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마리아 베르타 (19) - 최강의 무기
“일렉트릭 건?”
익숙한 이름이었다.
길드의 아이템 장인 장영표에게, 한건우가 물은 적이 있었다.
- 지금까지 알려진 최강의 무기가 뭐지?
이런 주제는 장영표가 좋아하는 이야깃거리였다.
그는 관심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눈을 빛내며 말하곤 했다.
그렇게 들은 이야기 중에서는 진기한 것도 많았다.
- 흔히들 검, 창, 활 같은 걸 떠올리잖습니까. 사실 그게 실용적이죠. 어디서나 휴대할 수 있고, 환경에 구애 안 받고 사용할 수 있고요!
- 그렇지.
- 하지만, 저 같은 아이템 장인들이 꿈꾸는 궁극의 무기가 있죠! 돈이나 기술의 제약이 없다면 꼭 만들고 싶은 겁니다.
- 그런 게 있어? 시도해 봐. 자금이라면 모자라지 않게 지원할 테니.
한건우가 별 생각 없이 툭 던졌다.
장영표는 부담스러울 만큼 감격한 눈으로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건 나중에요.
- 뭔데 그래?
장영표는 허공을 바라보며 뜸을 들이더니, 비장하게 대답했다.
- 바로 레일 건. 일명 일렉트릭 건이죠. 제 생각에는 그것만 성공적으로 개발하면 재앙급 마수가 나와도 붙어볼 만 할 겁니다.
장영표는 한참 동안, 현재 그 무기를 아무 데서도 개발하지 못한 이유를 떠들었다.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버틸 만한 포신을 만들기가 어렵고, 오폭이 날 경우 아군의 위험성도 크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뭐가 어떻다는 건지.
공학 쪽에 배움이 없는 한건우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마디는 분명히 알아들었다.
- 그리고, 이계에서 나온 전자기력 에너지원이 필요하거든요!
한건우는 번개를 품은 듯한 검은 마정석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리아 베르타를 죽이기 직전. 그녀가 최후의 일격으로 준비하던 공격도 떠올랐다.
‘<죽은 자의 날> 특성으로 소환한 수백 개의 총구를 뭉쳐서, 거대한 하나의 포신을 만들었지!’
한건우는 이제 깨달았다.
그녀의 ‘레일 건’은 총기 아이템처럼 장인이 개발한 게 아니었다.
특성으로 만든 포신이었다.
‘이 특성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되면, 나도 가능해.’
더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한건우는 일렉트릭 건 스톤을 꽉 쥐었다.
[일렉트릭 건 스톤]
- 각인된 주인이 사망했습니다.
- 새로운 주인으로 각인하시겠습니까? (Y / N)
[남은 사용횟수 2 / 5]
“물론이지.”
흑요석처럼 검은 마정석에 갇힌 번개가 한 번 세차게 요동쳤다.
'남은 사용횟수가 2회라.'
마리아 베르타는 드래곤을 잡으려고 이걸 꺼냈다.
이제 아르고스의 주인은 3명.
남은 기회를 어떻게 써야 가장 효율적으로 이길 수 있을까.
'뭐, 닥치면 알겠지.'
어차피 이제는 레일 없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전략으로 파알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것이다.
가져가서 장영표에게 이걸 보여주면 어떻게 뒤집어질지.
벌써부터 그의 표정이 기대되었다.
한건우의 시선은 마리아 베르타의 시신으로 향했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케찰코아틀의 깃털 부채>가 매달려 있었다.
그 주인이 죽고, 함선이 추락했는데도.
매혹 아이템은 전혀 손상되지 않고 요요한 자태를 내보이고 있었다.
한건우는 그 부채를 집어들었다.
[케찰코아틀의 깃털 부채(희귀)]
- 부채를 부치면 그 향을 맡은 자를 매혹시킨다.
고대 멕시코 신화에 나오는 뱀의 깃털로 만든 부채였다.
약한 각성자의 손에 들어갔다면 아무 영향력도 없었을, 단순한 매혹 아이템.
하필 마리아 베르타의 손에 들어가서 크게 악용되었다.
이 부채가 그녀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으리라.
한건우는 케찰코아틀의 깃털 부채를 챙겼다.
차르릉-
부채 고리에서 맑은 소리가 들렸다.
손잡이에 달린 고리에 황동으로 된 열쇠 꾸러미가 빛나고 있었다.
한건우는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아공간 무기창고 열쇠로군!’
각성자 개인에게 귀속된 아공간 주머니나 무기집 외에.
열쇠로 들어가는 거대한 아공간.
그 중에서도 그녀가 몸에 지니고 다닐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면, 그녀의 성향상 무기창고의 열쇠가 분명했다.
한건우는 마리아 베르타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부패의 시간>으로 그녀의 시신을 없애버릴까 했지만.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멕시코시티의 시민들이 이 여자가 죽었다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 해.’
폭정자의 최후는 낱낱이 전시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쿵, 쿵.
지축이 울리는 듯한 묵직한 발소리가 났다.
“형니임!”
박이경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아직 전투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온몸에서 훈김이 나고 있었고, 큼직한 주먹을 덮은 너클은 피웅덩이에 담갔다 뺀 듯 피투성이였다.
“무사했군.”
“형님이 없었다면 지금쯤 지옥에 떨어졌겠죠. 오늘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무조건 형님으로 모시는 게 맞다고요.”
박이경이 껄껄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사망자나 부상자가 있나?”
“꼬맹이는 테이밍한 마수들이 많이 죽어서 좀 다운되어 있고요. 특수전단 놈들은 객기 부리다가 많이 다쳤죠.”
한건우는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교도소 본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둥근 지붕이 반쯤 내려앉아 언제 무너질지 모르게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진호, 수호는? 인질들은 잘 구했나.”
“걱정 마십쇼. 벌써 힐러 아가씨가 군인들을 치료한다고 붙어있으니까요.”
죽은 사람이 없다니 다행이었다.
죽지만 않았다면, 차은비가 무조건 살려낼 수 있으니까.
한건우는 힐러로서의 차은비를 그만큼 신뢰했다.
한건우는 동료들이 모여있는 방향으로 갔다.
차은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리를 거꾸로 붙이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요.”
“크윽!”
별로 친절한 힐러는 아니었지만.
다들 순순히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그때 권석진 대장이 한건우에게 다가왔다.
납치되어 묶여 있던 시간이 길어서 지친 상태였지만, 그의 자세는 군인의 표상답게 꼿꼿했다.
“한건우 플레이어, 작전에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권석진 대장이 깍듯하게 사과했다.
“뭘요,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물론 제가 자유로운 몸이었어도, 큰 도움은 못 되었겠지만요···.”
권석진 대장이 그답지 않게 풀죽은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시선이 반으로 갈라져 추락한 공중전함 쪽을 향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르고스의 주인, 그리고 공중전함.
권석진 대장이 해결할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었다.
“천만에요, 대장님의 역할은 여기부터입니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건우는 고갯짓으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사립 멕시카 교도소가 무너진 게 전부가 아니었다.
타앙- 탕-
쿠르르···.
폭군이 사라진 무정부상태의 멕시코시티.
벌써 총성과 폭음이 울리고 있었다.
약탈일 수도 있었고, 분노한 시민들이 마리아 베르타의 잔당에게 복수극을 벌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둘 다 있겠지.’
이곳뿐만 아니라 남미의 많은 주민들은 오랫동안 카르텔의 지배를 받아왔다.
게다가 상당수는 오랫동안 사고를 마비시키는 마약에 중독된 상태.
자생적으로 치안을 유지할 능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치안이 안정되고, 체제가 잡힐 때까지만. 임시로 이들을 보호해주세요. 제가 돌아가서 대통령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하, 하지만···.”
권석진 대장은 망설였다.
그는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는 데 익숙한 군인이었다.
상상력이 부족하고 고지식한 편에 가까웠다.
한국에 이계 마약을 팔려는 자들을 먼저 치는 것.
즉 마리아 베르타와 그 부하들을 죽이는 것.
여기까지가 그들이 계획한 작전 내의 범위였다.
작전이 끝나면 철수할 것만 생각했던 그였다.
이건 예측하지 못한 방향이었다.
“이곳을 식민지로 삼자는 겁니까?”
권석진 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무 앞서나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대장님도 외지에 오래 머무르실 수도 없고요.”
“그러면···?”
한건우가 구상한 바가 있었다.
먼저, 불씨를 남겨두면 화약이 폭발하기 마련.
마리아 베르타의 잔당을 청소해야 했다.
그게 다는 아니었다.
마리아 베르타의 카르텔이 사라지면, 남미의 세력에 큰 공백이 생긴다.
호랑이가 없는 곳에 여우가 왕 노릇 한다는 말이 있듯이.
마리아의 카르텔이 없어지면, 바짝 엎드리고 있던 다른 도시의 군소 조직이 슬슬 일어날 것이다.
‘주민들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할 시간도 필요할 거야.’
이곳은 무칸이 통치하던 아프리카와는 또 달랐다.
국민적인 존경을 받는 인물이나 구심점이 없는 상태.
“일시적으로만 머무르시면서 거점을 좀 닦아 놓으시죠.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음···.”
권석진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지, 대답을 망설였다.
심정적으로는 한건우의 말이 옳다는 걸 알지만, 최고 결정자인 대통령의 뜻을 몰라서 그러는 것 같았다.
한건우가 피식 웃으며 권유했다.
“뭘 망설이십니까. 대통령께 직접 물어보시면 되잖아요?”
만주에서처럼 하면 된다. 전화나 인터넷망이 없어도 연결되는 위성전화는 이럴 때 쓰려고 만든 게 아니겠는가.
권석진이 자리를 비우자, 박이경이 다가왔다.
그는 이제껏 한건우와 권석진이 나눈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
“형님,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막말로 우리가 여기 사람들을 대신해서 가려운 곳 긁어 준 거잖아요?”
박이경이 갸우뚱하며 물었다.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말투였다.
쳐죽일 놈들이 있어서, 보기 좋게 죽여버렸다.
그 와중에서 인명 피해만 안 내도 칭찬해 마땅할 일 아닌가.
남의 나라 사정까지 그렇게 살뜰히 챙겨야 하는지.
박이경은 의문이었다.
“그 말이 맞아.”
한건우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 점은 시각의 차이이지, 옳고 그른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리아 베르타의 교도소 안에만 있던 박이경과, 도시와 빈민가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직접 본 한건우.
생각하는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을 강조하는 대신, 한건우는 또다른 측면을 꺼냈다.
“당연히 봉사활동을 하려는 건 아니야.”
“그러면요?”
박이경이 눈을 꿈뻑거렸다.
“그게 큰 이익이 될 거야.”
한건우는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 한 마디면 충분했다.
“좋습니다! 하여간 형님 하는 대로 하면 손해볼 일은 없으니까.”
박이경은 시원하게 납득했다.
원래 생각을 깊게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한건우 플레이어!”
권석진이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말씀대로 저와 저희 대원들은 여기 남아서 정리를 좀 하겠습니다.”
“대통령님이 뭐라고 하셨죠?”
“사실 놀랐습니다. 대통령님께서 한건우 플레이어와 정확히 똑같은 말씀을 하시더군요.”
권석진은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자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의견이 정리되자, 박이경이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섰다.
그가 반파된 교도소를 둘러보며 입맛을 다셨다.
“자아, 그럼 약탈을 해보실까?”
저 안에는 마리아 베르타의 카르텔이 쌓은 어마어마한 재산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
그러나 박이경이 노리는 건 돈이 아니었다.
돈이라면 부족한 것 없이 있었으니까.
‘총! 대포! 무기 아이템!’
백 미터 밖에서 봐도 밀리터리 매니아 같던 마리아 베르타.
그렇게 총을 좋아하는 각성자라면, 무기 콜렉션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쿠웅- 쿵!
박이경이 신나게 교도소 잔해로 달려갈 동안.
“어.”
한건우는 박이경을 불러세우려다 말았다.
굳이 재미를 방해할 필요는 없었다.
저러다 또 뭔가를 발견할 수도 있고 말이다.
차르릉-
한건우의 손에서 마리아 베르타의 아공간 무기 창고 열쇠 꾸러미가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