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마리아 베르타 (9) - 육식 식물
“으읍!”
차은비가 묶인 채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절대 그러지 말라는 뜻이었다.
지금 마리아 베르타의 <죽은 자의 날> 특성에 다시 당하면, 그녀는 십중팔구 죽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까지 같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고 갈 수는 없었다.
차은비가 몸부림을 쳤지만, 박이경은 그쪽에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마리아 베르타의 수하들이 마력 구속구를 들고 다가왔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약을 먹였군.”
박이경은 그들의 눈을 보고 깨달았다.
마치 어두운 밤 카메라 렌즈에 잘못 찍힌 사진처럼.
모두 눈동자에 희미한 붉은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아마 장기적인 복용으로 맹목적인 충성을 얻어낸 것 같았다.
‘어? 그렇다는 건.’
박이경은 불길한 기분을 느끼며 시선을 굴렸다.
곧 그가 빠득 이를 갈았다.
척, 척, 척···.
일사불란한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임수호와 임진호, 그리고 이능력 특수전단의 대원까지.
말없이 마리아 베르타의 수하들과 나란히 섰다.
“으읍?”
부하들의 이상한 태도를 보고 당황한 권석진 대장이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아무 소용 없는 몸부림이었다.
철컹!
철컥!
박이경과 은설아, 그리고 드래곤.
세 사람의 양 손목에 마력 구속구가 채워졌다.
슈우우-
박이경의 <거인화>와 <신체 강화>가 풀렸다.
손목에 채운 마력 구속구는 줄어든 몸에 맞게 알아서 조절되었다.
“퉷.”
박이경이 불만에 차서 침을 뱉었다.
“산 채로 후원에 둬. 네펜데스의 먹이로 주게.”
“알겠습니다.”
마리아의 수하가 던파 끝으로 박이경을 쿡 찔렀다.
앞으로 걸어가라는 뜻이었다.
“하.”
박이경이 위협적으로 한숨을 쉬자, 수하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박이경은 숲속으로 걸었다.
양손은 앞으로 묶인 채였다.
은설아는 박이경의 눈치를 보았다.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었다.
그들은 빽빽한 덩굴로 가득 찬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갔다.
“이게 정원이라고? 대체 담장이 얼마나 넓은 거냐.”
이건 숲도 아닌 정글에 가까웠다.
저택의 후원에 온 건지, 균열 속에 들어온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스으으-
그들을 향해 사방에서 덩굴이 뻗어왔다.
덩굴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는 듯.
쉬익!
치이익!
마리아의 수하들이 정글도를 휘두르며 덩굴을 쳐냈다.
숲이 더 짙어지려는 경계에서, 마리아의 수하들이 우뚝 멈췄다.
“앞으로 쭉 걸어가.”
“멈추거나 뒤돌아보면, 저들의 목숨은 없다.”
“알았다, 이놈들아.”
박이경이 투덜거리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은설아와 드래곤이 뒤를 따랐다.
“아저씨.”
“어.”
은설아가 박이경에게 속삭였다.
“어떤 계획이에요? 미리 말 좀 해주세요.”
“어, 그게.”
스스으···.
퍼억! 퍽!
박이경은 앞으로 묶인 손을 휘둘러, 꾸역꾸역 밀려오는 덩굴 줄기를 쳐냈다.
자세히 보니 덩굴 끝에 끈끈이 같은 게 달려있었다.
덩굴 줄기는 느렸고, 충격에 약했다.
그건 다행이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망할, 끝도 없네.”
스으으···.
스으···.
상대는 식물의 줄기에 불과하지만, 셀 수 없이 밀려드니 질렸다.
이미 빽빽한 밀림 속으로 들어온 상황.
사방을 둘러봐도 암녹색의 덩굴 밀림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였다.
게다가 점점 공기는 습해졌고, 숲 안쪽으로 들어올수록 기온도 높아지는 것 같았다.
박이경은 자기 손목을 묶은 마력 구속구를 바라보았다.
“이런 건 맨손으로도 풀 수 있어.”
마력을 끊어서 특성을 못 써도, 박이경의 기본 근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박이경의 팔 근육이 불끈했다.
타아아-
“그렇지!”
수갑처럼 생긴 구속구의 가운데가 뚝 끊어졌다.
그런데 양 손목을 이은 사슬만 끊어졌을 뿐이었다.
손목의 고리는 멀쩡했고, 마력도 쓸 수 없었다.
“어라.”
“저도 일단 끊어주세요.”
티잉-
박이경은 은설아와 드래곤에게도 똑같이 해주었다.
마력 구속구의 연결고리를 끊은 것이다.
모두 팔의 움직임은 자유로워졌지만, 거기까지.
마력 구속 자체는 그대로였다.
“망할. 뭘로 만든 거야? 어이, 드래곤 아가씨. 이것 좀 어떻게 안돼?”
“난 아무것도 안해.”
드래곤이 고개를 휙 돌렸다.
“어? 왜.”
“아까 나보고 안된다고 크게 소리 질렀지?”
드래곤은 단단히 삐진 것 같았다.
은설아가 끄응, 신음을 흘렸다.
임수호 형제를 죽이려고 하기에 급히 막은 것이었다.
거기에 드래곤이 토라져 버릴 줄이야.
“아까는 우리 동료를 죽이면 안 되니까 그런 건데.”
“나는 동료 같은 거 없어. 그리고 너를 공격하는 게 동료야?”
“하지만···.”
“됐어. 난 아빠 말만 들을래. 아빠가 돌아올 때까진 아무 것도 안 할 거야.”
답답한 상황.
검은 마수가 그들을 덮쳤다.
휘익- 타닥.
크어엉!
“검둥아!”
은설아의 샤벨 타이거였다.
구석에 잘 숨어있다가 그들을 조용히 따라온 것 같았다.
터엉- 텅-
샤벨 타이거가 사냥감을 잡듯이 큼직한 앞발로 덩굴을 쳐냈다.
“무사했구나.”
감격한 은설아가 샤벨 타이거의 숙인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샤벨 타이거의 등 위에 가볍게 올라탔다.
박이경은 공격 자세를 취했다가 슬쩍 제자리로 돌아왔다.
“덤비는 줄 알고 식겁했네. 테이밍은 안 풀려?”
“제 테이밍은 마력 스탯만 쓰는 게 아니거든요.”
은설아는 자신만이 개화한 ‘친화력’ 스탯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박이경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 했지만 중요한 건 아닌 듯해 넘어갔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아까 그 여자가 ‘네펜데스’라고 했잖아? 그거에 대해서 좀 아나?”
“균열에서 나는 육식식물이에요. 식물이라고 볼 수 있을지···. 거의 마수에 가까워요.”
마수와 이계 생태에 해박한 은설아가 설명했다.
“육식식물이라. 식물이 먹이를 어떻게 잡아먹지?”
“본체는 커다란 항아리처럼 생긴 통이구요, 거기로 먹이를 잡아오는 덩굴 줄기가···.”
은설아는 문득 샤벨 타이거를 바라보았다.
샤벨 타이거는 날아오는 덩굴 줄기와 싸우고 있었다.
그 줄기가 서로 어떻게 얽어져 있는지, 은설아는 꼼꼼히 살펴보았다.
“뭐 있어?”
“어···. 제 생각이 맞다면.”
은설아가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이미 빽빽한 밀림에 가려서 저택 쪽은 보이지도 않았다.
“맞다면 뭐?”
“이 근처에 본체가 있을 거예요.”
“엉?”
바로 그때.
근방에서 참혹한 비명이 들렸다.
“으아아악! 제발, 저리 가!”
박이경과 은설아는 서로 놀란 얼굴을 마주쳤다.
누가 뭐라할 새도 없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다가갔다.
“다 너희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가···.”
“신이시여!”
아비규환이었다.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밀려드는 덩굴 줄기와 싸우고 있었다.
마력 구속구를 차고 있는 걸 보니, 각성자 같았다.
“도와줘야···!”
“쉿.”
박이경이 은설아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덩굴 뭉치 뒤로 몸을 숨겼다.
이제껏 박이경 일행에게 다가온 덩굴은 장난인 것처럼.
숲의 덩굴들은 그 각성자들 쪽에 꾸역꾸역 몰려갔다.
“뭐 하는 놈들인지 알고 도와줘.”
박이경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도 그냥 두면···.”
은설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박이경이 턱을 까딱했다.
남자들은 치열한 전투 후에 숲에 오게 된 듯.
각자 큰 상처를 입고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다.
힐러가 있어도 소용없었고, 포션이 있다 해도 꺼낼 수 없었다.
아공간 주머니를 여는 데에도 마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이경은 판단을 마쳤다.
“안타깝지만 저놈들, 이미 끝난 목숨이야.”
남자들은 필사적으로 덩굴을 쳐냈다.
그러나 상대는 식물.
고통을 느끼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아무리 쳐내고 잘라내도 끝이 없었다.
느릿느릿, 막을 수 없는 강물처럼 하염없이 밀려오는 덩굴.
심리적으로 저항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각성자들은 눈에 띄게 지쳐갔다.
“허억, 헉.”
“더 이상은···.”
한 명씩 덩굴 줄기에 휘감겨 공중으로 떠올랐다.
스으으···.
“으윽!”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사람들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끌려갔다.
박이경은 신중하게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뒤를 밟았다.
덩굴이 향한 종착지.
사향처럼 진득한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멀찍이서 맡을 때는 달콤했는데, 가까워지니 악취로 느껴졌다.
“저기로군.”
이계 육식식물 네펜데스의 본체가 보였다.
은설아의 말대로, 아주 높고 거대한 항아리처럼 생긴 통이었다.
색깔은 선명한 자줏빛이었고, 위에는 뚜껑이 달려 있었다.
스으으···.
“사, 살려···.”
덩굴 줄기가 남자들을 하나씩 통 속으로 밀어넣었다.
첨벙!
치이이이이-
“크아악!”
끔찍한 단말마가 울려퍼졌다.
반투명한 통 속에 몸부림치는 남자들의 그림자가 비쳤다.
곧 각성자들은 흔적조차 없이 녹아 없어져버렸다.
박이경이 소리를 낮춰 물었다.
“뭐냐, 저거. 어떻게 되는 거야?”
“저 통 속에는 산성의 액이 가득 차 있어요. 먹이를 녹여서 먹는 거죠.”
그 모습을 차마 끝까지 보기 어려웠던 은설아가 고개를 휙 돌렸다.
반면 드래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을 탐욕스럽게 삼킨 네펜데스의 본체가 크게 꿈틀거렸다.
통이 좁아지는 끄트머리.
투명한 꿀 같은 액체가 만들어져서, 이파리 위로 똑 떨어졌다.
마치 사람들을 흡수해서 뽑아낸 정수처럼 느껴졌다.
“좋아. 저 본체만 없애면 된다는 거지?”
“어, 그렇긴 한데.”
박이경은 재고 따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저까짓 식물 따위를 무서워할 게 뭐 있나.
특성을 못 써도, 맨몸으로 부숴버리면 된다.
저 덩굴의 방해만 없으면, 본체를 부수는 건 쉬울 것 같았다.
그가 찢어진 가죽 상의를 주먹에 둘둘 말았다.
두두두···
박이경은 투우사에게 덤벼드는 소처럼 거침없이 질주했다.
목적지는 네펜데스의 본체인 통 쪽이었다.
슈욱-
스스스-
공격을 감지한 것일까.
느릿느릿 움직이던 덩굴 줄기가 엄청난 속도로 본체 쪽으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박이경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투우웅-
터어어억!
박이경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가장 굵은 중심 줄기를 강타했다.
바로 네펜데스의 통을 지탱하는 줄기였다.
투욱-
단 일격으로 중심 줄기가 끊어졌다. 산성 용액을 담은 거대한 통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콰아아-
물풍선이 터지듯 산성 용액이 바닥에서 터졌다.
박이경은 중심 줄기를 딛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앗!”
샤벨 타이거 위에 탄 은설아도 드래곤의 팔을 잡고 피했다.
치이이이···.
강한 산성 용액이 땅에 엎어져 시큼한 냄새를 풍겼다.
땅 위의 흙과 풀잎마저 순식간에 부식되어갔다.
스으···.
투두둑.
덩굴 줄기들이 힘을 잃고 일제히 땅 위로 떨어졌다.
우수수수···.
낙엽이 떨어지듯 이파리도 떨어져 나갔다.
“하핫, 됐다. 별것도 없구만.”
높은 줄기를 잡고 매달려 있던 박이경이 바닥으로 착지하며 웃었다.
쩔그렁.
난데없는 금속성의 소리를 듣고 돌아본 은설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엎어진 통 속에서 수십 개의 마력 구속구가 굴러나왔다.
얼마나 많은 각성자를 잡아먹은 걸까.
그런데 네펜데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또다른 덩굴 줄기가 덮쳐든 것이다.
“뭐야!”
당황한 박이경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은설아는 조용히 말했다.
“네펜데스는 혼자 피는 식물이 아니에요.”
“그러면?”
“이 숲은 네펜데스 군락지인가 봐요.”
“엉?”
“한마디로 네펜데스 꽃밭인 거죠···.”
박이경이 질린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망할.”
그가 욕을 내뱉고, 다시 주먹을 거머쥐었다.
*
일행들을 떠나온 한건우는 주변 마을을 둘러보던 중 생각했다.
‘하루쯤은 잘 버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