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183화 (183/238)

#183그 자리에서 내려와라

「이 노인이 자네를 지나치게 특별 대우했던가?」

소소의 몸을 빌려서, 모용황은 섬뜩하게 웃었다.

두우웅-!

“크윽!”

위에서 아래로.

전신을 내리누르는 압박이 가해졌다.

숨이 턱 막혔다.

「그게 자네를 이토록 오만하게 만들었던가?」

모용황에게서 풍겨나오는 기운은 압도적이었다.

본체로 나타나지 않아 약해져 있을 텐데도.

인간이 아니라 대자연을 마주한 듯한 먹먹함이 느껴졌다.

‘모용황의 능력, 모든 물질을 지배하는 권능.’

한건우의 무릎을 꿇리려는 듯했다.

‘아하.’

한건우의 몸을 둘러싼 한 겹 공기가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졌다.

모용황은 한건우를 깔아뭉개려는 것 같았다.

순순히 무너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모용황은 물질을 지배하는 권능을 가졌다고 했지.’

만물의 원소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힘.

도무지 바닥이 짐작되지 않는 강대한 마력.

마치 인간의 힘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드넓은 바다 같았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한낱 인간이고, 자기와 같은 각성자인데.

다른 이에게 압도당한다는 게 처음에는 열패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덕분에···.”

「?」

아직도 그를 압도하는 적이 있다는 게.

더 올라갈 길이 보인다는 게.

“살아있는 기분이 나.”

한건우는 모용황의 황금색 눈을 노려보았다.

[특성 중첩 : 암흑의 별]

[특성 중첩 : 그래비티 필드]

한건우의 왼손에서 죽어가는 별의 냉기가 피어올랐다.

오른손에서는 강한 중력장이 공간을 왜곡하고 있었다.

위이이이-

츠즈즈···.

허공에 작고 검은 점이 생겨났다.

물질을 흡수하는 블랙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모용황이 만들어낸 묵직한 공기가 순식간에 흑점으로 빨려들어갔다.

공기가 가벼워지고, 호흡이 편해졌다.

한건우는 곧바로 반격을 준비했다.

[특성 발동 : 죽은 자의 날]

쉬이이익-

철컥! 처컥!

한건우의 주위 공간에 수백 개의 검은 총신이 튀어나왔다.

크고 작은 총구가 전방의 상대를 둥글게 포위했다.

“자칫하면 소중한 손녀가 벌집이 되겠군.”

「허.」

모용황의 금안에서 광채가 났다.

그가 미소지었다.

절세 미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손녀의 얼굴로, 노회하고 현명한 노인이 소리없이 웃었다.

「각성자 한건우, 자네를 인정하네.」

“?”

「자네는 마치··· 아주 먼 옛날, 젊은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군.」

모용황의 금색 눈에 회한이 담겼다.

노인의 추억에 함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자신을 모용황과 비교하다니 거부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과장된 말투도 의아했다.

‘아주 먼 옛날?’

모용황의 본체가 쪼그라든 늙은이인 건 사실이지만.

그가 젊을 때라고 하면 기껏해야 수십 년 전이 아닐까.

그런데 마치 전설을 이야기하는 듯한표현이었다.

조금 위화감이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인정하네.」

“무엇을 말이지?”

「자네를 먼저 만났다면, 사도가 아니라 주인의 자리를 주려 했을 거야.」

“....”

「자네는 자네의 정당한 몫을 요구할 뿐. 무리한 제안은 아닌 거야.」

‘좋아.’

한건우의 예상보다 설득이 빨랐다.

사실 모용황으로서는 손해볼 것 없는 제안이었다.

자기가 부리던 사도가 잡다한 세력을 정리하고 통일한다면?

게다가 사회에 혼란이 아닌 안정을 가져온다는 걸 증명한다면?

이미 아르고스의 주인은 명목상 5강 체제에서 3강 체제로 변했다.

그러나 한건우의 제안은 그 이상을 노리고 있었다.

한건우가 모용황에게 요구하는 건 단순했다.

- 다른 주인들과 싸워서 이기는 걸 눈감아 달라. 그리고 1인자와 2인자로 구성된 2강 체제로 가자.

이 요구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2강 체제는 오래 지속된 적이 별로 없었다.

힘은 고르게 나눠지지 않는 법.

결국 아귀다툼을 거쳐 한 명의 제왕이 모든 것을 가지고, 또다시 역성혁명을 반복하기 마련이었다.

모용황도 혜안이 있는 자였다.

한건우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노릴지 모른다는 건 당연히 계산하고 있을 터였다.

‘중요한 건, 내 깜냥을 어느 정도로 보느냐겠지.’

한건우가 2인자 자리에 만족할 거라고 생각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다만 불리한 정황이 조금 많았다.

한건우는 항상 1인자의 자리를 추구해왔다.

권력을 나눠주기는 했지만, 그건 오직 위에서 아래로.

자신을 도와주는 동료나 부하에게 분배한 것에 불과했다.

‘내가 걸어온 길을 잘 알고 있을 텐데.’

한건우가 불길한 느낌을 받을 무렵.

「다만, 자네가 모르는 것이 있네.」

“....”

「내가 자네의 행동을 인정한다면, 혹은 방관한다면. 그건 다른 주인들이 보기에는 결코 중립이 될 수 없다는 거야. 모두 자네가 아닌 나를 공격하려 들 걸세.」

한건우는 씩 웃었다.

모용황이 왜 자신을 닮았다고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쪽도 생각이 많은 편이군.’

막대한 힘을 가지고, 정보 우위에 서 있으면서도.

모용황은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한건우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도 행동보다 생각이 먼저인 타입이었으니까.

노회한 모용황은 한 술 더 떴다.

마치 시간 제한 없는 바둑을 두는 것처럼.

수 하나를 놓을 때마다 많은 것을 따지고 또 따졌다.

한건우는 그런 모용황을 도발했다.

그가 머리로 생각하기보다, 감정에 휘둘리게 만들고 싶었다.

“그게 두렵나?”

「뭐라고?」

“싸우는 게 두렵다면,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라.”

소소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몸의 통제권을 완전히 모용황에게 빼앗긴 듯.

겉가죽 말고는 온통 모용황이 되어 있었다.

한건우가 시동어를 걸듯이 말했다.

“디아 드 무에르토스.”

파직-

<죽은 자의 날>의 무수히 많은 총신에 동시에 마력의 불꽃이 점화되었다.

마력 탄환이 발사되려는 순간.

콰지지직!

분노한 모용황이 주먹을 쥐었다.

그가 수백 개의 총신을 동시에 우그러뜨렸다.

우드드···. 콰지직!

검은 총신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엿가락처럼 휘어져 매듭이 지어지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화안금정>이 전에 없이 강한 빛을 발했다.

거의 김도경의 파괴 광선에 버금갈 정도였다.

세상 모든 것을 해석하는 황금빛의 광채가 한건우를 훑었다.

열기와 함께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나 거기까지.

소소의 몸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강한 권능과 특성을 연이어 사용한 탓에, 그녀의 육신이 반동을 받기 시작했다.

“흐윽···.”

소소의 입술에서 원래의 목소리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녀의 코와 입가에서 선혈이 흘렀다.

금안이 아닌 반대쪽 눈에는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그 기세는 한풀 꺾여, 차분해져 있었다.

「각성자 한건우.」

“그래.”

「자네는 이제 아르고스의 첫 번째 주인, 모용황의 사도가 아니네.」

“....”

사도의 자리를 박탈한다는 것.

아르고스에서 파문한다는 이야기일까?

이제까지 아르고스에서 제 발로 나가려 한 자는 한 명도 없다고 들었다.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가 포기하려 하겠는가.

다만 윗선에서 파문을 결정하는 경우는 있었다.

그때, 파문은 곧 처형을 뜻했다.

하지만 모용황은 한건우의 처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직접 증명해 보게. 다른 주인들의 위에 올라서고, 다른 주인들과 같이 예언 석판을 가져온다면···.」

“....”

「그래, 그때는 자네도 주인으로 인정할 수 있겠지.」

“!”

설득이 성공한 것일까?

금안이 희미해졌다.

모용황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

소소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관절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한건우가 그녀의 등을 받쳐 들었다.

“이봐.”

한건우가 인상을 썼다.

소소의 입가에서 피가 한 줄기 흘렀다.

모용황의 눈과 목소리만 옮기는 것은 괜찮을지 몰라도.

그의 꼭두각시가 되어 특성과 권능까지 부리는 것은 큰 무리였던 모양이다.

“나 참.”

한건우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힐링 포션을 꺼냈다.

남미에서 다녀와 아직 정리를 하지 않아, 포션 하나가 남아 있었다.

포션의 뚜껑을 날리고, 그녀의 입에 들이붓고 있는데.

터엉-

콰아-

“?”

집무실 문이 부서졌다.

길드 건물은 웬만한 각성자 공격에는 버티게끔 되어있었다.

그 문이 유리조각처럼 부서진 것이다.

화아악-

한건우에게서 <아그니의 화염>의 불꽃이 피어났다.

문답무용. 침입자를 공격하려던 찰나.

“어?”

“한건우 씨?”

이비현이 커다란 낫을 들고 문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평화로운 한건우의 모습을 보고 벙찐 얼굴이었다.

“나도 오랜만에 반갑긴 하지만, 이럴 정도는 아닌데.”

이비현의 시선이 한건우의 품에 안겨서 쓰러져 있는 소소에게 향했다.

그녀의 눈초리가 새침해졌다.

꼭 예전 <그림자 왕> 시절처럼 독기가 흘렀다.

“대체 그 여잔 거기서 뭐하는 거죠?”

“그 무기는 뭐야?”

서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이 오갔다.

이비현은 자신의 새 무기, 대형 사슬낫을 내려다보았다.

“균열에서 악마종을 잡고 얻은 무구에요. 아이템 장인이 조금 개량해줬구요.”

“장영표가? 이리 줘 봐.”

이비현은 자기도 모르게 한건우에게 휘말렸다.

그녀가 한건우에게 사슬낫의 손잡이를 건넸다.

한건우는 쓰러진 소소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사슬낫을 살펴보았다.

치리리리···.

손잡이에 연결된 사슬이 맑은 소리를 냈다.

[그림 리퍼의 사슬낫(전설급)]

“오, 괜찮은데?”

전설급 무구이니 더 볼 것도 없었다.

무게 중심과 균형은 완벽에 가까웠다.

“괜찮은 생각이네. 네가 쓰는 암살자의 무기들, 맹독 시미터와 환도는 지나치게 근접전 위주였어.”

“아···.”

이비현은 아직 얼떨떨한 태도로, 엉망이 된 집무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사슬은 장영표가 추가한 거지?”

“네.”

“잘 했어. 사슬낫 같은 특수 무기는 다루기 힘들지만, 그만큼 상대편 입장에서 대응하기도 까다로우니까.”

“그럴 것 같아요.”

“연습은 많이 하고 있어? 워낙 다양한 무기를 다루니 잘 하겠지.”

“그럼요.”

무기 이야기로 넘어갈 뻔했던 이비현이 앗, 하고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저 여자랑 싸우셨던 것 아니에요?”

그녀는 아마 바깥에서 심상찮은 마력의 파동을 느끼고 급히 뛰어들어온 모양이었다.

이비현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모용황이 휩쓸고 간 자리.

집무실 안은 엉망이라는 말로도 모자랐다.

각종 집기는 물질이 녹아버린 듯 엉겨 있었고, 마력의 파동으로 벽과 바닥에는 쩍쩍 금이 가 있었다.

그 원흉으로 보이는 건 소소였다.

특수안보부에 몸담고 있는 수상한 여자로, 이비현은 그녀를 무척 경계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의심스러웠던 차에, 소소가 한건우를 공격한 것 같았다.

괘씸하긴 하지만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 다음이 문제였다.

그녀를 죽여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한건우가 쓰러진 소소를 품에 안고 포션을 먹이고 있었지 않나.

쓰러진 적에게 포션을 먹인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인질로 잡거나, 고문이라도 하려는 건가?’

혼란스러운 이비현을 뒤로 하고, 한건우는 소소에게 다가갔다.

“이봐, 이제 일어나.”

소소가 힘없이 스르르 눈을 떴다.

그녀의 얼굴은 잠깐 사이에 수척해졌고, 두 눈은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말로는 소중한 손녀라지만. 모용황은 너를 별로 아끼지 않는 모양이군?”

소소는 몸의 지배권을 빼앗긴 동안에도 의식은 있던 듯.

기억은 다 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제법 또렷한 시선으로 한건우를 마주보았다.

한건우가 그녀에게 말했다.

“가 봐.”

“네?”

소소가 흠칫 놀랐다.

한건우가 순순히 놓아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최소한 감금되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다시 부를 때까지 가 있어.”

“네.”

소소가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멈칫거리다가 말했다.

“...모용황 님은 곧 동안거에 드실 겁니다. 그때가 움직이시기에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소소는 한건우를 돕기로 한 것 같았다.

‘뭐, 여러모로 고맙다.’

한건우의 눈은 소소의 목 부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을 타고, 방금 심어놓은 <주시자의 뱀>이 꿈틀거리며 올라가는 게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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