 휘유우우-
세찬 돌풍이 일어났다.
한건우는 먼저 드래곤의 위에 올라탔다.
“포털을 타고 가도 되는데요.”
이비현은 망설였다.
잠깐 얘기를 하자더니, 한건우가 말한 목적지는 일본.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유영원 님을 만나러 가는 걸까?’
이비현의 대부와도 같은 유영원.
그는 예지 능력을 잃고 솜브라의 리더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 이비현의 부탁으로 솜브라의 일본 지부를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가 드래곤을 타고 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번 만주에서, 차은비와 셋이 이동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이비현은 아직 비행 마수가 익숙하지 않았다.
한건우가 손을 내밀었다.
“구름 위로 올라가면 안 무서워.”
한건우가 그녀를 무릎 사이에 앉혔다.
“...오래 걸리지 않겠죠?”
“꽉 잡아.”
피유우우우-!
드래곤은 수직으로 발사된 미사일처럼 솟구쳤다.
투두두두···.
구름을 뚫고 나가는 듯.
얼음 결정이 드래곤의 단단한 비늘을 때렸다.
“악.”
이비현은 온몸의 모공이 쭈삣 서고, 눈앞이 아찔했다.
주위 기온이 뚝 떨어져, 그녀의 속눈썹에 서리가 맺혔다.
그녀는 비명도 못 지르고, 한건우의 품에 파묻혔다.
슈우우-
드래곤이 여섯 개의 날개를 넓게 펴고 속도를 낮추었다.
앉은 자세가 수평이 되면서 제법 안정적으로 되었다.
한건우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이비현에게 속삭였다.
“비현아, 아래를 봐봐.”
“아, 안돼요.”
한건우가 피식 웃었다.
“괜찮아, 눈 떠봐.”
“...!”
이비현이 힘겹게 눈꺼풀을 올렸다.
그녀의 큰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래에는 온통 새하얀 뭉게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보송보송한 솜 같은 구름 위에 천사가 뛰놀 듯했다.
그녀는 아래에 펼쳐진 솜사탕 같은 구름을 보고 아이처럼 감탄했다.
“너무 예뻐요.”
구름 사이로 새파란 바다가 보이기도 했다.
이제 이비현은 높이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드래곤은 완연히 속도를 낮추었다.
여러 겹의 날개를 순서대로 부드럽게 펴고 접으면서, 부드럽게 앞으로 향했다.
마치 열기구를 타고 나는 것 같았다.
‘이제 터놓고 말을 해볼까.’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려나.
한건우가 말을 고르던 참이었다.
이비현이 그를 홱 돌아보았다.
“한건우 씨, 이번에 멕시코 가신 일이요.”
“응?”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을 참아온 듯한 기세였다.
그녀의 눈망울에 미묘한 원망이 담겨있었다.
“엄청나게 위험하고··· 다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면서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약간 과장이 섞여있는 것 같았다.
“전 그 말을 듣고··· 스스로에게 정말 화가 났어요.”
“...왜?”
얼마나 놀랐는지, 라고 하면 이해할 만했다.
화까지 날 건 또 뭔가.
“제가 없는 자리에서, 한건우 씨가··· 혼자서···.”
이비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혼자서 죽을까봐?”
“...그래서 한건우 씨를 따라갈걸 하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그걸 왜 후회하지?”
한건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기가 빠진 작전이 알고 보니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위험했다고 하면.
보통은 안 가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한건우 씨, 지금 일부러 그러시는 거예요?”
이비현이 톡 쏘듯이 말했다.
그녀의 붉은 눈가에 물기가 어려 있어서, 한건우는 당황했다.
[아빠는 바보야.]
묵묵히 듣고 있던 드래곤까지 전언으로 한 마디 보탰다.
“?”
[아빠, 이제까지 여자친구 한 번도 안··· 못 사귀어 봤지?]
‘으음···.’
뼈아픈 팩트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세상 물정 모르는 드래곤이 알아챌 정도라니.
‘요새 설아랑 같이 드라마 같은 걸 보더니만.’
주말 저녁마다 은설아와 드래곤이 눈을 반짝이며 소파 앞에 옹기종기 앉아있곤 했다.
그런 모습이 제법 귀여워서 친하게 지내게 두었다.
그렇게 쌓은 간접 경험이 한건우를 공격할 줄이야.
회귀 전 35살까지 살면서.
한건우는 오직 훈련과 전투에만 매진했다.
그 밖의 인간관계는 상당히 협소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여동생 지윤이, 그리고 이능력 특수전단의 동료와 부하들.
작전을 나가면서 안면을 튼 용병들이나 거래처 정도.
아주 건수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도저히 여자를 만날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인생은 어떤가.
다시 인생을 새로 쓰면서, 한건우의 발은 상당히 넓어졌다.
쟁쟁한 대형 길드의 마스터와 유명 각성자들은 물론이고.
군 소속 각성자들, 용병대장들과 암흑에 묻혀 있던 미등록자들.
각성자와 관련된 연구원과 장인들까지도.
또 각성자에 한정되지도 않았다.
한국의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정치인과 재벌.
각성관리청장 같은 고위 관료들.
문철민 기자를 비롯해서, 언론과 방송계의 사람들까지.
한국 안에서만 따져도, 나라를 움직이는 주요한 인물들은 대부분 알고 지냈다.
한 다리만 건너도 다 연결될 정도였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한건우에게 조금이라도 다가오기 위해 각축을 벌일 정도였다.
‘이런 게 인맥이라는 거겠지.’
한건우는 이제 말 한 마디로 법과 정책을 바꿀 영향력이 있었다.
행보 하나로 수백, 수천만 명을 놀라게 할 수 있었다.
그런 위치가 되고 나니, 자연스럽게 한건우에게 접근하려는 여자도 많았다.
유명한 가수나 배우가 파티에 초대장을 보내오기도 했고.
미모로 유명한 각성자가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장관이나 재벌 회장이 자기 딸을 은근히 소개하려 들기도 했다.
그런데 혼자 지내는 게 습관이 된 건지.
한건우는 아무에게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런 한건우 옆에, 계속 이비현이 있었다.
그가 한번은 자기 손으로 죽였던 여자였다.
“한건우 씨, 정말 제 마음을 모르세요?”
이비현의 검은 눈동자에 급기야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