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마리아 베르타 (3) - 업어치기
삽시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박이경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바위 같은 팔 근육이 꿈틀거렸다.
“오, 나만 저 놈들과 감정이 있는 줄 알았지.”
“...!”
박이경은 묻어두기로 한 옛이야기를 꺼냈다.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 중 몇몇이 움찔했다. 권석진 대장도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특수안보부의 김도경이 살아 있을 때.
권석진과 그의 분대원들은 김도경의 지시를 받고 박이경을 체포하려 했었다.
물론 권석진 대장이 미리 한건우와 대처 계획을 짜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
박이경은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던 대원들을 곱게 볼 수만은 없었다.
“감정까지는 아닙니다만.”
임수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날카롭게 벼려진 얼음 같은 분위기였다.
“불쾌한 기억이 있군요. 이번에는 조심들 하겠죠.”
형인 임진호가 그만하라며 말릴 줄 알았는데, 그도 가만히 있었다.
‘뭐지? 수호와 진호가 언제 이능력 특수전단과 엮일 일이 있었나.’
한건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 혹시 그건가.’
만주 원정을 다녀온 이후에 한참 바쁘던 시절.
한건우가 없을 때는 임진호가 그를 대신해서 파티의 리더 역할을 했다.
어느 날, 임진호가 이끄는 파티가 균열을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임진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분노를 가라앉히는 듯했다.
조용히 회복실에 들어간 임진호 대신 임수호에게 물었다.
-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
- 건우 형, 다른 게 아니라....
임수호가 사정을 털어놓았다. 말인즉슨 군에서 온 1개 분대와 시비가 붙을 뻔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소속을 들은 한건우가 황당해했다.
-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이었다고?
- 응, 아마 다른 각성자를 체포하러 왔던 것 같아.
- 권석진 대장님은?
- 다 모르는 얼굴이었어. 검문을 했는데....
임진호는 순순히 투구를 벗으며 소속과 성명을 밝혔다.
검문은 문제없이 지나갔지만, 파티원들이 듣는 자리에서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 몇이 도발적인 발언을 한 것 같았다.
- 안 그래도 우린 형이 없을 때는 특히 조심하거든.
한건우가 안 보일 때, 은근히 임수호 형제를 도발하는 각성자가 많은 모양이었다. 한건우나 길드에 손해를 끼칠까 봐서 참은 것일까.
- 그놈들이 뭐라고 했는데?
- ···건우 형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 설친다고.
그러고 나서 형제가 B급으로 등급 재판정을 받으면서 기억에서 사라져 유야무야 지나갔던 일이었다.
그때 보았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는지, 임수호는 몇몇 분대원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중 몇은 한건우도 아는 이들이었다.
과거 한건우보다 선임 기수였던 대원들.
자존심 강하고 지독하던.
한마디로 지랄맞던 선배들이었다.
‘저들이 저렇게 젊었던가.’
새삼 놀라울 정도였다.
권석진 대장은 얼어붙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부대원, 대기실을 이동한다.”
잠깐이라도 분리해서 갈등을 막으려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이러면, 밀폐된 공간인 비행기에서는 어떻게 할지. 또 남미에서의 임무는 어떤 분위기로 수행할지 걱정이었다.
조금 후, 권석진 대장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국을 떠나기도 전에 상황은 심각해졌다.
“자신 있으면 다시 한번 말해봐.”
“왜. 내가 틀린 말 한 것 있나?”
격납고 앞.
임진호와 이능력 특수전단의 한 대원이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대기 시간이 길어진 것이 낭패였다.
군용기의 에너지 냉각장치 쪽에 점검을 할 게 있다며. 서너 시간의 딜레이가 생긴 것이다.
무료한 대기 시간, 담배를 태우던 대원들이 임진호와 임수호를 발견했다.
또다시 도발적인 발언을 한 모양.
막내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권석진 대장이 한숨을 푹 쉬었다. 권석진 대장이 한건우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희 부대원들이 거친 편이죠. 특히 오늘 작전에 데려온 7명은 각 분대에서 실력 있는 대원들이라 자부심도 강하고요. 조금 무례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요.”
“아무리 그래도 정식 임무를 앞두고 이런 행동을 보이다니, 제가 제대로 혼내겠습니다.”
한건우는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권석진 대장의 말대로였다.
이능력 특수전단은 모든 군부대 중에서 최정예였다.
그들은 자존심이 세고 남에게 얕보이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건 내가 잘 알지.’
지금 대원들이 저런 행동을 하는 건 저들이 무식하고 무례해서가 아니었다.
‘일부러 저러는 거야.’
그들의 입장에서는 긴장될 만했다.
며칠 동안 민간인 각성자들과 밤낮으로 함께해야 하는 임무.
S급들은 넘을 수 없는 벽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적어도 다른 각성자에게는 얕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한마디로 기선 제압에 들어간 것이다.
‘처음에 만만하게 보이면 주도권을 뺏긴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 타겟이 바로 임진호와 임수호였다.
그들 형제는 현재 B급 각성자.
얼마 전까지 C급이었다가 등급 재판정으로 올라갔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권석진 대장만 해도 A급 각성자.
여기 온 대원들이 등급을 전부 밝힌 건 아니지만, 한건우가 아는 것만 해도 B급인 대원이 있었다.
“대장님, 말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차라리 한번 붙이시죠.”
“예?”
“비행기가 뜨기 전까지 시간도 남았잖습니까?”
한건우가 어깨를 으쓱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었다.
그가 휙 앞서가자, 권석진 대장이 다급히 뒤따라왔다.
“하지만 싸움이라도 붙어 부상을 입는다면....”
“최강의 힐러가 있는데 어떻습니까?”
한건우가 바깥쪽을 가리켰다.
가장 재밌는 구경은 싸움 구경.
차은비와 박이경은 이미 야외 의자에 자리를 잡고 흥미진진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건 오직 한 사람, 은설아뿐이었다.
“마스터! 이쪽이에요. 어서 와서 말려주세요.”
“놔 두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갈등이 있으면 풀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임수호가 그 말을 들었는지 한건우를 돌아봤다.
한건우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말리지 않을테니 너희들 마음대로 해보라는 뜻이었다.
임수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혹시 길드에 피해를 줄 수 있어서, 모욕을 당해도 참아야 하나 했는데.
한건우가 허용해주니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건물 안 대기실에서 쉬고 있던 대원들도 한두 명씩 나왔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챈 것이다.
“아빠, 아빠. 나도 저 사람들 혼내줘도 돼?”
한건우의 팔에 안긴 드래곤이 흥분해서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츠즈즈즈....
야무쥐게 쥔 주먹 근처에서 미세하게 중력장이 휘어지고 스파크가 튀었다.
한건우는 서둘러 아이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안돼. 너까지 가면 군인 아저씨들 큰일 난다.”
“...!”
구경하던 대원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 모두 한건우가 한 말을 똑똑히 들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한건우 플레이어가... 우리 들으라고 저런 건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한건우가 광역 도발을 한 셈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임진호, 그리고 그와 팽팽하게 대치 중인 대원.
한건우는 그 대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욱 대위, 아니 지금은 준위인가.’
한건우의 선임 중 한 명으로, 한건우가 분대장이 될 때쯤 옷을 벗고 나갔던 걸로 기억했다.
‘임진호와 정욱, 둘이 싸움을 붙다니.’
둘의 기세는 서로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키는 물론이고 두터운 몸집까지 비슷했다.
두툼한 근육과 굵은 뼈대.
척 봐도 맷집이 좋아 보였다.
‘탱커 둘이 붙었군.’
둘 다 무기를 들지 않은 맨손.
정욱 준위는 군 장비를 갖추어 입고 있었지만, 임진호는 아직 방어구를 입기 전이었다.
두 사람의 다리 근육이 동시에 꿈틀했다.
몸통이 움직였지만 주먹은 뻗지 않았다.
‘몸통 박치기.’
퍼어억!
“허억!”
“진호 형!”
어마어마한 소리가 났다.
두 마리 코뿔소가 정면으로 들이받으면 저런 소리가 날까.
방패를 들고 달려가서 후려치면 적을 그대로 날려보낼 수 있는 임진호였다.
타다다···.
두 사람이 충돌한 곳.
아스팔트 바닥이 쪼개지고, 분진이 피어났다.
휘이-
정욱 준위가 이번에는 주먹을 들었다.
둔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움직임이 날렵하고 정확했다.
뒷발로 바닥을 밀면서 팔과 허리가 회전했다.
‘정석이군.’
임진호의 턱을 노린 짧고 강한 스트레이트.
직선으로 뻗는 궤적은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앗!”
은설아가 놀라서 비명을 삼키는 순간.
터억!
임진호가 자신에게 뻗어진 주먹을 받아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엄청난 반응속도를 보여준 것이다.
“!”
정욱 준위는 주먹을 잡힌 상황에서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스텝이 고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반대로 생각하면 정욱 준위에게 유리한 면이 있었다.
정욱 준위가 무릎을 펴면서 임진호의 왼쪽 안면에 어퍼컷을 날렸다.
‘감각이 괜찮은데?’
머리로 생각해서 나오는 판단이 아니었다.
저 속도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상대가 임진호가 아니었다면 먹혔을지도 모르겠다.
임진호는 정욱 준위의 주먹을 잡으면서 이어진 공격도 예상하고 있었다.
턱!
“억.”
정욱 준위가 이번에야말로 놀란 신음을 흘렸다.
양손을 다 잡힌 것이다.
“와.”
“저걸 다 잡힌다고?”
막는 것도 아니고 주먹을 잡혔다.
어린애 놀리듯이 농락을 당한 셈이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정욱 준위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놔라!”
정욱 준위가 용을 썼다.
그런데 임진호의 두 팔은 태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능력 특수전단의 모든 대원들이 경악했다.
정욱 준위는 맨몸 전투로는 알아주는 위치였다.
완력과 파괴력으로 뒤지는 경우가 없었다.
‘임진호가 이 정도였어?’
아레스 길드에서 중요한 멤버이긴 하지만.
외부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그들 형제는 실력보다 한건우와의 친분 때문에 중용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길드 마스터와 어릴 적 친분이 없었다면 중심 멤버에 끼지도 못했을 거라고.
각성자도 실력보다 인맥이 좋아야 한다며, 에둘러 까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았다.
정욱 준위의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이 정도밖에 안 되면서 덤볐나?”
임진호가 덤덤한 말투로 비웃었다.
임진호는 예고 없이 한 발을 뒤로 빼면서, 정욱 준위의 중심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타앗-
임진호가 양 주먹을 꽉 붙든 채로, 몸을 돌려서 정욱 준위 앞으로 깊이 들어갔다.
“설마?”
휘익-
“으억!”
정욱 준위의 발이 땅에서 들렸다.
맨손 격투를 하면서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진다는 것.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은 뻔했다.
정욱 준위가 어떻게 대처해보기도 전에.
그의 시야가 회오리치듯 돌아갔다.
부우웅-
콰아아앙!
격납고 앞 아스팔트 바닥에서 엄청난 타격음이 들렸다.
깔끔한 업어치기 한 방.
정욱 준위는 바닥에 누운 채로 눈만 껌뻑거렸다.
그야말로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둘 다 특성은 전개하지 않고 맨몸 격투로 붙었다.
정욱 준위가 가장 자신있는 분야였다.
임진호가 몰래 아이템이나 스킬을 쓴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임진호는 방어구조차 두르지 않은 맨몸.
허를 찌른 것도 아니었다.
그 어떤 비겁한 수를 쓴 것도 아니었다.
정욱 준위는 각성 전부터 격투기를 해왔다.
그때 느꼈던 감정이 오랜만에 밀려왔다.
‘깔끔하게 졌다.’
임진호가 누워있는 정욱 준위에게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승자의 오만한 태도와는 달랐다.
그는 그냥 덤덤한 표정이었다.
정욱 준위가 멋쩍게 그의 손을 마주잡고 몸을 일으켰다.
“허.”
부하의 모습을 보고, 권석진 대장이 짧은 탄식을 뱉었다.
어찌 되었든 부하가 지는 게 보기 좋을 리 없었다.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성질 급한 대원이 그만 자제를 못하고 화염 마법을 전개했다.
화아아-
대원의 손에 거대한 화염의 활이 생겨났다.
사람의 키만한 거대한 대궁에 화염 화살이 맺혔다.
손쓸 새도 없이 순식간이었다.
슈우웅-
화염의 화살이 임진호를 노리고 뻗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