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마리아 베르타 (1) - 좋은 기회
한건우는 집에도, 길드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목적지로 향했다. 여독을 풀 새도 없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는 꼭 확인한다.’
무슨 징크스처럼 여기만 가려고 하면 일이 터지니, 더 미루었다간 또다시 확인을 못 하고 넘어갈지도 몰랐다.
“비현아, 피곤하면 들어가도 괜찮아.”
“방해되지 않는다면 같이 갈래요.”
이비현이 계속 따라오기에 쉬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망토 소매 속에 손을 넣어 뭔가를 꼭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다이아몬드 말이야.”
“네··· 네?”
이비현이 화들짝 놀랐다.
“난 일단은 안 팔고 가지고 있을 거거든. 시세는 걱정하지 말고 경매장에 내놔도 돼.”
무칸의 심장에서 쪼개진 2개의 결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무칸을 이기고 얻은 전리품이었다.
한건우는 기념으로 보관할 생각이었지만, 이비현은 파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한건우는 보석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그 다이아몬드가 어마어마하게 비쌀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워낙 순도가 높고 결정의 크기도 컸기 때문이다.
“안 팔아요, 절대로.”
“?”
이비현이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해 보였다.
그들은 홍대의 <빙하기의 어둠> 균열 앞에 도착했다.
한건우가 길드를 세우기도 전에 백지 계약서로 관리권을 따냈던 그 미공략 균열이었다.
‘여기가 내 전환점이었나.’
미공략 균열을 덮은 피라미드 앞에 서자, 한건우는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에는 평범한 미공략 균열인 줄 알았을 뿐인데, 다시 보니 이곳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빙룡의 시체를 얻었고, 그것 때문에 길드를 세우는 걸 앞당기게 되었다.
그뿐인가. 이계의 유적과 첫 번째 예언 석판을 발견하면서 한건우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뎠다.
슈우우-
균열 안으로 들어가자, 눈부신 빙하기의 설원이 나타났다.
한건우가 세워놓은 포탑은 건재했다.
움푹 파인 깊은 해자 아래, 얼어붙은 마수의 시체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타악!
한건우는 곧바로 해자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떨어진 것만으로 즉사할 높이지만, 한건우에게는 별것 아니었다.
타다다···.
이비현도 낭떠러지를 평지 달리듯 하며 해자 밑으로 내려왔다.
빙벽 속에 이계 유적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이비현을 보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안에 들어가 본 적 있나?”
“처음이에요.”
철컥.
한건우가 <숨겨진 방의 열쇠> 아이템을 넣고 돌렸다.
휑할 정도로 단순한 공간이 드러났다.
“헉··· 이게 다 뭐예요?”
“인간형 마수의 무덤인 것 같아.”
석관 속에는 여전히 백골 거인의 시체가 누워있었다.
그새 몇 번 봤다고 어딘가 친숙한 느낌도 들었다.
이비현이 거인의 시체를 살펴보고 있는 동안, 한건우는 <언어의 석판>을 꺼냈다.
[언어의 석판]
- 석판 위에 쓴 언어를 원하는 형태로 번역할 수 있다.
한건우는 언어의 석판을 들고 벽 앞에 섰다.
석판 위에 손가락을 슥 그어보자 흰색 줄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비현도 한건우 옆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이계의 문자네요?”
“응.”
이 유적의 벽과 기둥은 온통 빼곡한 글자로 가득했다.
전에 본 대로, 글자는 천장과 바닥에까지 이어졌다.
“똑같은 문장이 계속 반복해서 쓰여있어요. 대체 무슨 뜻일까요?”
“설마 이계의 벽지 상표라던지, 그런 건 아니겠지.”
이비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간절하게 남긴 걸 보면 아닐 거예요. 중요한 메시지 같은데요.”
한건우는 여러 종류의 문자 중에서 그나마 단순해 보이는 걸 골랐다.
‘한글이나 한자로 생각해봐도, 획이나 점을 조금만 틀려도 전혀 다른 뜻이 될 수 있어.’
그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문장을 따라 그렸다.
스스슥···.
언어의 석판은 글자를 먹어 치우듯 흡수했다.
곧 새까만 석판 위에 익숙한 한글로 된 글자가 떠올랐다.
[예언의 힘을 얻으려는 자, 자신을 이겨야 한다]
“어?”
한건우는 <예언의 힘>이라는 단어에 놀랐다가, 뒤쪽을 보자 조금 김이 빠졌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 아닌가?’
혹시 글자를 잘못 썼나 해서 다른 문자를 따라 그려봤다.
나타난 뜻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았다.
“동음이의어라던지 숨은 뜻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알 수 없군.”
한건우는 석관 안에 잠든 거인의 백골을 돌아보았다.
좀 더 실용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을 남겼을 줄 알았는데.
실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건우는 일단 그 문장을 머릿속에 기억해 놓았다.
*
“...힘을 얻으려면 자신을 이겨야 한다라.”
한건우는 덤벨을 들고 어깨를 단련하고 있었다.
고강도 훈련을 위해 밀도 높은 마석으로 제작한 덤벨이었다.
중량을 가하니 전투의 여파로 뻐근한 근육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전투 훈련만 하는 건 효과가 떨어지고, 고중량 트레이닝을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실제로 길드원들의 훈련 방식도 한건우를 따라갔다.
콰아앙-
박이경이 바윗덩이 같은 역기를 내려놓고 숨을 돌렸다.
“후우··· 형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별것 아냐.”
박이경은 웃통을 까고 땀 냄새를 풍기면서 한건우 옆에 와서 앉았다.
자기 길드의 훈련실을 놔두고 왜 여기 와서 이러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건우 형님, 그건 제가 잘 하는 말입니다. 근육을 단련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자기 한계를 넘어서야만 더 큰 힘을 얻으니까요.”
“그런가.”
못 들은 척하더니 다 들은 모양이었다.
박이경이 한건우에게 물었다.
“방금 자세는 어땠습니까? 좀 봐주시죠.”
“균형이 미세하게 안 맞았어.”
“그렇습니까?”
“다음부터 왼쪽은 편측으로 해.”
박이경이 고맙다며 실실 웃다가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 이비현 씨와 어딜 다녀오셨다면서요.”
“응.”
“싸우러 가신 거 아닙니까?”
“....”
한건우는 대답 없이 박이경을 바라보았다.
“전부터 부탁하고 싶었는데, 저도 데려가시죠.”
“데려가?”
“형님과 만주에 다녀온 이후에 웬만한 균열은 성에도 안 차요. 모든 게 시시하죠. 안 그렇겠습니까?”
박이경은 놀랍도록 진지한 얼굴이었다.
놀라운 점은 더 있었다.
“시시하긴 무슨. 균열을 재미로 가는 사람도 있어요?”
차은비가 톡 쏘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녀가 온몸에 붙는 운동복 차림으로 나타나자, 박이경은 그녀를 대놓고 쳐다보았다.
아주 입까지 벌리고 눈을 떼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왜 없어. 나 있잖아.”
“쓸데없이 우리 마스터 괴롭히지 말고 자기 길드나 돌보라구요.”
겉으로는 예전처럼 냉기가 흘렀지만, 한건우는 미묘한 변화를 포착했다.
‘얼씨구?’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다 정이 들기라도 했는지.
언제 저렇게 친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진심으로 서로 공격하려 들던 예전과는 달랐다.
독기는 쏙 빠지고 티격태격 하는 분위기였다.
한건우는 박이경의 말을 듣고 일행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은밀하게 치고 빠지려면 이비현과 둘이서 다니는 게 편했다.
은신 특성으로 어디든지 쉽게 스며들고, 수월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번 아프리카 건만 해도 사실은 손이 부족할 뻔했다.
‘균열에 파티를 구성해서 들어가면 편한 것처럼, 악당을 잡는 데도 파티가 필요할 거야.’
언제까지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했다.
한건우의 사람들은 실력이 뛰어났고, 그만큼 유명했다.
사람이 없는 균열 안이라면 모를까.
바깥에서 행동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지도 모른다.
그런 고민을 하는데, 금해준이 훈련장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마스터,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누구지?”
금해준이 상기된 얼굴로 한건우에게 곧장 다가왔다.
그가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정남준 대통령이 왔어요. 분위기를 보니 이번에도 형님께 도움을 청할 게 있나봅니다.”
*
정남준 대통령은 부쩍 나이들어 보였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머리 뿌리에 희끗한 새치가 돋아 있었다.
“요새 바쁘신가 봅니다.”
“뭘요, 한건우 플레이어만 하겠습니까.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 피곤한 건 좋은 거죠.”
정남준 대통령이 소탈하게 웃었다.
“제가 도와드릴 거라도 있을까요?”
한건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서로 1분 1초가 귀한 사람들이니까.
정남준 대통령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매번 부탁만 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저에게도 도움이 되니 죄송하실 일은 아니죠. 아니면 거절했을 겁니다.”
한건우는 가끔씩 대통령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물론 사사로운 심부름은 아니었다.
공식적이건 비공식적이건, 나라를 위해 각성자의 힘이 필요한 순간이 꽤 많았다.
대부분의 임무는 이능력 특수전단이 해결했지만,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대통령이 한번은 조금 침통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 가끔은 제가 각성자가 아닌 게 슬프답니다. 입으로만 떠들고 도움은 안 되는 사람이 된 기분이라서요.
막 아프리카에 다녀와서일까. 한건우는 정남준 대통령과 로지 마소크 전 시장이 겹쳐 보였다.
힘의 논리에 지배받는 세상에서 리더로서 꿋꿋하게 중심을 잡는 그들. 한건우는 두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일본 홋카이도 쪽에 신종 마약이 들어왔다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예.”
한건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도 보고 받아서 알고 있는 소식이었다.
‘레드 스타를 다 불태운 게 엊그제 같은데.’
이계 식물로 만든 약이 슬그머니 시중에 풀리고 있다고 들었다. 특히 홋카이도 섬은 인구도 적고 외져서, 한건우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곳이었다.
“남미 쪽의 마약 조직 같은데, 우리나라까지 판로를 넓히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건 어떻게 알게 되셨죠.”
한건우는 침착하게 답했지만, 속으로는 불길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남미의 마약 조직?’
남미의 지하조직은 아르고스의 주인인 마리아 베르타가 꽉 잡고 있다고 들었다.
그녀와 직,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그 조직 측에서 저에게 직접 제안이 왔습니다. 마약을 함께 한국에 유통해보자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남준 대통령도 어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조금 알아보니 그쪽 지역에서는 정치인이나 정부 인사가 몰래 마약 유통의 뒷배를 봐주거나, 심지어 직접 사업을 벌이는 게 흔한 일인가 봅니다.”
“....”
멀리 갈 것도 없었다.
회귀 전 일본만 해도 그랬다.
정치인이 각성자 야쿠자 조직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불법 사업까지도 공공연하게 벌였지 않나.
지금은 한건우가 많이 손을 봐준 덕에 상당히 깨끗해졌지만.
한건우는 잠시 턱을 쓸면서 생각에 잠겼다.
곧 좋은 생각이 들어, 한건우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마침 잘됐군요.”
“예?”
정남준 대통령은 깜짝 놀랐다.
‘대체 한건우 플레이어의 반응은 예측할 수가 없군. 이번에야말로 협조를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한건우는 대통령이 상상도 못한 발언을 했다.
“그 제안, 받아들이시죠.”
“...예?”
“정말 좋은 기회 아닙니까?”
대통령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