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마리아 베르타 (16) - 죽은 자의 날
세상에는 아무리 많이 해도 좋은 게 몇 가지 있다.
그 목록에서 당당히 첫 번째를 차지하는 것.
바로 승리였다.
‘이길 줄은 알았지만.’
빛의 날개를 펴고 공중에 떠 있던 한건우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손수 키운 드래곤이 눈앞에서 전투기 12대를 격추시키는 걸 보니, 가슴이 벅찰 수밖에.
알에서 해츨링이 깨어날 때부터 직접 손으로 먹이를 주며 키웠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자식을 잘 키우고 볼 일이야.’
친자식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하게 드래곤의 공적은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 유도 미사일 3개를 보고, 한건우는 허공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불 골렘을 띄워 보내서 유도 미사일을 피하게 도와준 것이었다.
괜히 딸 같은 드래곤을 다치게 할 수는 없으니까.
*
“Mierda···..”
마리아 베르타가 욕설을 내뱉었다.
12대의 전투기가 순식간에 소멸되는 걸 눈앞에서 목격했다.
전투기에서 오발된 미사일과 잔해 탓에, 그녀의 본거지인 ‘사립 멕시카 교도소’도 엉망이 되었다.
“귀엽게 봐주려 해도, 이제 안 되겠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졌다.
“모두 죽어라.”
마리아 베르타는 박이경과 은설아를 노려보았다.
이들을 죽이고, 그다음은 한건우 차례였다.
마리아 베르타는 <죽은 자의 날> 특성을 전개하려다 갑자기 멈추었다.
그녀의 눈에 잔인한 빛이 어렸다.
“아이 참, 이걸 놓칠 뻔했군.”
“?”
“먼저 너희 동료들과 서로 죽고 죽이는 경험은 하도록 해줘야지.”
마리아 베르타가 <케찰코아틀의 깃털 부채>를 차르륵 폈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짙은 사향이 풍겼다.
마리아 베르타는 뒤에 선 부하들을 살짝 돌아보았다.
그녀가 장난감처럼 부리는 각성자들이었다.
어젯밤 새로 얻은 부하들에게, 그녀가 명령했다.
“저들의 심장을 가져와라.”
“!”
임진호가 맨 앞으로 나섰다.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어려 있었고, 이성은 완전히 마비된 듯했다.
그 뒤로는 임수호와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이 따라왔다.
모두 전투태세를 완비한 채였다.
처억!
한건우의 동료 간의 싸움이었다.
과거의 동료도 있었고, 현재의 동료도 있었다.
슈웅-
이지환 하사가 화염의 화살을 쏘았다.
커엉!
은설아의 샤벨 타이거가 화염 화살을 뚫고 돌진했다.
털가죽에 불이 옯겨붙었지만, 앞으로 구르면서 꺼트렸다.
이지환 하사 앞을 가로막은 건 임수호였다.
치지지징-
크어엉!
얼음으로 이뤄진 가시덤불이 샤벨 타이거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평소의 임수호보다 훨씬 공격적이고 빨랐다.
얼음 가시덤불은 샤벨 타이거를 거의 짜부라트릴 뻔했다.
샤벨 타이거가 겨우 목숨을 건져 빠져나왔다.
“말도 안돼. 수호 오빠! 정신 차려요!”
“소용없어.”
흥분한 은설아를 박이경이 달랬다.
이제는 박이경도 상황을 깨달았다.
이계 약물로 정신 방벽을 무력화한 데다, 매혹 아이템인 <케찰코아틀의 깃털 부채>를 써서 세뇌에 도달한 것이니.
제아무리 각성자라도 견뎌내기 힘들 법했다.
우스운 일은 따로 있었다.
“아니, 자기들이 무슨 환상의 콤비래요? 저게 대체 뭐예요?”
은설아가 억울한 듯 소리쳤다.
두두두···
임진호와 정욱 준위는 앞장서서 완력을 뽐냈다.
맹렬한 황소처럼 앞길을 뚫고 박이경에게 용감하게 덤벼들었다.
임수호와 이지환도 마찬가지.
상극을 이루는 얼음과 불의 공격이 시간차를 두고 쏟아졌다.
여기 오기 전에 서로 싸웠던 이들이 아닌가.
웬걸, 호흡이 척척 맞았다.
“동족 혐오였나?”
영혼의 단짝처럼 서로 손발을 맞추는 게, 한 편으로 안 만들어 줬으면 억울할 지경이었다.
“으윽, 이것들을 다 때려죽일 수도 없고!”
박이경이 으르렁댔다.
어젯밤과는 달리, 이들의 공세가 치열했다.
그때 뒤에서 낯선 짐승의 울음이 들려왔다.
크르르르르···.
인간의 관절을 바짝 굳게 하는 저주파음이었다.
“어?”
은설아가 화색을 띠며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동굴 눈표범 일곱 마리.
동그란 잿빛 눈이 은설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리아 베르타가 후원 근처에서 가두어 기르던 희귀한 마수들이었다.
새하얀 바탕에 은회색 무늬. 그녀가 어제 두르고 있던 망토와 같은 털가죽이었다.
동굴 눈표범의 목덜미 주변에는 사자의 갈기 같은 털이 위엄 있게 나 있었다.
“저것들이 어떻게 빠져나왔지?”
“전투가 파편이 떨어지면서 우리가 부서진 것 같습니다.”
마리아 베르타의 부하가 대답했다.
은설아가 동굴 눈표범 무리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거대한 동굴 눈표범 앞에 선 그녀는 그야말로 인형처럼 작고 여려 보였다.
크르렁!
크어어엉!
동굴 눈표범들이 그녀를 한입에 잡아먹을 듯 덮쳐왔다.
새빨간 입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설아!”
놀란 박이경이 땅을 박차며 달려왔다.
눈표범들을 때려눕히고 은설아를 구하려는 것이었다.
은설아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특성 발동 : 비스트 마스터]
스으으-
그녀를 최고의 테이머로 만들어준 신화급 특성이 전개되었다.
크와앙-
동굴 눈표범들은 멈추지 않고 은설아에게 달려들었다.
눈표범의 앞발에 치인 은설아가 뒤로 쓰러졌다.
“어어!”
박이경이 당황했다.
“아하하···.”
한 덩어리를 이룬 동굴 눈표범 밑에서, 구슬 같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은설아가 넘어진 채로 웃고 있었다.
동굴 눈표범이 거대한 혀로 은설아를 핥았다.
“앗, 따가워. 그만해!”
고양이과 마수의 혀라 까끌까끌한 돌기가 있었다.
은설아가 따끔하게 말하자, 동굴 눈표범들은 말 잘 듣는 군견처럼 일어나 앉았다.
단 몇 초 만에, 은설아는 동굴 눈표범 무리를 손쉽게 길들였다.
은설아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동굴 눈표범의 목덜미를 안고 올라탔다.
은회색 갈기 속에 파묻히자, 은설아는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저럴 수가!”
마리아 베르타의 부하들이 경악했다.
사납고 잔인한 동굴 눈표범을 강아지 다루듯이 하는 게 믿기지 않았다.
“멍청이들아. 테이머가 있다고 했잖아.”
마리아 베르타는 아공간 무기집에서 총화기를 소환했다.
동굴 눈표범은 거대한 이빨과 앞발뿐만 아니라 더 까다로운 특징이 있었다.
그녀가 지시했다.
“전방에 무작위 격발해.”
“예!”
투두두두두두···.
마리아의 부하들은 명령대로 전방에 공격을 난사했다.
임수호와 임진호, 그리고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박이경은 <신체 강화>로 마력 총탄을 버텼지만, 계속 맞으면 장담할 수 없었다.
<거인화>를 거둬들여 표적의 크기를 줄이고 난사를 피했다.
쉬익-
동굴 눈표범의 반응도 빨랐다.
엄폐물 뒤에 숨거나, 재빨리 사정권을 벗어나 옆으로 돌기도 했다.
동굴 눈표범의 털가죽이 흔들리며 물결치더니 투명해졌다.
아직 어스름한 아침.
일곱 마리의 동굴 눈표범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어디 간 거지!”
“저기다!”
“아니, 오른쪽에서···!”
마리아의 부하들은 혼란에 빠졌다.
보이지 않는 마수와 싸우는 건 그만큼 두려운 일이었다.
마리아 베르타가 마력 총화기를 집어넣고, 손가락을 겨누었다.
사실 그녀에게 총기라는 도구는 장난감일 뿐.
진짜 능력을 발휘할 때 그런 건 필요 없었다.
[특성 발동 : 죽은 자의 날]
그녀의 주위 공간에서 무수히 많은 총신이 튀어나왔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총구가 전방을 향했다.
5.56mm 돌격소총.
45구경 권총.
대전차포에서 120mm 박격포까지.
무수한 총구가 마치 사람들의 눈동자처럼 전방을 향해 불을 뿜었다.
투콰앙-
콰아아-
투두두두-
마리아 베르타의 화력이 폭발했다.
평범한 보호막으로는 1초도 버텨낼 수 없었다.
크어어엉!
크르륵···.
난사에 맞은 눈표범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총구멍이 나 죽은 채였다.
“아악”
테이밍으로 연결된 마수들이 동시에 죽자, 은설아가 정신적 타격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탄 눈표범도 총상을 입어 절뚝거렸다.
그때였다.
슈우웅-
한건우가 하늘에서 번개처럼 꽂혀 내려왔다.
그가 동시에 광범위의 방어 특성을 펼쳤다.
[특성 발동 : 믿음의 방패]
투콰아아-
두두두두두-
“!”
마력탄의 공격이 집중되자, <믿음의 방패>의 방어막도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포연 속.
한건우는 방어막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투두두두-
마리아 베르타의 총구가 선두에 나타난 적에게 집중되었다.
한건우는 온몸으로 그 포화를 받아냈다.
쿠콰아아-
치지잉-
“아?”
그때, 마리아 베르타는 강한 반동을 느끼고 급히 몸을 낮추었다.
자신의 포화가 튕겨 나와 되돌아온 것이었다.
그녀의 한쪽 볼과 어깨에서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감히 나에게?’
마리아 베르타가 피를 흘리게 한 상대는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온몸이 다이아몬드로 변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의 온몸은 아침의 서광에 찬란하게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이아몬드로 변해, 얼굴조차 구별할 수 없었다.
마리아 베르타가 알기로, <다이아몬드 폼>을 가지고 그녀의 집중포화를 버틸 만한 남자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무, 무칸?”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아직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였다.
콰아아-
한건우가 발로 그녀의 명치를 걷어찼다.
“아악!”
마리아 베르타가 수십 미터 뒤로 날아갔다.
“퀸!”
마리아의 부하들이 동요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임진호와 임수호는 적개심을 보이며 한건우를 공격했다.
“휴. 깨어나라, 좀.”
한건우는 고개를 저으면서 아공간 무기집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황혼의 서리거인> 균열을 깨고 얻은 아이템.
서리거인의 왕이 지니고 있었을 물건이었다.
[서리거인의 뿔피리(희귀)]
-아군의 정신 방어력을 일시적으로 강화한다.
한건우가 뿔피리의 끝부분을 물고 불었다.
삐이이이-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들릴 법한 힘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임수호와 임진호의 변화가 인상적이었다.
형제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손바닥으로 귀를 덮으려고 했다. 그러더니 곧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휘청거렸다.
삐이이-
피리 소리가 계속되었다.
쌍둥이 형제의 눈동자에서 서서히 붉은 기운이 걷혔다.
“수호야.”
“형?”
“....”
가장 먼저, 형제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차라리 그동안의 기억이 날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감정만 달라졌을 뿐, 기억은 고스란히 났다.
“어···.”
“하사님, 괜찮으십니까?”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도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모두 어리둥절해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쯧, 요즘 젊은 놈들은 정신 상태가 글렀어. 이쁜 여자라고 머리가 확 돌아서는.”
박이경이 큰 소리로 힐난했다.
자신도 거의 당할 뻔했다는 건 이미 잊은 채였다.
서리거인의 뿔피리는 강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마리아 베르타의 부하들까지 영향이 미친 것은 아니었다.
아이템의 범위는 ‘아군’에 한정되니까.
만일 세뇌가 풀린다 해도 그들이 한건우 편에 붙을 리는 없었다.
기껏해야 마리아 베르타를 버리고 도망치는 데 그칠 것이다.
‘도망치게 두는 것보단,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게 낫지.’
한건우는 그렇게 판단했다.
“역시 형님! 해결사야, 해결사.”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호들갑을 떠는 박이경을 뒤로하고, 한건우가 임진호에게 물었다.
기억이 있다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차은비 씨와 권석진 대장은, 어디 있어?”
“어? 저 건물 안에···.”
임진호가 말을 흐렸다.
반파된 본관 건물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평소 상태라면 걱정 없지만, 구속구를 찬 채로 잘 어떻게 됐을런지. 덜컥 걱정되었다.
“진호야, 네가 가봐.”
“나도 같이···.”
한건우가 따라가려는 수호를 말렸다.
“아무래도 손이 모자랄 것 같다.”
“어?”
한건우가 하늘을 가리켰다.
한건우의 일행도 따라서 위를 바라보았고, 모두 입을 딱 벌렸다.
- 아침에 당장 ‘하늘’로 스노우 플레이크를 실어 보내야 해.
네펜데스 재배지에서, 군인들이 했던 이야기가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미친. 저건 또 뭐야.”
박이경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늘 위에는 거대한 공중전함이 떠 있었다.
전후방 할 것 없이 곡사포와 함포, 기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