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마리아 베르타 (6) - 세뇌
마리아 베르타는 자신의 집무실 겸 침실에 있었다.
푹신한 깃털 침대 위에서 팔꿈치를 괴고 옆으로 누운 채였다.
건장한 하인이 그녀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고, 다른 하인은 쿠바산 시가에 불을 붙였다.
꼭 이런 자세로, 그녀는 남미 땅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결정하곤 했다.
작게는 적대 조직원을 어떻게 잔인하게 죽일지.
크게는 주변국의 정세까지.
마리아 베르타는 일 중독자에 가까웠다.
죽는 날까지 카르텔의 집무를 보았던 마리아의 아버지처럼.
마리아의 아버지는 ‘킹’이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큰 조직을 다스렸다.
원래 마리아는 ‘킹’의 막내딸일 뿐, 조직의 후계자가 아니었다.
이 자리를 얻기 위해 이복 형제자매들과 싸우고, 일부는 죽였다.
형제 자매들의 시체 위에 왕좌를 만들었다.
그렇게 마리아 베르타는 남미 최강의 각성자 범죄 카르텔, 도스 시엔토스의 수장이 되었다.
마리아 베르타는 자신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곤 했다.
‘자격 증명.’
그녀가 수장 자리를 물려받은 후, 도스 시엔토스를 날이 다르게 발전시켰다.
무언가를 세상에 증명하고 싶은 것처럼.
그건 실제로도 착착 이뤄지고 있었다.
멕시코시티를 넘어 멕시코 전역, 그리고 남미 대륙 전역까지 조직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버지도 이르지 못했던 자리를 얻었지.’
세계를 뒤에서 주무르는 최강의 조직.
아르고스의 네 번째 주인 자리.
이건 타고난 것도, 물려받은 것도 아니었다.
마리아 베르타는 그 점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그 늙은이들에 비하면 아직 모자라.’
큰 물에서 놀아보니 자신의 부족함을 느낄 수 있었다.
‘더 강해지려면 예언 석판을 찾아야 해. 그런데 나머지 두 조각이 남미에서 나온다는 보장이 없으니.’
그 때문에 바다 건너까지 세력을 확장하려고 넘보고 있는 그녀였다.
마리아 베르타의 침상 앞.
부하 조직원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퀸, 보고 드립니다.”
“어땠어?”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부하 조직원은 움찔했다.
멍청하게 반문을 하거나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가는, 그녀가 키우는 식충식물 화원에 던져질지 모른다.
다행히 부하는 눈치 빠른 축이었다.
그 역시 대를 이어 마리아 베르타의 조직을 모셔온 부하였다.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박사 말로는 음식에 섞어서 먹이는 것보다 기화시키는 게 더 흡수가 잘된다고 합니다.”
“그래? 잘했어. 다음.”
마리아 베르타의 관심은 뒤에서 무릎을 꿇고 기다리는 다른 부하에게 넘어갔다.
그녀가 동시에 간을 보고 있는 국제적인 계약 건만 수십 건.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길 수는 없었다.
“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뭔데?”
마리아 베르타가 살짝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시간 낭비를 싫어했다.
그걸 알기에, 부하는 긴장한 채로 결론부터 말했다.
“한국의 군인 놈들이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설치된 도감청 장비를 다 무력화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약효가 전원에게 다 확실히 들어갔는지는 확인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 누가 문제가 될 것 같아?”
“미성년자인 아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쪽이···.”
“연구팀은 뭐라고 했나?”
“박사 말로는 이번 건은 호흡을 통해 흡수하기 때문에 애나 어른이나 차이가 없을 거라고 합니다.”
부하는 마리아의 기색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퀸, 약효가 들지 않은 자들을 죽일까요?”
마리아 베르타가 소리내어 웃었다.
“됐어. 어차피 내 손바닥 안에 제발로 기어들어온 놈들인걸.”
“예.”
그녀가 시가 연기를 내뿜었다.
“하지만 지켜볼 필요는 있겠군.”
“알겠습니다, 퀸.”
보고를 무사히 마친 부하는 마리아 베르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절대적인 복종의 표시였다.
*
“흐윽.”
차은비는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광역 발동한 <신의 가호>가 먹혀들어간 듯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닌지, 누가 머리를 쥐어짠 것처럼 지끈거렸다.
‘방금은 뭐였지. 분명히 무색 무취의 기체가 우리 일행을 공격했고···.’
꼼짝없이 독연 공격을 당한 것만 같았았다.
차은비는 옆 침대를 바라보았다.
“설아야?”
“언니, 괜찮아?”
은설아도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부스스한 모습이 잠깐 사이에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 같았다.
차은비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신의 가호>를 발동했다.
이번에는 자기와 설아만을 타겟으로 했다.
아까보다 출력이 몇 배는 높았다.
사아아···.
은빛의 광채가 차은비의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안개 낀 듯 흐리멍덩하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지끈거리던 두통이 씻은 듯이 가셨고, 피로했던 몸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앗.”
은설아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혼자 말짱하던 드래곤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이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이 방은 완전히 회복되었고.
차은비는 다른 일행의 상황이 궁금했다.
마리아 베르타가 내준 스위트룸에는 문이 없었다.
공기의 흐름이 하나로 이어져 있으니, 일행 중 누구도 가스의 침범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으리라.
‘<신의 가호>가 확실히 먹히긴 하는데. 광역기가 어느 범위까지 들어갔지?’
운이 좋다면 차은비가 뿌린 가호가 일행을 전부 커버해줬을지도 모른다.
‘한건우 씨가 여기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건우가 있으면 어떻게든 사건을 해결해줄 수 있을텐데.
그는 멀리 이동한 모양이었다.
차은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새삼 한건우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마냥 그가 돌아오기만 기다릴 수 없는 상황.
차은비는 가까운 옆 침실로 갔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리의 리더를 돕는 게 먼저였다.
침실 안에는 권석진 대장과 부하들이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듯했다.
이능력 특수전단의 실력이라면, 방에 타인이 침입했는데 태평하게 잠들어있을 리 없으니까.
“대장님.”
차은비는 가장 먼저 권석진 대장 쪽으로 다가갔다.
권석진 대장은 뭔가와 싸우는 사람처럼 온몸에서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
그가 침대에 누운 채로 헛것을 본 듯 팔을 휘둘렀다.
휘익-
“권 대장님, 가만 있어 봐요.”
차은비는 권석진 대장이 휘두르는 팔을 요령 좋게 피했다.
눈먼 주먹이지만 잘못 맞기라도 하면 꽤 타격이 있을 것이다.
힐러 일을 하다 보면 각성자들의 눈먼 공격을 피하는 데 고수가 되기 마련이었다.
처억!
차은비는 권석진 대장의 몸 위에 올라타서 양 어깨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사아아···.
그녀가 정신을 집중해서 <신의 가호>를 권석진에게 흘려넣었다.
순도 높은 고출력의 힐이 쏟아지자, 권석진의 상체 근육 전체가 움찔했다.
하지만 차은비는 불만족스러웠다.
‘공격의 정체가 뭔지 모르니 힐의 낭비가 심한걸?’
차라리 독이나 저주 같은 공격에서 낫게 하는 거라면 쉬울지도 모르겠다.
독에 맞는 해독제를 붓는 격으로 힐을 적용하면 되니까.
지금의 힐은 비효율적이었다.
한 스푼 떨어진 물질을 희석하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물을 붓는 격이었다.
“허억.”
권석진 대장은 누운 채로 크게 숨을 들이키더니, 눈을 번쩍 떴다.
‘어라, 눈이 왜 이리 붉지?’
차은비는 권석진 대장의 눈을 보고 조금 놀랐다.
단순히 흰자위가 충혈된 게 아니었다.
아까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처럼 동공에 붉은기가 보였다.
차은비가 마지막으로 힐에 박차를 가했다.
흉흉한 붉은 기운이 권석진을 빠져나갔다.
마치 퇴마가 된 듯한 모양새였다.
“···차 소령?”
“괜찮아요, 대장님?”
차은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와, 이 상황에서도 바로 차 소령이라고?’
기절했다가 막 일어난 상황인데도, 임무를 위한 설정을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다른 군인들은 몰라도 권석진 대장이라면 인정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기 중에 뭘 섞어서 살포한 것 같아요. 아직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
차은비가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혹시 모를 도청을 의식해서 조심하는 것이었다.
아까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가능한 도청, 감청 제거 방법은 다 사용했다.
안 그래도 불안한 장소인데다, 명색이 교도소로 지은 건물이라는 찜찜한 배경까지 있으니.
철저하게 조사하니,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은 장비들이 나왔다.
- 이게 전부인 것 맞아?
오히려 너무 많이 찾아내서 더 불안한 판국이었다.
권석진 대장도 주위를 살피며 낮게 대답했다.
“기존에 알려진 독이나 저주는 아닌 것 같습니다. HP가 깎이는 것도 아니었고요. 공격이었다면 우리 대원들도 알아차렸을 겁니다.”
“하긴 그렇죠.”
찜찜했지만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차은비의 의문은 여전했다.
공격용이 아니라면 그건 대체 뭐란 말인가?
권석진이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제 생각에는 세뇌용 약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뇌요?”
“오래전부터 외교나 국제적인 계약에서 간혹 있었던 일이죠. 사절에게 세뇌 약을 써서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는 겁니다.”
“알았으면 진작 막지, 왜 당했어요?”
차은비가 톡 쏘아붙였다.
권석진 대장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전통적인 방식만 생각했죠. 음료수나 음식만 조심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휴··· 일단 다른 사람들도···.”
차은비가 옆 침대에 있던 부하의 상태를 살펴보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권석진의 침실 앞에 선 박이경과 떡하니 눈이 마주쳤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박이경은 어떻게 멀쩡히 돌아다니는지는 둘째치고.
크게 오해할 만한 구도였다.
차은비가 권석진 대장의 침실에 들어와서 그를 깔아눕히고 있었으니까.
“오, 내가 방해했나?”
“그러니까··· 이상해보일 수 있는데 진짜 오해예요.”
차은비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오케이. 좋은 시간 되고.”
차은비는 서둘러 박이경을 붙잡았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몸놀림이었다.
“잠깐! 그러고 가면 어떡해요.”
“왜?”
박이경의 반응은 평소보다 둔했다.
차은비는 박이경의 몸 상태를 살펴보고 기함했다.
“대체 어떻게 이러고 두 발로 걸어다녔어요?”
“아무리 나라도 네 발로 걷지는 않는다고.”
박이경은 실없는 농담을 했지만, 그의 이마에서는 진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거의 방금 힐을 넣어주기 전의 권석진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괴물이야, 완전.”
차은비는 혀를 쯧쯧 차면서 박이경의 양 팔에 손을 얹었다.
권석진 대장에게 한 것처럼 힐을 넣어주자, 박이경은 거의 죽다 살아난 표정을 지었다.
“고맙다. 역시 유능한 힐러가 있고 볼 일이야.”
“됐어요.”
“처음부터 완벽하게 막아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억!”
차은비는 박이경의 등을 찰싹 때렸다.
“어?”
그들이 모두 흠칫 멈추었다.
“방금 무슨 소리지?”
“누가 찾아온 것 같은데요.”
스위트룸의 현관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였다.
이 야심한 밤에 누가 숙소를 찾아온단 말인가.
게다가 세뇌 약물로 추정되는 가스까지 들어왔던 터였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어떡해요?”
“뭘 어떡해. 괘씸한 놈들. 쳐부숴 버리자.”
“잠시만요.”
그때 권석진 대장이 다른 의견을 냈다.
비록 박이경보다 힘은 약하지만, 그는 작전의 책임자였다.
한건우가 없을 때는 그가 리더였다.
“순순히 세뇌당한 척을 합시다.”
“네?”
“저들도 혹시나 해서 확인하러 온 걸겁니다. 아니라면 공격을 하거나, 아예 없었던 일처럼 잡아떼겠죠.”
“그야 그렇지만···.”
차은비는 불안하게 눈을 돌렸다.
지금 다른 대원들을 하나하나 치유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잘만 된다면 상대방을 방심시키고 한건우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는 좋은 전략이긴 했다.
하지만···.
‘권석진 대장이 그런 연기력이 되나?’
덜컥!
노크는 폼인지, 바로 스위트룸 바깥 문이 열렸다.
마리아 베르타가 혼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