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마리아 베르타 (20) - 쇠뿔도 단김에
“어디 있지?”
쿵, 쿠당탕!
“분명히 이쯤이겠지!”
콰르르르···.
“어이, 은비 씨. 납치당하면서 본 거 없어?”
박이경이 요란스럽게 마리아 베르타의 비밀 무기고를 찾아 헤매는 동안.
한건우는 권석진 대장을 툭툭 쳤다.
허름한 흰 천을 막대기에 동여맨 채로.
십수 명의 비무장한 주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기··· 인가?’
다가오는 이들은 소수였지만, 도시 쪽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많았다.
그들은 거지꼴이었다.
허름한 옷차림에 신발은 거의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헤졌고, 몸은 비쩍 곯아 있었다.
그러나 공통점은 있었다.
‘동공이 뚜렷해.'
약물에 절어 풀린 눈이 아니라, 선명한 의지가 엿보이는 눈빛이었다.
이 상황에서 약물에 중독되지 않은 것만 해도 칭찬할 만했다.
군인들에게 가까이 오는 것만으로 엄청난 용기를 쥐어짜낸 듯.
백기를 든 노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철컥!
이능력 특수전단의 대원들이 마력 총기를 장전하는 소리가 났다.
주민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 무기 없는 일반인들이다.”
“예.”
한건우가 제지시켰다.
대원들이 총기를 거두었다.
대장의 명령을 듣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특수전단 대원들은 상사의 명령이 아니면 절대 듣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한건우의 명령을 따르다니.
깜짝 놀랄 만한 일인데도, 주위의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백기를 든 주민 뒤로, 낮익은 아이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리콘, 레이나?”
“!”
한건우가 그들에게 아는 체를 하자, 주민들은 퍼뜩 놀랐다.
아이들에게 시선이 집중되었고, 조용히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한건우는 리콘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너희들, 정말 용감했어.”
그들 남매가 지켜온 투구풍뎅이의 알 덕분에, 이계 마약 재배지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다.
사람 사냥으로 마약을 만들던, 그야말로 악마의 후원.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리콘이 맑은 눈빛으로 한건우를 올려다보았다.
“저희가 한 건 없어요. 형 덕분이죠.”
한건우는 그 눈을 들여다보며 먹먹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야, 너희들은 강했어.’
그는 알고 있었다.
회귀 전, 아무의 도움도 못 받았을 때에도.
그들은 결국 네펜데스 재배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었다.
‘어쩌면 그걸 해낸 사람은 레이나였을지도 모르겠군.’
한건우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리콘은 어제 마리아의 사병들에게 죽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여리고 약하게만 보이는 레이나였다.
그녀가 삼촌과 오빠를 잃고, 혼자 살아남아 그들의 유지를 이었다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각성자도 아닌 평범한 일반인.
아마도 목숨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한건우만 알 수 있는 이야기.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날 따라갈래?”
한건우가 진심을 담아 물었다.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남매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태어나서 자랐어요.”
“우리는 이 도시를 잘 살게 만들고 싶어요.”
생각지 못한 아이들의 반응에, 사람들이 동요했다.
한건우는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죽은 삼촌의 영향일까?’
어찌 되었든, 아이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외국으로 데려갈 수는 없는 일.
한건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리콘의 어깨를 두드리고 일어났다.
한건우가 아이들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자, 백기를 들고 온 노인이 용기를 내서 물었다.
“외국에서 오신 군대로 알고 있는데, 맞으신지요?”
“맞습니다.”
“저, 저희는 멕시코시티, 제13구역의 주민들입니다. 부탁드릴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뭡니까?”
제13구역이라면, 리콘과 레이나가 살고 있던 빈민가 구역이었다.
“잠깐이라도··· 도시에 남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원하시는 건 뭐든지... 드리겠습니다.”
태연한 한건우와 달리, 권석진은 깜짝 놀랐다.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외국의 군대를, 떠나지 말라고 붙잡는다? 마침 남으려고 하던 차에 잘 됐군!’
권석진이 순수하게 긍정 대답을 하려는 것을, 한건우가 눈짓으로 막았다.
“저희도 본국의 임무가 있어 쉽지는 않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런데 저희가 떠나면 바로 치안 공백 상태가 되겠군요. 인도적인 차원에서 주둔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꼭 긍정적으로 고려해 주십시오!”
13구역의 주민들은 화색을 띄었다.
할 말을 마치고 부리나케 돌아가는 주민들을 보고, 권석진이 고래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아직 멀었나 봅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스스로 보호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지켜 주세요. 그게 곧 국익으로 돌아올 겁니다.”
권석진 대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건우의 말은 정남준 대통령이 한 말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았다.
‘어렵군.’
국외 작전을 펼치더라도,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개입하는 건 자제하라고.
권석진은 현장 매뉴얼에 쓰인 말만 외우고 있었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적극적인 판단이 어려웠다.
‘모르겠다! 어차피 평소와 크게 다를 것도 없어.’
본래 이능력 특수전단의 목적은, 각성자 범죄자를 진압하는 것.
그 활동 무대가 조금 넓혀졌을 뿐이라고.
권석진 대장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 차은비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 여기 잠깐 남아도 될까요?”
“차은비 씨가요?”
누구보다 현지 작전을 불편해하던 데다, 납치의 고초까지 겪었으니.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물론 여기에도 힐러는 있겠지만, 약물 중독된 사람들도 치료해줄 수 있을까 해서요.”
차은비가 어울리지 않게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권석진 대장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차은비는 절단된 신체도 붙일 수 있고, 최상급 극독도 해독할 수 있는 S급 힐러였다.
‘차은비 씨가 주둔지에 남아서 도와준다면, 시민들의 마음을 얻는 건 땅 짚고 헤엄치기야!’
그의 눈에는 차은비가 성녀처럼 보였다.
그러자 박이경도 뒷목을 긁다가 한 마디 했다.
“크흠, 혹시 형님 일에 지장만 없다면, 저도···.”
“?”
모두의 눈길이 쏠리자, 박이경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니, 특수전단 대원들이야 믿을 만 하지만, 아무래도 쪽수가 딸리잖아? 나라도 있으면 좀 낫지 않겠어.”
“박이경 플레이어가 도와주시면 천군만마죠.”
권석진 대장은 기쁜 표정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여기 있는 대원만으로는 역부족일 듯해, 본국에 지원 병력을 요청하려던 터였다.
S급 권사이자, 개인 전투력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꼽는 박이경이 남아 준다면. 걱정거리는 10분의 1로 줄 것이다.
한건우는 잠깐 더 기다렸다.
이제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좋습니다.”
한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용기는 병력 철수용으로 남겨놓기로 하고, 전세기를 요청했다.
공백 시간이 생겼지만, 모두 바쁘게 움직였다.
차은비가 드래곤의 상처를 살펴 줄 동안.
권석진 대장과 대원들은 벌써 새로운 작전 계획을 짜고 있었다.
바로 도시 안정화 작전이었다.
“아니야. 우리 목표는 진압이 아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정상화를 시키는 거지.”
“전시 수칙을 참고하면, 먼저 경찰력이 필요합니다. 현지인 자경단원을 구성하고···.”
열렬한 토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건우는 그들을 지나, 뒤에 쪼그리고 앉은 은설아에게 다가갔다.
은설아는 동굴 눈표범들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굴 눈표범은 몸집이 큰 탓에 포격을 피하기 어려웠다.
“설아야, 괜찮아?”
“네, 그럼요!”
그녀는 억지로 밝은 척했지만, 풀이 죽어있었다.
테이밍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된 대상이 죽거나 다치면, 테이머는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게 된다.
자신이 죽거나 다친 것처럼 트라우마를 겪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은설아는 승리의 기쁨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망자 없는 작전이라고 좋아했지만, 설아에게는 아니었군.’
마수 두 마리가 은설아에게 다가왔다.
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샤벨 타이거.
그리고 일곱 마리 눈표범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장 작은 개체였다.
끼이잉, 끼육.
두 마리의 마수가 설아의 손등과 팔목을 위로하듯 핥았다.
그제야 설아는 표정을 풀고 웃었다.
“아이 참, 하지 말라니깐.”
한건우는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은설아를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데, 너무 방치해서는 안 되겠어.’
테이머는 정신적으로 위태롭게 되기 쉬웠다.
‘자칫하면 사람을 못 믿고, 마수에게만 위로받게 되기 십상이지.’
동남아의 <마수왕>으로 불리는 강한 테이머가 그랬다.
그는 마수들이 지배하는 왕국을 세우고, 그 위에 외로이 군림했다.
지금은 마수왕 역시 <아르고스>의 사도가 아닐까, 의심하는 차였다.
‘아르고스···.’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제는 한건우의 행동을 눈치 채고도 남았으리라.
“좋아, 와라.”
벌써 다섯 주인 중에서 둘을 잡았다.
이제 가짜 사도 놀이는 때려치울 때가 되었다.
*
청와대의 접견실.
정남준 대통령이 환한 얼굴로 한건우를 맞이했다.
“항상 그렇지만··· 한건우 플레이어는 정말 기대 이상입니다.”
“뭘요. 보내주신 대원들이 워낙 훌륭하시더군요.”
비록 한건우가 자리를 비운 사이, 권석진 대장은 인질로 잡히고, 나머지는 세뇌 약물에 보기 좋게 당하긴 했지만.
나중의 전투에서는 꽤 활약을 했다.
“한건우 플레이어 같은 분이 우리나라에 계신 것은 나라의 큰 복이죠. 하하.”
오늘은 한건우와 대통령만의 독대가 아니었다.
LK건설 대표, 금성락.
금해준의 아버지가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금성락 대표는 한건우의 초청으로 청와대 접견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대통령 각하. 향후 남미 쪽과 연결되는 공식 포털을 세우실 계획이 있으신지요?”
금성락 대표가 본론을 꺼냈다.
“글쎄요, 현지 실사를 다녀오신 한건우 플레이어의 의견이 중요하겠죠.”’
정남준 대통령은 신중한 태도로, 결정권을 한건우 쪽으로 넘겼다.
한건우는 모두가 이득을 볼 수 있는 길을 생각해놓았다.
“우리 군인들이 기본적인 치안유지를 하고 나면, LK에서 할 만한 사업이 있을 겁니다.”
한건우가 거침없이 말하자, 금성락 대표가 귀를 기울였다.
이제껏 한건우의 조언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뭡니까?”
“LK그룹은 미공략 균열을 방어하는 <피라미드> 기술을 갖고 있죠.”
“맞습니다. 이제는 사양세지만요.”
일전에 한건우의 귀띔으로 <피라미드> 사업 비중을 미리 줄였기에, 큰 손실을 면하고, 적절한 시기에 신사업으로 갈아탈 수 있었다.
그러나 사업 비중을 줄였을 뿐. 원천 기술은 그대로였다.
마수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다면, 각성자들의 공격도 방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걸 도시 방어 기술로 바꾸는 겁니다.”
금성락 대표가 입을 떡 벌렸다.
마치 중세시대의 도시처럼, 도시 자체의 방벽을 세우는 것.
‘하지만···.’
금성락 대표는 찬찬히 생각에 잠겼다.
도시 방벽을 수출 아이템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아이템을 폐기한 이유가 있었다.
각성자 군대와 경찰을 갖춘 선진국에서는 그런 시설을 갖출 필요가 없었다.
후진국은 그런 시설을 감당할 자금력이 없었다.
금성락 대표가 슬쩍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지방정부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데···. 그만한 시설을 도입할 자금이 있을까요?”
한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지금은요.”
지금이 기회였다.
마리아 베르타의 막대한 재산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때.
그 재산이 딴 데로 새지 못하게, 시민들에게 꼭 필요한 일에 쓰도록 유도하는 것.
그게 한건우의 첫 번째 구상이었다.
‘아르고스의 주인이 죽고, 그 빈자리가 전보다 엉망이 되는 꼴은 못 보지.’
금성락 대표가 눈을 빛냈다.
“쇠뿔도 단김에 빼죠. 국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겠네요. 바로 타진해 보겠습니다.”
*
그날 밤, 오랜만에 돌아온 길드 집무실 앞.
한건우는 문고리를 잡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모용황이 직접 올 줄 알았더니. 너인가?”
“제가 오면, 모용황 님이 온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소소.
모용황의 손녀인 모용소가 미소지었다.
그녀의 한쪽 눈이 막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