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마리아 베르타 (13) - 절반의 성공
귀청을 때리는 폭발음과 함께, 대지가 진동했다.
‘정확히 30분 걸렸군.’
한건우는 모든 상황이 눈에 본 듯 그려졌다.
다음 조의 군인이 순찰함을 연다.
극도로 얇은, 종잇장 하나 정도 두께의 공간 층으로 아슬아슬하게 붙잡아놓은 압력이 대폭발한다.
마치 압력밥솥의 돌아가는 추를 건드린 것처럼.
밥솥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나고, 화약고에 있는 포탄 하나가 터진다.
그 이후로는 연쇄 폭발.
콰르릉-
두웅-
폭발음은 한 번에 끝나지 않고, 드문드문 이어졌다.
보라색, 붉은색.
색깔도 다양한 폭염이 새벽의 어스름한 하늘을 물들였다.
이 정도면 수도의 시민들도 잠에서 깨어났으리라.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지만, 한건우는 내심 아쉬운 점도 있었다.
‘화약고가 교도소 담장 안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마리아 베르타도 바보가 아니니.
저런 위험요소를 가까이 품고 있을 리 없었다.
작전은 성공했지만, 담장 바깥의 군 진영만 타격하는 데서 끝났다.
“미친···.”
“뭐야, 저게!”
군인들은 욕을 내뱉었고, 수확꾼들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했다.
“으억!”
한 수확꾼이 돌발행동을 했다.
망태기를 벗어던지고 숲속으로 뛰어간 것이다.
진액을 담은 양철통이 엎어지면서 뚜껑이 튕겨 나갔다.
새하얀 진액이 바닥으로 울컥 쏟아졌다.
타앙-
가까이에서 마력 총화기가 불을 뿜었다.
등에 마력 탄알을 맞은 수확꾼은 그 자리에서 몸이 까맣게 타 즉사했다.
남은 수확꾼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바짝 굳었다.
타앙- 탕!
총을 쏜 군인이 하늘에 대고 위협 사격을 했다.
“내가 말했지? 진액을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죽는 줄 알라고.”
“혼자 도망가면 살 것 같아? 정신 바짝 차려.”
군인들이 수확꾼들을 윽박질렀다.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어서, 겁을 먹은 수확꾼들이 군인들 가까이 모여들었다.
“진지 쪽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니야?”
“잠깐, 폭발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접근하면 죽을 수도 있어.”
“그럼 어떻게 해. 여기서 시간 때우고 숨어 있어?”
군인들은 이제 박이경 무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차피 운 좋게 살아있는 마약 재료 정도로 볼 뿐.
구속구를 차고 있는 이상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군인들은 빠르게 의견을 교환했다.
진지 쪽으로 복귀할 것인지, 비교적 안전한 숲 쪽에 머무를 것인지.
보통의 군인들이라면 후자를 택했을 것이다.
이들은 달랐다.
“어차피 결정은 정해져 있지 않나?”
“그래. 저걸 목격하고도 후속 대응하러 가지 않은 걸 들키면···. 퀸 마리아에게 죽는 거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이판사판이군.”
상사가 지나치게 두려우니, 쉽게 결론이 났다.
폭발이 일어난 진지 쪽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뭔. 우릴 보고도 무시하나, 지금?”
박이경은 어이없어했다.
군인들이 자기를 발견하고도 공격하지 않자, 무시당한 것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저씨, 왜 괜히 군인들에게 시비를 거세요. 그냥 간다잖아요!”
은설아가 박이경을 쿡 찌르면서 말렸다.
평소 같으면 이깟 군인들쯤이야, 마력을 못 써도 상대했을 것이다.
그들은 밤새 네펜데스 꽃밭에서 끈질긴 공격에 대처해온 터였다.
차라리 빠르게 덤벼오는 적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게 낫지.
느릿느릿 끝도 없이 다가오는 덩굴줄기는 사람을 질리게 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쳐버렸다.
그 둘은 아직 한건우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건우는 완벽히 은신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성자는 속여도, 드래곤의 감각은 속일 수 없었다.
“와! 아빠!”
“?”
드래곤이 해맑게 웃으면서 한건우에게 뛰어왔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상한 광경으로 보였다.
웬 어린애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 아빠를 부르면서 종종 뛰어가는 꼴이었다.
한건우가 짧은 한숨을 쉬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군인과 수확꾼들은 물론이고.
박이경과 은설아도 턱이 빠질 듯이 입을 딱 벌렸다.
한건우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였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었어?”
“아빠 말 잘 듣고 기다렸어!”
동문서답이었다.
드래곤은 뿌듯해하며 제자리에서 총총 뛰었다.
한건우는 드래곤을 번쩍 들어 왼팔에 안고, 오른손은 땅을 향했다.
[특성 발동 : 골렘 연성]
쿠르릉···.
흙바닥에서 불쑥, 돌로 된 손이 튀어나왔다.
바위와 돌멩이가 얽혀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사람이라기에는 너무 큰, 3미터에서 4미터 사이의 골렘이었다.
“저게 뭐야!”
쿠르르르···..
하나에서 그치지 않고, 골렘이 계속 대지를 뚫고 솟아올랐다.
번쩍!
골렘이 사람의 형상을 갖출 때마다, 머리 부위의 텅 빈 공간에 두 개의 빛이 들어왔다.
“골렘, 골렘이다!”
두두두두-
군인들이 마력 총화기를 난사되었다.
한건우는 때맞추어 적절한 특성을 사용했다.
[특성 발동 : 믿음의 방패]
- 아군 전체에 물리적 방어막을 형성한다.
“오.”
시스템은 관대하게도 골렘 자체도 특성의 적용대상인 ‘아군’에 포함해 주었다.
반대로 상대편의 상황은 처참했다.
아군이 발사한 유탄을 맞은 군인이 부지기수였다.
한건우는 한데 모여 떨고 있는 수확꾼들 앞에서 잠시 총탄을 막아주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수확꾼들은 군인들의 난사에 모조리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두두두···.
퍼억! 콰아앙!
돌 골렘이 거침없이 펀치를 날렸다.
기관총을 쏘던 군인들이 종이 인형처럼 날아갔다.
돌 골렘들이 군인들을 확인사살하는 사이.
한건우는 박이경과 은설아에게 다가갔다.
치잉-
<빛의 군주> 특성으로 만든 빛의 검날에, 마력 구속구가 잘려 나갔다.
투둑.
팔목에 묶여있던 구속구를 풀자, 그들에게 마력이 돌아왔다.
“으아아! 형님, 이거 정말 답답했습니다.”
박이경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그는 바로 아공간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냈다.
한 병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대용량 포션 한 병을 한 모금에 꿀꺽 넘기고, 박이경은 겨우 숨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병을 꺼내서 선뜻 은설아에게 건넸다.
은설아가 포션을 여러 모금에 나누어 마실 동안, 한건우가 말했다.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궁금하지만, 나중에 듣지.”
한건우도 아공간 금고를 열었다.
허공에서 커다란 상자가 불쑥 튀어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주목되었다.
“그건 뭐예요?”
“풍뎅이 알.”
“네?”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한건우는 매우 주의 깊게 <아그니의 화염>을 전개했다.
한순간의 실수로 열기가 올라버리면 큰일이었다.
화아아-
화염이 옅은 이불처럼 상자 주위에 번졌다.
체온보다 높은 온도로 올린 지 1분도 안 되어, 금방 반응이 왔다.
덜그럭··· 쩌억!
황금빛 알 중에서 제일 큰 것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알껍데기 사이로, 통통한 애벌레가 고개를 내밀었다.
호두알만 한 머리에 뾰족한 뿔이 돋아 있었다.
“이건··· 이계 곤충인가요?”
은설아의 눈동자가 호기심에 반짝 빛났다.
“성충이 되려면 하루 정도 걸릴 거야.”
점점 작은 알껍데기까지 부화를 시작했다.
뿔 달린 애벌레들이 상자를 넘어 꼬물꼬물 기어 나왔다.
부화가 잘된 건 다행이지만.
성충이 될 때까지 이 숲에서 상당수가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애초에 그런 여유는 없었지만, 미리 다른 데서 부화시켜서 오는 게 나았을까.
한건우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그때 은설아가 나섰다.
“얘들을 빨리 성장시켜야 하는 거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음?”
한건우는 문득 은설아를 바라보았다.
‘맞아, <비스트 마스터> 특성.’
한건우는 그 특성을 가지고도, 뇌룡의 심장을 이어붙이느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지만.
<비스트 마스터> 특성의 활용도는 엄청났다.
흔히 알고 있는 테이밍 기능, 즉 마수와 친화하고, 교감하는 걸 넘어서서, 마수를 더 건강하게 육성시키기도 했다.
은설아가 데리고 있는 마수들이 다른 성체 마수보다 더 우월하게 자라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어린 애들은··· 훨씬 쉬울 것 같아요.”
과거에는 곤충형 마수에는 친화력을 못 느꼈던 은설아지만.
확실히 태도가 달라졌다.
‘친화력 스탯 덕인가, 아니면 S급이 되어서일까?’
[특성 발동 : 비스트 마스터]
은설아가 자신의 신화급 특성을 강하게 발동했다.
그녀의 손에서 무형의 마기가 솟구쳤다.
파앗-
애벌레들이 꿈틀하며 튀어 오르더니, 몸통을 부르르 떨었다.
애벌레들은 시간을 빠르게 돌린 것처럼 무럭무럭 크기를 키웠다.
육안으로 성장이 확연하게 보일 정도였다.
트드득.
팔뚝만큼 커진 애벌레들이 갈색으로 변했다.
둥글고 딱딱하게 구부러졌다.
순식간에 번데기가 된 것이었다.
“와.”
박이경이 탄성을 내뱉었다.
특성이라는 이름으로 기적처럼 보이는 많은 현상이 일어나지만.
이건 또 신선한 구경이었다.
마침내 모든 애벌레가 번데기로 바뀌었다.
큰 것은 둥근 방패만 했고, 작은 것도 머리통만 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투욱, 퍽.
골렘과 샤벨 타이거가 네펜데스 덩굴을 잡아 뜯는 기척만 들렸다.
그것도 잠시.
파아앗!
“!”
동시에 모든 번데기가 폭발하듯 터졌다.
위이잉!
성체가 된 투구풍뎅이 떼가 위풍당당하게 날아올랐다.
황금빛 투구를 쓴 듯한 머리와 활짝 펼친 날개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한건우의 눈에는 한 마리 한 마리가 소중한 아군으로 보였다.
‘이 모습을 리콘과 레이나가 봤어야 하는데.’
웨에엥-
투구풍뎅이 떼가 무리 지어 숲으로 돌진했다.
풍뎅이 떼가 날아가면서 마주친 덩굴줄기는 그대로 믹서기에 갈린 것처럼 사라졌다.
투구풍뎅이 떼는 처음에 한 몸처럼 모여 이동하다가, 점차 여러 개의 그룹으로 흩어졌다.
저렇게 숲속에 흩어지면 섬멸하기는 불가능할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은설아가 가쁜 숨을 골랐다.
깊이 집중하느라 이마에 땀까지 배어 나와 있었다.
“설아야, 잘했어.”
한건우의 칭찬을 듣고, 은설아가 살짝 웃었다.
“어, 그런데.”
박이경이 헛기침을 했다.
이 타이밍에 말해야 할 게 있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러지?”
“아무래도 이제 빨리 돌아가 봐야지 싶은데 말입니다.”
한건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작전은 얼추 성공했다.
군부대 화약고를 폭파해, 그쪽으로 시선을 끌 겸, 후방인력도 처리했다.
그렇게 네펜데스 재배지를 없앨 수 있었다.
은설아의 도움 덕에, 생각보다도 빨리 완료될 것 같았다.
어차피 최종 목표는 정해져 있었다.
아르고스의 주인, 마리아 베르타와 그 수하들이었다.
“가야지. 아마 폭발 쪽에 어그로가 끌려 있을 거야. 저쪽으로.”
“저, 그러니까···.”
박이경은 짧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뭐라고?”
요약하면 임수호 형제와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은 무슨 약을 잘못 먹었는지 마리아 베르타의 노예가 되어버렸고, 차은비와 권석진은 정신은 멀쩡한 대신 인질로 잡혀 있다는 얘기였다.
“예, 그렇게 됐습니다.”
“인질이라. 계약서에 도장 찍을 사람들만 남겨놓았나 보군.”
그런 기준이라면 조금은 안심이었다.
아직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테니까.
“일단 이 숲을 나가죠! 시야만 확보되면 어디로 가야 할지는 보일 거예요.”
은설아가 제안했을 때.
하늘을 가르는 거친 파공음이 들렸다.
한건우는 귀를 의심했다.
‘전투기까지?’
공항 방향에서 전투기 비행대대가 날아오고 있었다.
3대로 이뤄진 편대가 4개. 총 12대의 전투기였다.
한건우가 드래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부탁해.”
그때 드래곤의 눈이 희게 빛났다.
쿠우우-
한건우의 드래곤이 본체로 현신했다.
여섯 개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