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마리아 베르타 (7) - 총과 칼
“장군님, 낯선 곳에서 잠이 잘 오세요?”
마리아 베르타가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행히 그녀가 선 곳에서는 침실 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권석진이 결연한 표정으로 방을 나가려 했다.
‘세뇌 약물이라면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봤지.’
방금도 활성화 직전까지 갔다가 깨어났다.
세뇌가 완전히 활성화되면, 꽤 바보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그때 차은비가 조용히 그를 붙잡았다.
‘쉿.’
차은비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고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그녀가 권석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박이경도, 권석진도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킬 : 색소 조작]
사악-
권석진 대장의 두 눈에 희미한 붉은기가 어렸다.
겉보기에는 아까 세뇌 가스를 마셨을 때와 똑같았다.
차은비의 머리카락을 염색하는 데 사용한 색소 조작 스킬 주문서.
미용 목적으로 머리와 눈동자의 색을 바꿔주는 간단한 스킬이었다.
아직 몇 차례의 횟수가 남아있었다.
차은비의 눈썰미로 방금 본 빛깔을 비슷하게 맞춘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파티장에 있는 사람들도 이랬지. 아마 세뇌 가스는 이계 마약과 같은 성분일 거야.’
차은비는 확신했다.
‘오.’
박이경이 보기에도 그럴싸했다.
차은비는 곧 자기와 박이경에게도 스킬을 똑같이 사용했다.
만족한 박이경은 냉큼 앞서 나가려 했다.
그러나 차은비와 권석진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왜?’
박이경이 어깨를 으쓱하며 불만스러운 제스처를 취했다.
권석진은 아직 쓰러져있는 주변의 대원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들뿐만 아니라, 옆방에는 은설아와 드래곤도 있었다.
‘뭐, 나보고 뒤에서 사람들이나 지키라고?’
박이경은 명령을 받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트롤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소리 없이 툴툴거리면서 침대에 주저앉았다.
권석진과 차은비는 느릿한 걸음걸이로 현관으로 나갔다.
둘 다 머릿속으로는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뇌 약물을 쓴다고 해서 바보가 되는 건 아니야. 이성과 경계심이 흐려져서 남을 잘 믿고 어리숙해질 뿐이지.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하면 된다.’
권석진의 생각이었다.
‘아까 파티장에 있는 사람들은 들떠 보였는데. 어디까지가 약물 성분의 영향인지 알 수 없네. 일단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겠지.’
차은비까지 함께 나온 걸 보고, 마리아 베르타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같이 계셨네. 단둘이 얘기하고 싶었는데.”
마리아 베르타는 그들 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았다.
세뇌 가스가 효과가 있는 건지 살펴보려는 게 분명했다.
권석진 대장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침 잘됐네요. 일 얘기도 같이 하려고 했는데. 따라와요.”
“예···.”
마리아 베르타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권석진에게 팔짱을 끼고,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장군님이 한국 대통령과 가장 친밀하다면서요? 제 부하들 말로는 대통령의 심복이고, 중요한 일은 모두 맡아서 한다던데. 맞아요?”
“하하, 잘 보셨습니다.”
권석진 대장은 실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차은비가 보기에도 긴장이 완전히 풀린 사람처럼 보였다.
‘뭐야. 연기력이 괜찮은데?’
뒤에서 지켜보던 차은비는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한건우가 가까이 둘 만한 사람이었다.
“이쪽으로요.”
마리아 베르타는 자신의 침실 겸 집무실로 그들을 데려갔다.
방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넓었다.
큼직한 손님용 소파까지 놓여 있었다.
벽 쪽에는 그녀의 수하들이 무릎을 꿇고 대기하고 있었다.
“술 한 잔 가져와.”
“예.”
수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수하가 아니라 거의 몸종에 가까웠다.
왕조 시대의 노예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쪼르륵.
마리아의 수하가 술잔에 데킬라를 채웠다.
그 수하는 마지막으로 마리아 베르타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그녀의 귓가에 빠르게 무어라고 속삭였다.
‘!’
자기들의 암호 언어인 걸까.
통역 스킬로는 해석되지 않는 말이었다.
마리아 베르타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권석진과 차은비 쪽을 바라보며 잔을 들었다.
“내가 술이라고 부르는 건 데킬라밖에 없어요. 아마 깜짝 놀랄 거예요.”
‘내키지 않는데.’
권석진은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술에 취할 것 같아서는 아니었다.
신체의 해독 능력이 강한 각성자는 술을 먹는다고 해도 취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잠깐 기분이 좋아지는 정도에 그쳤다.
지금은 모든 게 의심스러운 상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권석진 대장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혹시나 잘못되어도 차은비 씨가 있으니.’
권석진은 데킬라를 한 잔 털어 마셨다.
옆을 보니 차은비는 술잔에 입을 댔지만, 거의 마시지는 않는 것 같았다.
마리아 베르타가 본론을 말했다.
“장군님, 나랑도 친하게 지낼까요? 고작 한국 대통령과는 비교가 안 되게, 훨씬 많은 걸 해줄 수 있는데.”
“하하하, 저야 좋죠.”
그녀는 한국에 자기 사람을 만들려는 것 같았다.
“아니면, 장군님이 직접 대통령 자리에 앉아도 좋고. 뭐가 필요할까. 돈? 무기? 나한테 많아요.”
“······.”
권석진은 인정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여기서 큰 유혹을 느꼈을 것이다.
맨정신으로 보아도 마리아 베르타는 무척 매혹적이었다.
그녀가 가진 힘과 재력도.
그만큼 위험한 여자이기도 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군.’
권석진은 멍청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리아 베르타가 다 됐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친해져야 하니까 우리 며칠만 같이 놀까요?”
“예?”
“내 침실이 넓어요. 장군님은 숙소를 여기로 옮겨도 될 것 같아.”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그러나 세뇌에 당한 척하기로 한 이상, 여기까지 와서 발을 뺄 수는 없었다.
“저야 당연히 좋습니다.”
“그럼 계약 건은 후딱 끝내버릴까. 자, 펜이랑 계약서 가져와.”
마리아 베르타가 수하에게 손짓했다.
미리 준비해놓은 게 있는 모양.
수하는 반문 한번 하지 않고 바로 계약서를 가져왔다.
“퀸, 여기 있습니다.”
수하가 무릎을 꿇고 계약서를 바치자, 차은비는 속으로 기함했다.
‘퀸?’
여왕님이 따로 없다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더 중증인 것 같았다.
“우리 군 법무관님이 검토해 볼래요?”
마리아 베르타가 미소지으며 차은비에게 계약서를 보여주었다.
‘헉.’
계약 내용을 훑어본 차은비는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놀란 기색을 보이면 제정신인 걸 들킬 테니.
포커페이스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차은비는 물론 군 법무관이 아니었지만.
법률적인 지식이 별로 없어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제까지 본 계약서 중에 이렇게 악질적인 건 처음이었다.
‘와, 이게 뭐야.’
명색이 한국 정부와 국제 범죄조직 간의 계약서인데.
하나부터 열까지 압도적으로 마리아 베르타 측에 유리한 조항만 담겨있었다.
- 대한민국 정부는 도스 시엔토스에 항만과 공항을 전면 개방하고, 판매를 위한 지점을 정부의 비용으로 개설한다.
- 대한민국 정부는 도스 시엔토스의 독점 판매권을 보장하고,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타 조직의 물건을 유통하다 발견될 시, 판매 손실 추정분을 배액으로 배상한다.
- 도스 시엔토스의 매출액이 전년보다 줄어들 경우, 줄어든 금액을 전액 배상한다.
‘이건 완전히 착취잖아.’
바보 천치가 아니고서야 이런 계약서에 제 손으로 서명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나마 단체 명의의 계약이라서 계약서 스크롤을 쓰지 못하는 게 다행이랄까.
그런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계약을 어기면 어떻게 되지?’
- 계약 당사자는 계약금을 지정된 계좌로 입금한다. 당사자 중 일방이 계약 내용을 어기거나 파기하고자 할 경우, 계약금은 위약금 조로 상대방에게 지급된다.
계약금 : 한화 1,000,000,000,000 원
‘뭐? 계약 위약금이 1조 원이라고?’
돈이라고는 부족함 없이 살아온 차은비였다.
그녀도 상상 못할 금액이었다.
썩은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인내력이 필요했다.
‘일단 절대 여기에 사인하면 안 돼. 시간을 끌어야 해.’
권석진이 오기 전, 공식 사절단으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 미리 대통령의 위임장을 보낸 터였다.
권석진이 서명하면 계약서에 효력이 생기게 된다.
“계약서 내용이 어때요, S급 힐러 차은비 씨?”
“그게······?”
“?”
권석진과 차은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다면 바보겠지. 무슨 생각으로 군복을 입고 여기까지 따라온 건지 설명해봐.”
이 정도는 예측한 범위 내였다.
차은비는 당황을 숨기고 머쓱한 척 말했다.
“저도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왔어요. 권석진 대장님을 호위하려고요.”
“못 믿겠어. 무슨 꿍꿍이일까?”
“그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나누어주지.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마리아 베르타는 술잔을 뒤집으며 한 번에 비웠다.
“ 입으로만 질문하는 사람은 바보다. 제대로 된 대답을 원하면 총과 칼을 써야 하는 거야.”
그녀가 빈 술잔을 위로 휙 던졌다.
찰나의 순간, 권석진과 차은비는 날아가는 술잔에 시선을 빼앗겼다.
[특성 발동 : 죽은 자의 날]
투우우- 콰아!
마리아 베르타의 손가락 끝에서 총기도 없이 십자 포화가 쏘아졌다.
[특성 발동 : 압축 공기탄]
투두두두-
그에 질세라, 권석진도 압축 공기탄을 쏘아냈다.
[특성 발동 : 신의 가호]
공격을 대비하고 있던 차은비는 자신과 권석진을 보호하는 최강의 방어막을 펼쳤다.
투콰아악-
마리아 베르타의 넓은 침실에 포탄이라도 떨어진 듯 큰 진동이 울렸다.
2대 1.
세 사람이 만드는 1합이 부딪친 후.
파스스···.
매개한 회색 연기가 스러지고, 참상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수하들 몇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폭발의 충격파에 맞아 절명한 것이다.
“너희들, 어떻게 세뇌에 안 걸렸지?”
마리아 베르타는 부하들이 죽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다.
권석진과 차은비를 보면서 눈을 빛낼 뿐이었다.
“아무리 예민해도 인간의 감각으로는 감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막았을까. 둘 다 특수 체질이야?”
“....”
마리아 베르타는 진심으로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만들고 후 불었다.
“대답을 안 해주네. 박사한테 맡겨서 머리를 열어 봐야겠어.”
“윽···.”
차은비의 등을 타고 극도의 긴장이 올라왔다.
마리아 베르타의 협박 때문이 아니었다.
방금 마리아 베르타의 공격은 절대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경고 조로 던진 가벼운 공격.
하지만 차은비가 받아내 보니, 그 무게감은 다른 각성자의 공격과 차원이 달랐다.
‘다음을 보장할 수 없어.’
철컥.
마리아 베르타가 아공간 무기집에서 총기를 뽑았다.
대형 구경의 마력 총화기였다.
“헉.”
차은비가 숨을 삼켰다.
맨손으로 쓸 때도 막기 어려웠는데.
그 공격을 제대로 된 총화기에 싣기까지 하면 어떨까.
‘저걸 총이라고 할 수 있나?’
총신은 짧았지만, 총이라기보다 함포에 가까웠다.
차은비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 <신의 가호>로 방어막을 만들었다.
‘버텨야 해!’
스응-
권석진이 전술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클레이모어를 꺼내들기에는 공간이 좁았다.
투두두- 콰아-
마검사인 권석진의 선공이었다.
그는 압축 공기탄을 발사하면서, 동시에 사각을 노려 초근접거리로 들어갔다.
‘초근접 상황에서는 냉병기가 나을 수도 있어.’
권석진은 마력 총화기를 보고도 두려움 없이 냉정한 판단을 했다.
그러나 마리아 베르타의 특성은 단순한 총화기 그 이상이었다.
마리아 베르타는 총구를 정면으로 겨누고 환하게 웃었다.
쿠콰과과과-
“크윽!”
총구의 방향과 상관없이, 체온을 가진 생명체를 향해 포화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