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163화 (163/238)

#163마리아 베르타 (2) - 멕시코시티

“우리나라에 이계 마약을 팔자는 제안이 온 게, 좋은 기회라고요?”

정남준 대통령이 한건우의 말을 곱씹듯이 말했다.

그의 눈빛이 제법 심각했다.

믿던 도끼에 발등이 찍히면 저런 표정을 지을까.

한건우는 웃음이 날 뻔했다.

“그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만나자고 하십시오.”

한건우가 한술 더 떴다.

정남준 대통령의 표정이 더욱 괴이해졌다.

“그게 무슨···.”

정남준 대통령은 아직 침착함을 잃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살짝 격앙되었다.

“한국으로 초대하면 의심할 겁니다. 그쪽에서도 꼬리 자르기를 할 수 있는 인원만 보낼 거고요. 우리가 그쪽으로 가야 합니다.”

“아아.”

대통령이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한건우는 당연히 범죄조직과 협력해서 돈을 벌어보자는 게 아니었다.

‘시간과 노력을 한참 절약하겠군.’

마리아 베르타와 연계된 조직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고.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쳐내야 할 놈들이었다.

바다 건너 한국과 일본까지 손을 뻗는 걸 보면, 한건우와 부딪치는 건 시간 문제니까.

대통령이 소리를 낮추며 은근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직접 만나서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계약을 검토하는 척하면서, 주요 인물을 치자는 것이군요.”

“반은 맞습니다.”

“반이라뇨?”

“대통령님이 직접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믿을 만한 대리인을 사절단으로 보낸다고 하세요. 대통령이시니 외국에 사람을 보낼 적절한 사유는 만드실 수 있겠죠. 저와 길드원들이 그 안에 숨어들겠습니다.”

대통령은 한건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한건우 플레이어를 알아본다면, 의심을 받지 않을까요?”

“남미까지는 제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흐음···.”

“만일 저나 길드원들을 알아보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걸 알아볼 사람이라면 대통령님과 저의 관계도 알 테니까요. 대통령님이 대리인을 감시하기 위해 따로 붙인 척하면 되겠죠.”

정남준 대통령은 입을 딱 벌렸다.

즉흥적으로 술술 쏟아지는 한건우의 생각을 소화하기 벅찰 정도였다.

“그래도 위험할까 걱정되는데요···.”

“상식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대통령님이 먼 외국의 범죄조직을 먼저 치려고 한다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정남준 대통령의 얼굴이 점점 펴졌다.

‘천재야, 천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기는 불평 섞인 한탄을 한 마디 털어놓은 것뿐이었다.

한건우는 그걸 기회 삼아서 바로 기발한 계획을 짜냈다.

제안을 받아들여 찾아온 사절단인 척, 상대편을 안심시키고 역공하는 계획이었다.

“무력도 대단하신데 지략까지··· 역시 랭킹 1위는 남다르시군요.”

정남준 대통령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한건우는 그의 찬사를 웃어넘겼다.

‘내 경험상, 어떤 조직이라도 외부에서 접근하는 건 어려워.’

꽉 닫힌 조가비를 억지로 열려고 하면 입을 다물어버리기 마련.

가장 쉬운 접근법은 상대편에서 방심하고 문을 열어줄 때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믿을 만한 대리인이라면···.”

정남준 대통령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 민감하고 위험한 임무를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한건우는 그것도 이미 생각해둔 사람이 있었다.

“대통령님의 측근 중에서, 상대가 인정할 만한 대리인이면 되겠죠. 평소 비밀스러운 임무까지도 맡고 있던 사람이라면 더 그럴싸할 겁니다.”

“....”

한건우는 이미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적임자가 있었으니까.

‘상대편이 마리아 베르타의 조직이라면, 마력 총화기를 다룰 거다. 거기에 맞서려면 잘 훈련된 각성자들이 필요해.’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도 없었다.

‘이능력 특수전단, 권석진 대장.’

군 소속이지만 대통령 직속이나 다름없는 각성자 특수부대의 대장, 권석진.

한건우가 대통령에게 권유한 덕분에, 권석진은 분대장에서 대장으로 승진을 했다.

회귀 전보다 훨씬 빠른 파격 승진이었다.

정남준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하, 범죄조직의 제안에 응하려니 떨리는군요.”

대통령이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건우도 그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일어났다.

‘기껏해야 보호 강화 약속 정도로 예상했는데. 항상 예상을 넘어선단 말이야.’

정남준 대통령은 한건우의 얼굴을 흘깃 돌아보았다.

젊다기보다 어리다는 말이 어울리는 나이인데.

도저히 깊이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한건우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지, 대통령은 이제 예측하는 걸 포기했다.

‘한건우 플레이어가 국가의 적으로 돌아서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만일 그랬다면, 대한민국은 진작 한건우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대통령은 새삼스럽게 안도했다.

*

정남준 대통령은 한건우의 말대로 따랐다.

남미 마약조직의 뒷거래 제안에 관심을 보인 척, 소통에 임한 것이다.

상대편은 전혀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예상대로라는 반응이었다.

무기명으로 된 비밀 계약서가 몇 차례 오갔고, 조건도 몇 번 수정되었다.

상대편에서는 정남준 대통령이 검은 돈을 벌고 싶어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쪽에서 은근히 다른 상품을 권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곤혹스럽더군요.”

“뭘 팔려고 하던가요?”

정남준 대통령이 인상을 찌푸렸다.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요새 남미가 무법지대라고 하더니 맞는 모양입니다. 민간인 살상용 아이템도 있고, 심지어 노예를 사들이겠냐며 인신매매 제의까지···.”

정남준 대통령이 화를 참지 못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손등에 핏줄이 돋아났다.

한건우는 담담했다.

“계약 일정은요?”

“제가 적극적으로 나갔더니 금방 잡혔습니다. 사정상 계약 대리인을 보내기로 약속은 다 되었구요.”

초대장을 본 한건우가 놀랐다.

약속장소는 남미, 멕시코.

멕시코시티의 한 저택 주소가 적혀있었다.

‘이게 웬걸. 행운이군.’

예상치 못한 소득이었다.

일본이나 제3의 지점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조직의 본거지로 초대를 받은 것이다.

북미가 거의 패망에 이른 지금.

남미의 멕시코시티는 아메리카 대륙의 수도와 같은 곳이었다.

“여긴··· 중간지점이 아니라 본진이군요?”

따로 본진을 찾아 쳐들어가야 하는 수고를 덜게 되었다.

한건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한건우가 반가워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르고스의 주인, 마리아 베르타.

그녀의 본거지 역시 멕시코시티가 아닌가.

‘일타이피인가?’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남준 대통령에게 접근한 이들이 마리아 베르타의 직속 부하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같은 도시의 범죄조직이니 당연히 관계가 있으리라.

‘부하여도 좋고, 적이어도 좋아.’

한건우가 눈을 빛냈다.

“하하, 아마 제가 호구로 보였는지. 앞으로 더 팔아보려고 한 것 같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건우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남준 대통령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협상이 중간에 깨질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통령은 최선을 다해 자리를 깔아주었다.

이제는 한건우의 차례였다.

*

민간인이 접근할 수 없는 군 공항의 대기실.

한건우 일행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건우 플레이어가... 제 부하 대원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뒤따라 들어온 이능력 특수전단의 권석진 대장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위장이라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내가 예전에 당신 밑에서 몇 년이나 굴러봤다고 하면 뭐라고 하려나?’

한건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권석진은 여전히 한건우에게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권석진 대장은 과거 한건우의 롤모델이었으니까.

한건우는 그의 밑에서 많은 걸 배우고, 그의 행동을 따라 하고,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어릴 때 돌아가신 부모님보다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지금의 권석진은 그걸 까맣게 모르고, 오직 한건우의 기억 속에만 있을 뿐이었다.

“저와 제 동료들 몇 명도요.”

“동료라면···? 아.”

권석진 대장이 한건우의 뒤를 보고 바짝 굳었다.

익히 아는 얼굴들이었다.

먼저 하나도 안 닮은 쌍둥이 형제, 임진호와 임수호가 보였다.

과묵하고 두툼한 인상의 임진호, 그리고 마르고 날카로운 눈빛의 법사 임수호.

둘 다 한건우의 최측근이었고, 상당한 실력자로 알고 있었다.

“군용기 타고 간다는데 괜찮겠어? 일등석도 없을걸.”

“사람을 뭐로 보는 거예요 정말.”

연신 티격태격하는 남녀도 있었다.

미녀와 야수를 떠올리게 하는 두 사람은 차은비와 박이경이었다.

얼굴은 예쁘지만 까다로운 성격에 안하무인으로 유명한 차은비와, 상대를 안 가리고 주먹을 휘두르던 험악한 거구의 박이경.

게다가 둘 다 S급 각성자.

정말 다루기 힘들어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일성에서 데려온 차은비는 그렇다치고··· 알파스 길드의 박이경까지 동료가 된 건가.’

자신이라면 저들을 동료로 만들 수 있었을까.

권석진 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지막으로 권석진 대장의 고개가 아래쪽으로 향했다.

올망졸망해 보이는 두 어린애도 있었다.

권석진은 내심 놀랐다.

“애들도 같이 가도 되는 자립니까?”

“저 애 아니거든요!”

발끈한 은설아가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법적으로 각성자는 16세 이상이면 성인의 권리를 가질 수 있으니까.

실제로도 20살이 되기 전에 각성한 경우, 플레이어 생활도 일찍 시작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S급이니 어리다고 무시당할 건 아니었다.

은설아가 또래보다 키가 작고 어리게 보이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작은···. 아, 아닙니다.”

은설아가 뾰족하게 도끼눈을 뜨자, 권석진 대장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실언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저 애도 데려간다고···?’

권석진은 한건우의 허리춤에 꼭 달라붙은 어린아이를 살펴봤다.

아무리 높게 봐도 열 살가량.

심지어 각성자의 미미한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저 애가 말로만 듣던 한건우 플레이어의 딸인가?’

헛소문인 줄 알고 넘겼다.

그런데 오늘 보니 심상치가 않았다.

“아빠, 배고파.”

“그러게 길드에서 기다리지.”

“싫어,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귀여운 아이가 투정을 부렸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젊은 아빠와 어린 딸이었다.

미혼인 권석진 대장의 턱이 딱 벌어졌다.

이런 놀라운 대화를 듣고도, 한건우의 다른 동료들은 아무렇지 않은 분위기였다.

“....”

권석진 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래, 방해만 안 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더 황당한 말이 들렸다.

“형님! 형수님은 왜 안 부르셨습니까?”

박이경이 한건우를 향해 짓궂게 묻자, 한건우가 피식 웃었다.

“형수님은 무슨···. 일이 있어서 이번에는 같이 가기 어렵겠어.”

박이경이 한참 어린 한건우를 형님으로 모신다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그냥 비유적인 표현인 줄 알았다.

게다가 형수님은 또 누구란 말인가.

“뭐, 잘 됐어요. 한국을 비우고 오는 것도 걱정되잖아요. 이비현 씨가 잘 지켜주시겠죠.”

“자기 라이벌이 없어졌다고 좋아하는군. 그런다고 기회가 돌아오는 건 아니라고.”

“이 사람이 뭐래 정말!”

“....”

한건우와 권석진은 비슷하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때 권석진의 부하들이 군장을 한 채 대기실로 들어왔다.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이었다.

척, 척, 척···.

열을 맞춘 군화 소리가 대기실 바닥을 울렸다.

자유분방한 한건우의 일행과는 달랐다.

각이 잡히고 눈에 독기가 들어찬 모습이었다.

처억!

대원들이 권석진 대장 앞에 멈춰섰다.

부대원들이 한건우 일행을 보는 눈은 곱지 않았다.

이능력 특수전단은 각성자 범죄자를 사냥하는 게 주 업무.

원래 민간 각성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이랬다.

‘한건우 말고는 영···.’

박이경, 차은비와는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고.

은설아는 그렇다치고.

한건우의 무릎에 매달린 어린아이는 또 뭔가 싶었다.

표정이 안 좋은 건 대원들만이 아니었다.

임수호 형제의 얼굴도 사나웠다.

“어? 뭐야.”

임수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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