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마리아 베르타 (4) - 교도소의 귀빈
임진호의 등 뒤에서 맹렬한 열기가 쏟아졌다.
“!”
돌아보고 확인하면 이미 늦는다.
스응- 척!
임진호가 아공간 무기집에 손을 넣었다.
아다만티움 방패를 든 것이었다.
셀 수 없는 훈련과 실전에서 했던 대로였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방어 자세를 잡은 순간.
치지지직!
임진호와 화살 사이에 얼음 방어벽이 생겨났다.
“허억!”
얼음 방어벽이 만들어지는 속도가 너무나 빨라, 거의 폭발에 가까웠다.
또다른 공격인 줄 알고 놀란 사람도 있었다.
콰아-
치지지지···.
기세 좋게 쏘아진 화염 화살이 얼음 방어벽에 가로막혔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전소되어 버렸다.
불꽃 하나도 튀어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뭐 이런···?”
화염 화살을 쏜 대원이 당황했다.
진짜로 임진호를 죽이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임진호가 이능력 특수전단을 만만하게 보는 게 싫었다.
단지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짧은 찰나에 내 화염 화살을 막았어?’
서로 공격을 대비하고 있던 상황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그야말로 예상치 못할 기습인데다, 거리도 무척 가까웠다.
저렇게 간단히 막을 수 있는 공격은 아니었다.
‘누구지?’
한건우가 나서기라도 한 걸까.
대원은 긴장했다.
그가 자신의 화염 화살을 막은 방벽을 바라보았다.
투명하고 단단한 얼음의 벽.
마치 수백 년 간 그 자리에 서 있던 양 견고해 보였다.
치지지지···.
임수호가 손을 거두자, 얼음 벽은 수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대원을 노려보는 임수호의 눈빛은 얼음보다 더 차가웠다.
“감히 내 앞에서 우리 형을 공격해?”
“수호야, 그만. 괜찮아.”
오히려 임진호 쪽에서 조용히 동생을 말렸다.
평소에는 냉정해 보여도 꼭지가 돌면 누구보다 무서운 게 수호였다.
동생이 괜히 상대방을 죽이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된 것이다.
‘드디어 앙숙끼리 서로를 알아봤군.’
한건우는 이마에 손을 갖다댔다.
이런 것도 운명인 걸까.
‘싸울 사람은 싸우게 되어있는 건가?’
방금 화염 화살을 쏜 사람은 이지환 하사.
그 역시 한건우가 알던 대원이었다.
경력은 한건우보다 길었지만, 한건우가 먼저 승진해서 치고 올라가면서 나중에는 계급이 역전되었다.
회귀 전, 임수호와 이지환은 수시로 치고받고 부딪쳤다.
누구 한 명이 크게 잘못해서는 아니었다.
물과 기름처럼 모든 게 반대였다.
반대인 성격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 좋겠지만, 그건 희망사항일 뿐.
말 그대로 상극이었다.
‘이번에도 텄군.’
임수호와 이지환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이지환이 양 팔을 펼쳤다.
콰아아아-
이치환의 주변에 화염 고리가 생겨났다.
화염 고리가 위성처럼 이지환의 주위를 돌았다.
그가 자랑하는 화륜 공격이었다.
지켜보던 권석진 대장이 앞으로 나서려 했다.
위험한 싸움으로 번지는 걸 말리려는 것이었다.
턱!
한건우가 권석진 대장의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뜯어말려 봐야 또 충돌합니다. 서로 성질이 풀릴 때까지 싸우게 해보죠.”
권석진 대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뒤로 물러났다.
한건우는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지금의 이지환은 임수호의 상대가 못 돼.’
화아아-
이지환이 거창하게 보법을 전개하며 팔을 휘둘렀다.
그의 화륜이 임수호에게 휘몰아쳤다.
임수호는 얄미울 만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특성 발동 : 빙정난류]
샤아아아-
치지지-
“억!”
이지환의 화륜 공격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화륜에서 튀어오르던 불꽃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주 무기인 화륜이 무력화되자, 이지환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이지환은 얼른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려 했다.
투툭··· 치지징-
“허억!”
날카로운 얼음의 창이 이지환의 뒷목에 선득하게 닿았다.
이지환이 제자리에 멈춘 순간.
투두둑-
수십 개의 얼음 창이 사방에서 뻗어왔다.
앞뒤는 물론 양 옆, 위쪽까지.
360도 사방에서 뻗어온 얼음의 창을 피할 틈이 없었다.
파아아-
이지환이 자신만만하게 불꽃을 폭파시켰다.
그러나 잠시 후, 이지환은 당황했다.
‘얼음이잖아. 왜 안 녹아?’
이건 얼음이 아니라 강철인가 싶을 정도였다.
이지환의 화력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갈 길이 없어!’
임수호가 마음만 먹으면 이지환은 고슴도치가 되어버릴 상황.
이지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
이지환은 다혈질이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상황이 끝날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입이 벌어지고, 항복의 말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져, 졌다.”
그러나 임수호의 딱딱한 얼굴은 풀릴 기색이 안 보였다.
치지지···.
“억!”
오히려 얼음 창은 더 가까이 접근했다.
송곳 끄트머리 같은 얼음 창끝이 이지환을 치밀하게 가두었다.
“내, 내가 졌다고!”
임수호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무자비했다.
단 1 센티미터만 움직여도 창끝에 몸이 찔릴 상황.
이지환은 숨통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과거에 했던 말까지 사과해. 그러면 용서하지.”
“자, 잘못했다! 내가 경솔했어.”
이지환은 서둘러 사과했다.
스으으···.
얼음 창이 수증기로 변해 사라졌다.
“허억···.”
온몸에 힘이 빠진 이지환은 그만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보기 좋게 패배했다.
열패감이나 수치심보다, 더욱 본능적인 감정이 그를 휘감았다.
‘살았다.’
바닥을 보며 눈을 껌뻑이던 이지환이 고개를 들었다.
임수호가 표정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지환의 뇌리에는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이놈을 균열에서 안 만나서 천만 다행이야.’
이지환은 인정했다.
이런 상황이라서 살았다.
진짜 실전이었다면, 그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지환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임수호 플레이어, 내가 주제넘었다. 다시 한 번 사과할게. 너희 형, 임진호 플레이어에게도.”
깨끗한 인정이었다.
“후우.”
권석진 대장도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 순간, 그는 끊었던 담배가 몹시 고팠다.
나름대로 부대에서 날린다는 대원들인데.
완력이면 완력, 마법이면 마법. 완전히 압살을 당해 버렸다.
권석진 대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대원들에게 경고했다.
“전 부대원. 더 소란을 피우면 그때는 내가 가만 안 두겠다.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권석진 대장을 따라 대기실로 들어가면서, 대원들은 한건우 길드 쪽을 흘끔거렸다.
다들 속으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부대원들만 모인 대기실 안.
“쌍둥이 말야. 저 중에선 그나마 평범한 축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 물꼬를 텄다.
그러자 기다렸던 듯이 한숨이 쏟아져나왔다.
“임수호와 임진호까지 저런 괴물이었단 말야?”
“대체 다른 길드원들은 얼마나 강하다는 거지?”
군 각성자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자부심을 가졌던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격양되었던 분위기가 한껏 가라앉았다.
“이번 임무, 평소보다 더 긴장해야겠군?”
“어?”
“한마디로 저런 수준의 각성자들이 필요한 임무라는 거잖아.”
“....”
의미심장한 침묵이 흘렀다.
*
위이이잉-
정비를 마친 마정석 군용기가 이륙을 시작했다.
조종사가 필요없는 무인 기체였다.
“몇 시간 안 걸리니 편히 쉬시죠.”
한건우가 제안했다.
아직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확실히 변화가 생겼다.
아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같았는데, 이제 질서가 잡혀 있었다.
‘군인은 위아래가 확실하면 더는 덤비지 않지.’
한건우의 예상대로였다.
임수호와 이지환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한쪽이 우세한 게 확연하게 드러나니, 싸울 이유도 없었다.
이지환은 이제 임수호에게 찍소리도 못했다.
눈빛 자체가 바뀌어 있었다.
“이걸 진짜 입어야 해요?”
차은비가 불만스럽게 물었다.
“넌 너무 눈에 띄잖아. 신분을 감추려면 노력을 해야 할 것 아냐?”
박이경은 이미 군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의 사이즈에 맞는 옷이 없어 특별 제작까지 했다.
“아니, 당신이 할 말이 아닌데요? 백 미터 밖에서 봐도 박이경인데?”
“그건 네가 나한테 관심이 많아서 그렇고.”
“나 참.”
박이경은 베레모를 쓰고, 준비한 군용 고글까지 꼈다.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군인처럼 보였다.
차은비는 투덜거리면서 옷을 받았다.
새까만 정장 같은 군 정복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옷만 입는 차은비의 취향과는 전혀 달랐다.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차은비가 좌석에서 일어났다.
군복을 갈아입고 돌아온 그녀를 박이경이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박이경이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오오, 딴 사람인데? 처음부터 이렇게 다녔으면 반했겠어.”
“그만 해요, 진짜. 완전 아저씨 같아.”
차은비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그녀가 좌석에 앉아서 색소 조작 스킬 주문서를 꺼냈다.
사악-
금발로 염색한 단발 머리카락이 흑갈색으로 변했다.
그런 스킬을 처음 보는 군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이경의 말처럼, 차은비는 딴 사람 같았다.
어색할 것 같았던 위장 신분도 제법 그럴싸했다.
차은비가 한건우에게 확인차 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군 소속 법무관이고, 권석진 대장님을 보좌해서 계약 업무를 보조하러 왔다는 거죠?”
“네, 그겁니다.”
“들키면 어쩌죠? 사관학교에서 법을 배우긴 했어도 전문가는 아닌데.”
“신경쓸 것은 없어요. 어차피 진짜 계약할 것도 아니니까.”
어차피 여기서 가방끈이 가장 긴 건 차은비이니, 대안은 없었다.
대학 문턱이라도 밟은 사람은 그녀뿐이었으니까.
“그럼 한건우 씨는요?”
“저는 도착하자마자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다른 일행들이 대통령의 비밀 사절단이 되어 일정을 수행할 동안.
한건우는 자취를 감출 생각이었다.
권석진 대장이 한건우에게 말했다.
“시간을 잘 끌어보겠습니다만.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계약을 무효화할 핑계는 많으니까요.”
“아닙니다. 힘들게 거기까지 가는데 성과를 거둬야죠.”
“하지만···.”
한건우가 씩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대장님. 우리가 언제 실패한 적 있습니까?”
한건우는 아차 싶었다.
권석진 대장, 그리고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과 함께 임무에 출동하는 상황.
무의식적으로 혼동이 되었는지, 자기만 아는 회귀 전의 기억을 꺼내버린 것이다.
권석진의 눈이 커졌다.
그가 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맞습니다. 한건우 플레이어는 뭐든 실패한 적이 없죠.”
한건우가 자신의 길드에 대한 자신감을 보인 거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조심해야겠어.’
한건우는 씁쓸하게 따라 웃었다.
*
잠시 눈을 붙이니 멕시코시티 근교의 공항이었다.
“여기도 군 공항인가?”
“이곳은 범죄 카르텔이 운영하는 공항일 겁니다.”
권석진 대장이 설명하자, 박이경이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남미 전체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죠. 각 각성자 카르텔이 하나의 정부나 다름없습니다.”
“우릴 초대한 조직이 이렇게 크다고?”
“카르텔 내에도 여러 조직이 있습니다. 어느 수준의 조직인지··· 정확한 정체는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
박이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입국 수속이며, 편의시설을 갖춘 라운지까지.
일반 공항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사라진 한건우를 제외하고.
나머지 일행들은 가짜 관용여권을 내고 수속을 통과했다.
갈색 피부의 미녀 승무원이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승무원은 그들을 공항 밖, VIP를 위한 리무진이 있는 곳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어마어마하구만. 귀빈 대접이야.”
“귀빈이 맞으니까 그렇죠.”
촌스럽게 굴지 말라며, 차은비가 쏘아붙였다.
그런데 리무진을 타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교도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