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마리아 베르타 (12) - 시한폭탄
아이들의 단순하고 순수한 반응이 귀여웠다.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여길 떠나기 전에, 앞으로는 다른 사람 믿지 말라고 경고해야겠어.’
리콘과 레이나 남매는 한건우가 우려하는 것도 모르고, 재잘재잘 신나서 설명을 이어갔다.
“이게 최고예요. 육식식물들은 생명력이 지독하거든요. 씨앗은 말할 것도 없고 뿌리 한 조각, 줄기 한 조각이라도 남으면 금방 다시 자라버려요.”
“투구풍뎅이는 네펜데스의 천적이거든요. 잎사귀부터 땅 깊이 박힌 뿌리 끝까지 모조리 먹어치운다고 했어요. 시간이 걸려도요.”
남매는 한건우를 설득하려는 것처럼 자세히 설명했다.
손짓 발짓을 하면서 열심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한건우가 알기로, 이미 그 효과는 증명되었으니까.
회귀 전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던 마약 ‘스노우 플레이크’가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았던가.
바로 이계 곤충인 투구풍뎅이 떼의 공격 때문에.
‘그때는 누가 용기를 냈던 걸까.’
한건우는 남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매의 삼촌은 이 시점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으니.
아마도 두 남매 중 하나.
어느 쪽이든 목숨을 건 모험이었으리라.
하지만 한건우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스노우 플레이크’를 없애는 건 성공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큰 손해를 입었더라도, 마리아 베르타의 카르텔은 다시 폼을 회복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달라야지.’
투구풍뎅이가 육식식물 네펜데스를 잎사귀부터 뿌리 끝까지 먹어치우듯.
마리아 베르타의 세력도 확실히 끝장내 버릴 것이다.
한건우가 걱정하는 건 한 가지였다.
“힘 조절에 주의해야겠군.”
남매가 소중하게 지켜온 투구풍뎅이 알.
태워서 익혀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리콘과 레이나 남매는 한건우를 무척 따라오고 싶어했지만.
안 될 말이었다.
두 남매는 비각성자였으니까.
“오늘 하루가 끝나기 전에는, 되도록 여기서 나오지 마.”
“하지만···.”
“구경한다고 고개 내미는 것도 안돼. 알겠어?”
“네에.”
남매는 벌써 한건우와 정이 들었는지, 헤어지기 아쉬워했다.
제대로 된 어른과 이야기를 나눠본 경험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삼촌이 죽은 뒤에는 더더욱 그랬다.
“죽지 마세요. 다치지도 말고.”
“바보야, 넌 불길하게 무슨 그런 말을 하냐!”
리콘은 여동생 레이나를 타박했다.
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꼭 이기세요. 우리 삼촌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주세요.”
어리다고 해서 그 마음이 가벼울까.
힘없는 비각성자 남매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온 세월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한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이 트기 전 새벽.
한건우는 마리아 베르타의 궁전인 ‘사립 멕시카 교도소’로 향했다.
슈우우-
한건우는 아직 어둑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이런 시간에는 <그림자 맹시>를 발동한 채로 공중을 비행할 수도 있었다.
금세 마리아 베르타가 있는 교도소가 가까워졌다.
높은 담장 안에 궁전 같은 건물이 보였고, 그 뒤로는 후원이었다.
후원에는 빽빽한 정글 같은 숲이 쭉 이어졌다.
‘저 후원이 바로 네펜데스 재배지이고, 각성자를 사료로 줘서 스노우 플레이크를 만들고 있다는 거지?’
한건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만 해도 몹시 불쾌한 일이었다.
육식식물에게 인간을 먹이로 줘서 짜낸 진액.
그 액을 희석해서 마약으로 만들고, 그걸 또 다른 사람에게 주사한다니···.
마약이 똑같은 마약이지, 좋고 나쁜 게 어디 있겠냐마는.
그야말로 인륜을 저버리는 행동이었다.
‘그걸 유지하려면, 각성자를 계속 사냥해 와야겠군.’
각성자 한 명당 마약이 얼마나 생산되는지는 몰라도.
지속적으로 인간 사냥을 해야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음?’
교도소에서 도시로 향하는 쪽 반대편.
이제껏 못 본 방향에 꽤 커다란 진지가 보였다.
한건우에게는 익숙한 모양새였다.
‘군부대로군.’
척, 척, 척.
마리아 베르타의 사병들이 군홧발 소리를 내며 오가고 있었다.
새벽인데도 그쪽은 대낮같은 분위기였다.
슈우욱-
한건우는 날개를 접으면서 지상에 부드럽게 착륙했다.
바삐 오가는 군인의 그림자에 숨어들어, 진지로 조용히 숨어들었다.
한건우는 기감을 올려 주위를 살폈다.
‘각성자 병사만 백여 명. 그리 강한 놈은 없는 것 같지만.’
능력치만 보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마리아 베르타의 특성은 막강한 화력이었다.
그 영향인지 부하들도 흔치 않은 마력 총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여기를 먼저 해결해야겠군.’
한건우는 금방 목표물을 찾아냈다.
바로 마력 포탄을 보관하는 화약고였다.
화약고의 경계가 무척 삼엄했다.
무려 4명의 불침번이 2개 조로 나누어 앞뒤 경계를 서고 있었다.
모두 나이트 비전 고글을 껴서, 어딜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건우에게는 도리어 좋은 신호였다.
‘저렇게 열심히 지킨다는 건, 뚫리면 큰일이 난다는 뜻이나 다름없지.’
한건우는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새로 2명의 군인이 화약고 앞쪽으로 다가왔다.
기존에 보초를 서고 있던 이들이 불평했다.
“이봐, 5분 전 교대 몰라?”
“정각에 왔으면 됐지. 니네 중대는 더 늦어.”
“다음부터 주의해. 보초 설 때는 1시간이 1년 같다고.”
새로 온 군인들이 화약고 벽면의 순찰함을 열고, 뭔가 휘갈겨 서명을 했다.
‘정규군도 아닌데 저런 것까지.’
어딜 가나 군인의 행태는 비슷했다.
한건우는 거기서 몇 가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교대 시간은 1시간에 1회로군. 그렇다면 뒤쪽 조의 교대시간은 30분 후.’
한건우가 그렇게 짐작한 까닭이 있었다.
습격에서 가장 취약한 때는 바로 교대 시간이었다.
그러니 화약고 앞뒤 2개 조의 교대시간은 최대한 멀게 분산할 수밖에 없다.
곧, 30분 후가 뒤쪽 조의 교대시간.
5분 안팎의 오차를 고려하면, 빠르면 25분 후가 될 것이다.
‘좋아.’
[특성 중첩 : 암흑의 별]
[특성 중첩 : 그래비티 필드]
우우웅-
한건우는 공기를 응축하고 또 응축했다.
여기서 계속 압력을 가하면, 사물을 흡수하는 흑점이 생성된다.
하지만 거기서 그쳤다.
흑점이 생성되기 직전, 터질 듯한 압력이 극한에 달했을 때.
[특성 발동 : 공간 왜곡]
한건우는 얇디얇은 공간의 벽으로 풍선처럼 압력점을 둘러쌌다.
누군가 손가락 끝만 갖다대도 폭발할 정도였다.
‘시한폭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군인들 덕분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화약고 뒤쪽에서 보초를 서던 군인 중 하나가 귀를 쫑긋 세웠다.
“방금 무슨 소리 안 들렸어?”
“아니, 뭐 있나?”
보초들은 기민하게 주위를 살폈다.
혹시 침입자를 놓치면 큰일이었다.
포탄이 가득 든 화약고가 공격받으면, 처벌이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목숨이 위험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잘 살펴봐!”
보초들은 눈에 불을 켜고 사방을 살폈다.
나이트 비전 고글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까악-
“뭐야!”
푸드드득···.
지붕 위에서 쉬고 있던 까마귀 무리가 날아올랐다.
“저것들이었나?”
보초 한 명이 혼잣말을 했다.
안도한 마음 반, 김빠진 마음 반이었다.
달칵.
그 사이 뒤쪽의 순찰함이 살짝 닫혔다.
보초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슈우-
한건우는 감시탑 가까이 날아갔다.
‘이제부터 30분, 어쩌면 25분 후.’
후방의 지원부대를 교란할 준비를 마치고, 한건우는 목적지로 향했다.
감시탑 아래, 교도소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2개 분대가 군용 트럭을 타고 줄지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타악.
한건우도 군용 트럭 지붕에 착지했다.
그대로 교도소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트럭 운전석의 군인이 담배를 질겅질겅 깨물면서 불만스럽게 말했다.
“숲에는 그냥 수확꾼들만 보내면 안되나? 정글도 하나 쥐어주면 될 건데.”
“하하, 그래. 무기만 쥐어줘도 열 중 아홉은 살아 돌아올걸.”
“상부에 건의 좀 해. 새벽마다 우리를 동원하는 것보다 그쪽이 낫다고.”
“지금 그런 말할 분위기가 아니야. 아침에 당장 ‘하늘’로 스노우 플레이크를 실어 보내야 해.”
한건우는 낯선 단어의 사용에 주의를 기울였다.
‘하늘? 그게 무슨 뜻이지.’
어쩌면 마약 매매에 사용되는 은어일지도 모르겠다.
“벌써 돌아와? 한참 있다 온다더니 왜?”
“하여간 빨리 하자고. 늦으면 스노우 플레이크를 수확하는 게 아니라 스노우 플레이크가 되어버릴걸. 크하하!”
듣자 하니 군인들의 임무는 숲속에 들어가는 ‘수확꾼’들을 호위하는 것인 모양.
숲 가장자리에 트럭이 멈추었다.
수확꾼으로 보이는 자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겉모습은 균열 광부와 비슷해 보였다.
변변한 방어구 없이 등에 얼기설기 엮은 망태기를 매고 있는 게 그랬다.
입을 꾹 다물고 표정이 어두운 것도 마찬가지였다.
“자 자, 농땡이 피우지 말고 따라와!”
“....”
군인들의 인도를 따라, 수확꾼 한 팀이 어두운 숲으로 들어갔다.
한건우도 조용히 은신한 채 뒤를 따랐다.
스스스···.
스으으···.
굵은 덩굴 줄기가 그들을 노리고 마수를 뻗쳐왔다.
콰직!
쉬익!
군인들이 칼과 곤봉으로 줄기를 쳐냈다.
익숙한 동작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미 한두 명쯤은 저 줄기에 돌돌 말려서 어두운 숲속으로 끌려갔으리라.
“흐억!”
혼비백산한 신참 수확꾼이 벌벌 떨었다.
“저기 안 보이냐, 게으른 놈들아!”
한 군인이 입에서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그러나 수확꾼들이 망태기를 맨 채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한건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건 네펜데스 본체?’
군인이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자주색 항아리처럼 보이는 통이 있었다.
화려한 색깔이 꽃잎 같기도 했다.
휘이익-
스으으-
네펜데스 본체에 가까워질수록, 덩굴 줄기의 공격은 점점 매서워졌다.
아이가 손으로 뭔가를 집어서 입에 넣으려 하는 것처럼.
네펜데스도 줄기를 통 입구에 자꾸 가져다댔다.
‘진액은 어디서 나온다는 거지?’
곧 한건우의 궁금증은 풀렸다.
네펜데스의 통 끄트머리 좁아지는 곳 아래.
그릇처럼 둥글게 모아진 나뭇잎에 새하얀 진액이 모여 있었다.
양으로는 1리터 정도였다.
바로 이걸 희석해서 ‘스노우 플레이크’라는 이계 마약을 만드는 모양이었다.
수확꾼들은 진액이 담긴 나뭇잎을 조심히 떼어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그들의 이마에 진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빠릿빠릿하게 해!”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죽는다!”
수확꾼들이 진액을 망태기 속 양철통에 잘 갈무리해 넣었다.
수확 작업은 얼마 걸리지 않았고, 그들은 곧 다음 네펜데스를 찾아 이동했다.
그런데.
“아저씨, 조심해요!”
“에잇, 망할 풀때기들!”
귀에 익은 소녀의 목소리.
그리고 역시 익숙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왜 여기 있지?’
한건우는 잠시 혼란을 겪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일까.
“으윽!”
“이것 좀 떼줘요!”
“용 아가씨, 가만히 있지 말고 한번만 도와줘!”
박이경과 은설아, 그리고 무심한 표정의 드래곤과 샤벨 타이거까지.
엉망이 된 채로 네펜데스 줄기와 싸우고 있었다.
군인들 역시 그들을 발견했다.
“저것들 어젯밤에 집어넣은 놈들 아닌가? 아직까지 버텼다고?”
“죽여버릴까요.”
“안돼. 팔팔한 채로 넣어야 약효가 좋다고.”
군인들이 옥신각신하는 가운데.
쿠콰아아아-
두웅-
쿠르르···.
“뭐야!”
담장 바깥, 화약고가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