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마리아 베르타 (8) - 인질
홀로 남은 박이경이 있는 스위트룸.
2미터에 가까운 거구의 박이경이 어슬렁거리자, 스위트룸의 천장도 낮아 보였다.
“아, 맞다.”
투웅-
박이경이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충격파가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콰아!
강화 유리로 된 창이 동시에 작은 파열음을 내며 깨졌다.
공기 중에 유독한 가스가 남아있을지 모르니, 환기를 통해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보름달의 환한 달빛이 보였다.
시원한 밤공기도 밀려들어 왔다.
아까 그 가스는 세뇌용 약물일 거라고.
권석진 대장이 추측하기로는 그랬다.
박이경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권석진의 부하 대원들을 살펴보았다.
죽은 듯이 잠든 모습이 별 문제는 없어보였다.
“그냥 퍼 자는 것 아니야?”
박이경도 차은비에게 힐을 받기 전까지는 빌빌댔지만.
이미 그런 건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머리를 한 대씩 쳐서 깨워볼까 하다가 말았다.
“아오, 형님도 훌쩍 사라지고, 나만 따분한데.”
한건우뿐 아니라 차은비와 권석진 대장도 둘이서 가 버렸다.
졸지에 혼자 남은 박이경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마침 조직의 본거지까지 들어왔으니, 그냥 정면으로 덤벼서 박살 내면 안 되나.
주먹이 근질거리는 참이었다.
샤아아아-
“어? 이건 뭐야.”
밤바람 속에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희게 반짝이는 가루가 바람을 타고 밀려들어왔던 것이다.
묘하게 진득한 사향 같은 향기도 났다.
‘꽃가루인가?’
봄에 무수하게 날리는 꽃가루와 비슷했다.
박이경은 본능적으로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악! 오빠, 왜 그래!”
옆방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은설아의 목소리였다.
“테이머 꼬마?”
박이경이 조카처럼 귀여워하는 은설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옆방을 살펴보려고 돌아섰을 때.
척-
철컥-
쓰러져 있던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이 박이경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한 명은 석궁, 한 명은 마력 기관단총.
박이경이 재빨리 확인했지만, 안전장치와 잠금쇠까지 풀려있었다.
암만 봐도 그들의 눈빛은 정상이 아니었다.
눈동자에 붉은기가 도는 정도가 아니라, 눈동자 전체가 핏빛으로 새빨개져 있었다.
박이경은 몹시 당황했다.
“어이, 이건 무슨 경우지?”
슈웅-
투두두두-
박이경이 대화를 시도했지만.
답으로 돌아온 건 진심 어린 공격뿐이었다.
박이경이 재빨리 고개를 틀어 피하지 않았다면, 그의 머리가 벌집이 되었을 것이다.
헤드를 노린다는 건 누가 봐도 장난이 아니었다.
“워, 워.”
황당해진 박이경은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처억-
대원들이 다시 공격을 준비하려는 동안.
퍼버억-
풀썩.
턱이 돌아간 대원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전광석화 같은 깔끔한 펀치가 대원들을 기절시킨 것이다.
깔끔한 KO 승.
하지만 박이경의 표정은 편치 않았다.
“갑자기 이놈들이 왜 이래?”
이게 세뇌 약물의 효과인 걸까?
아까는 계약을 쉽게 이끌어내기 위해 이성을 살짝 흐려지게 하는 정도라고 한 것 같은데.
권석진 대장의 말과는 조금 달랐다.
처억!
박이경은 주먹에 너클을 꼈다.
그는 은설아와 드래곤이 있던 방으로 갔다.
“아저씨! 어떡해요, 도와주세요.”
은설아가 박이경에게 절박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은설아도 이제 S급 플레이어.
박이경에게 무작정 도움을 처할 급은 아니었다.
그러나 방안의 상황을 보고, 박이경은 입을 떡 벌렸다.
임수호와 임진호가 눈이 벌개진 채로, 은설아를 코너로 몰고 있었다.
치지지징-
얼음 창이 은설아를 노리고 뻗어나갔다.
옆에서는 드래곤이 멀뚱멀뚱 고개를 갸웃거리며 양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하.”
무슨 상황인지 알 만했다.
차은비가 광역 힐을 뿌렸을 때,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은설아는 세뇌에서 완전히 치유된 듯했다.
드래곤이야 인간이 아닌데다, 애초에 약물 같은 것에 당할 리도 없고.
크르르··· 크르렁!
은설아의 앞에서, 새카만 샤벨 타이거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터엉-
샤벨 타이거가 앞발로 얼음 창을 쳐냈다.
치지지···..
임수호의 얼음 창이 부서졌다.
원래대로라면 저런 간단한 공격에 부서질 창이 아니었다.
박이경은 형제의 움직임을 유심히 보고 깨달았다.
‘세뇌된 상태에서는 특성도, 전투력도 최대 출력을 못 내는군.’
그러나 샤벨 타이거는 임진호와 임수호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는 못했다.
꼬리를 내리고 소극적으로 방어만 하는 데 그쳤다.
이유야 뻔했다.
테이밍된 마수는 테이머의 마음과 공명하는데.
은설아는 도저히 임수호 형제를 진심으로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은설아와 달리, 드래곤은 세상 태평한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죽이면 안 되겠지?”
드래곤이 물었다.
한건우는 자신이 허락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당부를 했었다.
그러나 드래곤이 보기에, 적의를 드러내며 달려드는 상대는 너무 큰 유혹이었다.
파지지···.
드래곤의 몸 주변에 강한 전류가 일었다.
“일단 죽이고 나중에 허락받으면 안 돼?”
“안돼!”
돌아버린 쌍둥이 형제를 상대하랴, 급발진하는 드래곤을 막으랴.
은설아는 정신이 없었다.
처억-
눈이 붉어진 임진호가 메이스를 치켜들었다.
샤벨 타이거의 머리를 내리치려는 것이었다.
투웅-
“적당히 하자.”
박이경이 너클을 부딪치며 주의를 끌었다.
“!”
휙!
임수호와 임진호가 동시에 박이경을 돌아보았다.
똑같이 붉은 눈을 하고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게, 쌍둥이 로봇 같았다.
“미안한데 난 꼬맹이처럼 마음이 약하지 않아.”
쿠웅-
박이경이 대리석 바닥을 박찼다.
디딤발이 밟은 바닥이 살짝 내려앉았다.
[특성 발동 : 신체 강화]
박이경의 온몸이 강철보다 단단해졌다.
그는 자신을 찔러오는 얼음 창을 맨몸으로 뚫으며 임수호에게 접근했다.
가까운 거리를 내준 순간, 박이경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박이경은 원래 강렬한 한 방으로 상대를 넉다운시키는 인파이터형 전사로 알려져 있었다.
박이경의 주먹이 임수호를 노리고 뻗어졌다.
죽지 않을 정도로 강도를 조절했다.
터어엉!
“큭.”
박이경이 신음을 삼켰다.
그의 주먹이 정면으로 가로막힌 것이다.
임수호의 앞.
형인 임진호가 이를 악물고 충격을 버텨내고 있었다.
박이경은 놀랐다.
‘내 공격을 막는다고?’
박이경의 공격을 받아낸 건 임진호의 아다만티움 방패였다.
전 차원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인 아다만티움이니, 공격을 막을 수야 있겠지만.
박이경은 자신의 주먹이 왜 느려졌는지 의문이었다.
수수께끼는 곧 풀렸다.
임진호 아다만티움 방패 위, 빛나는 두 개의 보석과 마주친 것이다.
“하, 저 뱀 눈깔.”
박이경이 투덜거렸다.
두 개의 보석은 <석화 광선>을 쏘는 바실리스크의 눈이었다.
그것 때문에 박이경의 공격 흐름이 잠깐 멈춘 것이다.
타앗-
박이경은 거리를 벌려 카운터를 피했다.
“세뇌를 당해도 우애가 좋구만. 너네들 맨정신 아니냐?”
“....”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저씨, 은비 언니는요? 빨리 저거 풀어줘야 하는데.”
“너네 언니 놀러 나갔다.”
은설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박이경은 심드렁했다.
임진호, 임수호 형제가 제정신으로 총력을 다한다 해도 박이경에겐 못 이길 터.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히지 않고 제압하는 게 까다로울 뿐.
위기감을 느낀 건 아니었다.
타다닷-
다른 방에 있던 대원들이 몰려왔다.
역시나 다들 눈이 시뻘겠다.
“어휴.”
박이경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한심하게 세뇌에 당했냐며 욕하고 싶었지만.
어딘가 찜찜했다.
‘왠지 내가 창문을 열어서 저렇게 된 것 같단 말이야?’
꽃가루처럼 보이던 게 무슨 조화를 일으켰는지 모르겠다.
뭐, 지금에 와서 어쩌랴.
박이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의 빈틈을 노리며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얼음 창살.
자기만 간절하게 쳐다보고 있는 은설아, 그리고 딴청 피우는 드래곤.
박이경이 씩 웃었다.
오랜만에 주인공이 되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까드득-
박이경이 자기 몸과 같은 너클을 조정했다.
“다들 잘 참아. 조금 아플 거다.”
타앗- 콰아앙-
박이경이 <신체 강화>가 들어간 발로 대리석 바닥을 내리찍었다.
층의 바닥 전체가 지진이 난 듯 울렁거렸고, 사람들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퍼억- 쿠우웅-
“크어억!”
“으윽.”
<신체 강화>를 한 박이경은 전신이 무기와 같았다.
박이경이 주먹을 휘두르는 데마다, 하나씩 쓰러지는 사람이 생겼다.
몸집이 크다고 해서 속도가 느릴 거라고 보면 오산이었다. 전신이 폭발적인 근육질로 이뤄져, 순간 가속이 엄청났다.
아웃복서의 화려한 스텝.
박이경이 향하는 방향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1대 다수의 상황인데도, 그 하나가 너무 강하니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한 명이 다수의 상대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였다.
슈우우- 콰악.
박이경은 임진호의 방패 옆으로 돌아가, 몸을 낮추었다.
방패가 막기 어려운 발 부분.
박이경은 발목을 걸어차서 임진호를 넘어뜨렸다.
마지막으로 임수호의 옆구리에 펀치를 먹여 쓰러뜨리고, 박이경은 은설아와 드래곤 쪽으로 훌쩍 뛰었다.
“자.”
“어떻게 하게요?”
“일단 자리를 피하자고. 다시 깨어나면 저놈들과 또 싸워야 해.”
박이경은 은설아와 드래곤을 한쪽 팔에 감아 들고, 큰 창문 쪽으로 황소처럼 돌진했다.
“악!”
콰아아-
강화 유리창이 산산이 조각나면서, 박이경은 허공에 붕 떴다.
쿠우웅-
박이경은 땅바닥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은설아의 샤벨 타이거도 그를 따라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들이 착지한 곳은 저택 뒤쪽 정원이었다.
“헉, 아저씨.”
박이경의 팔에 안겨있던 은설아가 뒤를 가리켰다.
“왜 그래?”
뒤쪽을 돌아보니, 마리아 베르타가 수십 명의 수하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소란을 일으켜서 미안하게 됐소. 동료들이 갑자기 뭘 잘못 먹었는지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박이경이 이죽거리면서 마리아 베르타를 노려보았다.
[특성 발동 : 거인화]
박이경의 몸이 쑤욱 커졌다.
이번에는 옷을 벗어 던질 틈이 없어, 그의 군복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마리아 베르타는 그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술에 문 시가를 빼고 연기를 내뱉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저택 안은 괜찮지만···. 밤의 정원에는 함부로 산책 나가지 말라고.”
스으으-
사람 몸통만 한 진녹색 덩굴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뻗어왔다.
커엉!
샤벨 타이거가 앞발로 덩굴을 쳐냈다.
얼핏 뒤를 돌아본 박이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정원 뒤에 있던 어두운 숲이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스으으으-
‘저 숲, 대체 끝이 어디야?’
원형 담장에 둘러싸인 교도소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담장은 뒤쪽으로 한없이 길게 뻗어있었다.
저택 뒤의 공간은 어둡고 기분 나쁜 숲이 채우고 있었는데, 대체 얼마나 넓은지 가늠이 안 되었다.
어두운 숲에는 암녹색의 덩굴식물이 빽빽이 자라 시야를 뒤덮고 있었다. 식물이라면 멈춰 있어야 하는데, 뱀처럼 서로 뒤엉켜 움직이고 있었다.
타다앗-
박이경이 마리아 베르타를 향해 튀어나갔다.
그 순간, 그는 급브레이크를 밟듯 자리에서 멈췄다.
“어!”
마리아 베르타의 뒤에, 마력 구속구로 꽁꽁 묶인 두 사람이 보였다.
권석진 대장과 차은비였다.
둘 다 치열한 전투를 치렀는지,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정신은 남아있는 모양이지만, 입까지 재갈이 물려서 꼼짝도 못 했다.
철컥.
마리아 베르타는 대형 구경의 총구를 그들에게 겨누었다.
우우웅-
그녀가 마력 탄환을 장전했다.
까딱하면 그들의 온몸이 벌집이 되어 버릴 상황.
“나 참, 한심하게. 인질 잡혔냐?”
“은비 언니!”
박이경이 혀를 찼다.
“아무리 각성자여도, 완전히 벌집을 만들어 버리면 잘 못 살리더라구요.”
마리아 베르타의 수하들이 똑같은 마력 구속구를 들고 다가왔다.
아무래도 인질을 죽이기 전에 알아서 구속구를 차라는 것 같았다.
“권석진 대장은 뭐, 죄송하게 됐수다. 직업이 직업이니 나라를 위해 순직할 수도 있겠지.”
“...?”
“근데 우리 차은비 씨는 음···. 희생 같은 걸 했다가는 억울해서 눈을 못 감을 사람인데.”
박이경이 한숨을 푹 쉬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채워 보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