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주인의 자격
처컥!
총기의 격발장치를 당기는 소리가 빈 복도를 울렸다.
“어머나.”
소소가 놀라는 척하며 양손을 올렸다.
그녀의 두 손에서 일어나던 바람이 사그라들었다.
그녀의 오른쪽 눈 역시, 황금색으로 변하려다 다시 원래 빛을 되찾았다.
모용황이 강림하려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내빼는 건가?”
한건우는 그녀의 이마에 총기를 겨누고 물었다.
마리아 베르타가 아끼던 클래식한 네이비 리볼버.
물론 모양만 따왔을 뿐.
강력한 마력 탄환을 쏘는 각성자의 무기였다.
“아, 이건···.”
그 총기를 알아본 소소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숨기지도 않으시네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한건우가 무심하게 답하며, 총을 잡은 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거역할 수 없는 힘이었다.
소소는 차가운 총구에 이마가 밀려, 문에 바짝 붙었다.
달칵-
한건우는 그대로 그녀를 집무실 안에 집어넣고, 문을 걸어잠갔다.
이제 많은 게 바뀌었다.
짧은 시간 동안, 한건우는 아르고스의 주인 둘을 연이어 없앴다.
세계에 각성자 랭킹이 있다면, 4위와 5위쯤 될 인물들.
한건우는 지각 변동을 일으킨 것이다.
남미에 가면서, 한건우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밖에 없지.’
그래서 소소가 그를 찾아온 것이다.
“한건우 씨, 잠깐 사이에 못 알아보게 변하셨는데요?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소소가 한건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고유 특성인 바람을 불러오려는 것을 알고, 한건우가 경고했다.
“그만. 마지막 경고다.”
소소는 한건우를 잘 알았다.
그가 절대로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소소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반항을 포기했다.
어차피 소소는 북경 지하성에 있는 모용황과의 연락책에 불과했다.
“알겠어요.”
소소가 도발적인 눈빛으로 한건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미모 하나는 정말 뛰어났다.
한건우가 본 여자 중에서 가장 독보적이었다.
이 여자가 모용황처럼 다 쭈그러진 노인네의 손녀라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르고스의 주인을 둘이나 잡아 드시더니, 격이 많이 높아지셨군요.”
“....”
“정말로요. 낯선 남자를 보는 것처럼 가슴이 설레는데요?”
소소의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를 듣고, 한건우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시시때때로 미인계를 쓰려는 게 거슬렸다.
“몰래 숨어드는 버릇이나 고쳐.”
“당신만 할까요? 한국에는 이럴 때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죠.”
웃을 상황은 아니지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알 만큼 아는군. 뭘 확인하러 왔지?”
한건우가 여유롭게 낚시를 던졌다.
모용황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포커 페이스는 기본이었다.
그녀가 뭐라고 답하든, 대응할 방법은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아르고스의 주인들은 너무 오랫동안 안이하게 지냈다니까요.”
“?”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이집트였나요? 아르고스의 주인들은 다섯 겹의 봉인으로 예언 석판을 가두었죠. 그 봉인을 푸는 열쇠는 각자의 고유 특성으로 하고요.”
“그랬었지.”
한건우가 무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다 아는 얘기를 왜 하는지 의문이었다.
“우습지 않나요. 그렇게만 하면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고 안전할 거라고···. 다시 말하면, 서로 말고는 천적이 없는 줄 알았던 거예요.”
“....”
“아르고스의 주인들은 오랫동안 최강의 자리에 있었기에, 생각지도 못한 거예요. 다른 주인이 아니라, 새로운 제3자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쉽지는 않더군.”
한건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소소의 표정에 흥분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당신의 무용은 대단해요. 하지만 당신이 죽인 둘은, 나머지 주인들에 비하면 약한 자들이에요.”
“그렇겠지.”
“한건우 씨. 당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3명의 주인을 상대할 수 없어요. 이제 그들은 방심하고 있지도 않을 텐데.”
소소가 안타깝다는 듯 속삭였다.
‘뭐지?’
한건우는 상당한 위화감을 느꼈다.
소소는 마치 자신이 진짜로 한건우의 부하라도 되는 듯이 조언하고 있었다.
그녀 특유의 야들야들한 말투 탓이려니 해도, 태도가 조금 과했다.
소소의 변화를 의식하면서, 한건우는 슬슬 미끼를 던졌다.
“3명의 주인을 상대하다니? 내가 왜?”
한건우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소소는 처음으로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당신은··· 아르고스의 주인들이 하는 일을 방해했어요. 예언 석판을 가둔 봉인을 열지 못하게 만들었고···.”
“똑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을 찾으면 해결되는 것 아니야?”
소소의 입술이 벌어졌다.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한건우 씨! 설마 그런 안이한 생각을···. 일반이나 희귀 특성이라면 모르겠지만, 재앙급, 신화급 특성은 똑같은 사람을 찾는다는 게···!”
한건우는 손가락을 들어서 튕기는 시늉을 했다.
[특성 발동 : 다이아몬드 폼]
티잉-
맑고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한건우의 손끝이 영롱한 다이아몬드로 변했다.
아주 잠깐이었다.
한건우의 손가락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소소는 <다이아몬드 폼>을 똑똑히 보았다.
그녀의 얼굴의 창백해졌다.
“모용황을 불러내. 직접 얘기하지.”
“....”
소소가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화악-
오른쪽 안구가 형형한 황금색 광채를 뿜어냈다.
왼쪽 눈은 초점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왔군.”
그녀의 몸에 모용황이 강림한 것이었다.
한건우의 집무실은 황금빛으로 뒤덮였다.
우우웅-
금세 집무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
예전에는 <그래비티 필드>로 중력 역가중을 걸고도 압박을 못 이기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참을 만 한데?’
한건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한 차이가 느껴졌다.
그냥 이 감각에 익숙해져서 그렇다기엔 납득이 안 되었다.
압박의 무게는 똑같았다.
자기 자신이 달라졌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역시, 격이 높아졌구먼.」
“?”
한건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소 몸에 강림한 모용황이 말했다.
「격이 무엇인지 모르는가?」
“모릅니다.”
「무지몽매한 이들은 마수나 무기 같은 것에만 격이 있다고들 착각하지. 당연히 인간에게도 격이 있다네. 인간도 이계에서는 마수와 다름 없으니.」
졸지에 무지몽매한 이가 되었지만, 한건우는 새로운 정보에 귀를 기울였다.
“각성자 등급 같은 걸 말하는 겁니까?”
모용황이 끌끌 소리내며 비웃었다.
「지난번에 듣지 않았는가. 각성자 등급은 우리 아르고스가 만들어낸 세부 단계에 불과하네.」
“그렇다면 격은 뭡니까?”
「<시스템>에서 자네를 얼마나 주목하고 있는가, 그걸 말하는 걸세. 현세의 인간 대부분은 아무런 격도 없지! 그래서 시스템은 어린아이가 개미를 눌러 죽이듯, 인간들을 죽이는 것이네.」
한건우의 인상이 구겨졌다.
“아르고스의 주인들이라면 격이 상당히 높겠군요. 그런 자들이 제 손에 죽었고.”
소소, 아니 모용황은 잠시 말없이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부인하지 않는군.」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요.”
「뭐라?」
“사도를 죽이고 사도가 되었다면, 주인을 죽이고 주인이 못 될 건 뭡니까.”
「...내게 감히.」
모용황은 깊이 분노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금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용암이 끓는 듯한 열기도 느껴졌다.
“이런, 말씀을 안 드렸군요.”
치리리링···.
그때 한건우의 손가락 끝이 <다이아몬드 폼>을 취하기 시작했다.
“주인들이 없어도 봉인을 풀 방법이 있다는 걸요.”
모용황의 황금색 눈이 번쩍 빛났다.
<화안금정>.
세상의 모든 텍스트와 코드를 해독할 수 있다는 눈이었다.
치리리···.
흐르는 듯한 금강석 결정 하나하나를, 모용황의 시선이 해부하듯 파헤쳤다.
「흐음, 눈속임이 아니야. 분명히 다이아몬드 폼이로군.」
모용황의 화안금정이 해석을 마쳤다.
한건우가 보여준 특성은 무칸이 가지고 있던 특성과 동일했다.
그때 한건우도 확신할 수 있었다.
‘모용황도 내 권능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
몇 가지 단서는 있었다.
모용황은 모든 <시스템>과 코드를 자유롭게 읽는 것처럼 말했지만, 정작 한건우가 회귀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분명히 내 능력은 <시스템>의 코드 기록에 남아있을 텐데.’
한건우는 아직도 시간을 거슬러 올 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자신보다 강한 플레이어를 100명 죽임으로써, 탐식이라는 악마의 권능을 받았다.
그리고···.
[히든 스킬(신화급) : 뇌룡의 비상]
- 시간을 역행합니다.
뇌룡의 심장 조각의 히든 스킬, 시간 회귀.
이 모든 것의 시작 역시, 시스템 안에서 벌어진 일이 아닌가.
‘모용황이 자기의 능력치를 과장한 건가?’
아니면 한건우에 대한 정보를 읽지 못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한건우에게는 호재였다.
한건우가 자신 있게 말했다.
“이건 특성을 체화한 겁니다.”
「체화라?」
“다른 이의 특성을 거울처럼 흉내내는 특성이죠. 단, 횟수에 제한이 있고요.”
한건우는 술술 사기를 치기 시작했다.
지금의 한건우는 얼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다.
무칸에게서 최고의 신체 보호, 강화 특성인 <다이아몬드 폼>을 얻었다.
마리아 베르타에게서는 폭발적인 공격 특성인 <죽은 자의 날>을 흡수했다.
아소카 싱, 그리고 드 라모트 백작부인.
그들이라면 상대해볼 만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모용황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의 권능은 아예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이걸로 저는 죽은 주인들을 대신해서 봉인을 열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런 작정이었나.」
모용황은 고개를 젖히며 껄껄 웃었다.
젊은 손녀의 몸 속에 들어온 노인의 모습이 기괴했다.
“아르고스의 진정한 주인은 당신이 아닙니까? 다른 주인들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고요.”
「무엄하다!」
“저는 사도를 죽이고 사도가 됐습니다. 다른 주인들과 싸워서 죽인다면, 주인의 자격이 없을 건 뭡니까?”
한건우는 더 밀어붙였다.
보통의 조직이라면 이런 건방진 제안이 통할 리 없었다.
그러나 한건우가 지켜본 아르고스는 달랐다.
‘모용황과 다른 주인과의··· 그래, <격>이 크게 차이가 난다.’
무칸과 마리아 베르타는 강한 각성자라는 느낌이라면, 모용황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것 같았다.
모용황이 보기에는 한건우나 다른 사도, 심지어 다른 주인들까지도.
큰 차이가 없는 자들에 불과할 것이다.
그 증거로, 아르고스의 주인 둘이 죽었는데도 모용황은 아무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은 찾을 수도 없었다.
무칸과 마리아 베르타는 애초에 모용황에게 동료조차 아니었던 것이다.
한건우는 모용황의 그런 심리에 운을 걸었다.
‘모용황이 설득되지 않고 나를 죽이려 한다면, 물러서지 않고 싸운다. 그러나···.’
이길 수 있는 길을 두고도 만용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아르고스의 주인 한둘로는 어렵겠지만.
4명의 특성을 흡수한다면.
모용황과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아르고스의 주인들은 모르지만, 예언 석판 7개는 이미 모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언의 내용은 아직 몰라도, 한건우의 의지는 뚜렷했다.
‘이런 자들에게 세계의 미래를 정하도록 둘 수는 없어.’
힘이 강한지는 몰라도.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대표할 자격이 없다.
모용황의 화안금정은 한건우를 꿰뚫어볼 듯이 샅샅이 바라보았다.
그 속에 품은 생각까지 알아내려는 듯했다.
‘그래. 어떻게 할 거냐.’
한건우는 아무 말 없이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