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아프리카의 무칸 (7) - 신의 진노
찬란하게 흩어지는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 결정을 보면서, 한건우는 머릿속에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턱.
창대로 땅을 짚어 겨우 자세를 유지했다.
방금은 힘을 아끼거나 분배할 틈이 없었다.
무칸을 죽이는 마지막 순간, 그야말로 능력의 바닥까지 하얗게 불태웠다.
“성공...이다.”
한건우가 되뇌었다.
한건우의 승리였다. 아드레날린이 기분 좋게 혈관 속을 용솟음쳤다.
앞으로 갈 길이 멀었지만, 오늘만큼은 첫 성공을 자축해도 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단계가 남아있지.’
한건우의 권능창에 빛이 들어왔다.
기다렸던 메시지였다.
[악마의 권능(유일) 발동 : 탐식]
- 죽인 자의 특성을 흡수합니다.
- 특성 흡수 중
···
아르고스의 주인이 가진 특성을 흡수하는 것.
아르고스라는 비밀 결사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쭉 그려왔던 일이었다.
- 특성 흡수 완료.
특성창 목록에 하나가 추가되었다.
[다이아몬드 폼(신화급)]
- 신체를 다이아몬드로 변형시킬 수 있다.
간단한 설명이지만 그 위력은 굉장했다.
다이아몬드 폼은 온몸이 무기이자 방어구가 되는 능력이었다.
‘역시 신화급 특성이었나.’
기대한 대로였다.
비록 아르고스의 다섯 주인 가운데 가장 약한 무칸이지만.
신체 강화 특성 가운데 가장 최상위의 특성인데다, 이걸로 한 대륙의 패자가 될 정도이니.
한건우가 손바닥을 들었다.
치리리링···.
손끝을 따라 다이아몬드 결정이 물결쳤다.
사람의 뼈와 살이 아니라 순수하고 강한 다이아몬드로 변한 것이다.
한건우의 손에서 눈부신 흰 광채가 났다.
“오.”
다이아몬드 폼으로 바뀐 부분의 감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강한 무기를 들고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주위의 사물을 보는 관점조차 바뀌었으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힘을 인식하고 있다.
꼭 다른 사물을 직접 만져보지 않아도, 파괴할 수 있는지 여부는 본능적으로 느껴지기 마련.
몸 자체가 변형되니 그 기준점이 쭉 올라갔다.
‘뭐든지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군.’
다이아몬드 폼의 장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전신에 다이아몬드 폼을 취하면 무생물이나 다름없이 되었다.
‘모든 정신 계열 저주와 마법에 무적이 되지.’
한건우의 주력 능력이 정신 계열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무칸을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테니까.
한건우는 전신에 다이아몬드 폼을 취했다.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다이아몬드로 변했다.
그때였다.
쉬이익-!
“!”
갑작스런 공격이 날아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한건우는 본능적인 감각으로 움직였다.
까앙-!
다이아몬드 폼을 취한 상태기에, 손날로 손쉽게 기습을 막아냈다.
자신을 공격한 무기를 산산조각내려는 순간.
“......이비현?”
한건우가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건우를 맹렬하게 기습한 건 다름아닌 이비현이었다.
“헉···!”
한건우의 목소리를 듣고 누구보다 놀란 건 이비현이었다.
그녀가 <그림자 맹시>를 풀고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맹독 시미터를 한건우에게 붙잡힌 채였다.
“평소 불만이 있었나? 말로 하지 그랬어.”
한건우가 다이아몬드 폼을 풀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비현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아···.”
“무칸의 특성이야. 다이아몬드 폼이지.”
한건우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대놓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이비현은 한건우와 함께한 지 오래였다.
한건우가 죽인 자의 특성을 흡수한다는 걸 알 만도 했다.
“전 또, 다이아몬드 폼을 한 사람이 건우 씨의 창을 들고 있길래···.”
무칸이 한건우를 죽인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이비현의 눈가에 붉은기가 맺힌 것을 얼핏 본 것 같았다.
“내가 무칸에게 진 걸로 알았다고? 충격인데.”
한건우는 피식 웃으면서 이비현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큰 부상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이비현이라면 충분히 타타우를 이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무사히 나타난 걸 보니 반가웠다.
이비현은 겁을 먹었던 듯, 가만히 서서 숨을 골랐다.
그러다 검게 탄 구덩이 속에 다이아몬드 결정이 산처럼 수북히 쌓여있는 걸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설마, 무칸···이에요?”
“맞아.”
한건우가 창끝으로 구덩이 속을 뒤적였다.
차르르르···.
다이아몬드 결정의 크기는 다양했다.
개중 가장 커다란 건 주먹만한 결정 2개였다.
‘이건 무칸의 심장인가?’
한건우는 주먹만한 결정 두 개를 들어올려 손바닥 위에서 둥글렸다.
무칸의 몸 일부라고 생각하니 조금 꺼림칙했지만, 보석 자체는 무척 아름답고 영롱했다.
순도로 따지면 최고일 것이다.
“자, 고생했어.”
큼직한 다이아몬드 하나를 이비현에게 던져주고, 하나는 아공간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녀가 얼결에 다이아몬드를 받았다.
“...고마워요.”
“감옥에 있던 사람들은? 그냥 풀어줬나?”
이비현이 대답하기 직전.
우와아아-
황궁 바깥, 가까운 곳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축을 울리는 고함과 진동 소리였다.
“생존자들은 구해냈어요. 바깥에 로지 마소크가 이끄는 행진 대열이 보여서, 그쪽으로 가라고 안내했죠.”
“잘했어.”
“수도 시민들이 모두 거리로 나온 것 같더라구요.”
한건우와 이비현은 지상으로 올라왔다.
정문 바깥에 펼쳐진 광경은 들은 대로였다.
처형장에 몰렸던 인파에 더해서, <마마> 마소크가 탈출했다는 소식에 집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들.
그리고 황궁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나온 이들까지.
수도 대로는 전에 없는 인파로 가득했다.
와아아아-
시민들은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토해내듯 고함을 질렀다.
행진 대열 중간, 무칸에게 협조하던 관리들이 붙잡혀있는 게 보였다.
관리들은 비참한 최후를 예감한 듯, 밧줄에 묶여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대열의 선두에는 로지 마소크가 있었다.
방금까지 처형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여자라고 하면 누가 믿을 것인가.
그녀는 상처투성이에 깡말랐지만, 작은 거인처럼 당당해 보였다.
쿵- 쿵- 쿵-
행진 대열은 황궁의 성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무칸의 사도들이 죽고 무칸의 황궁이 무너졌지만.
아직 무칸의 시체를 두 눈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오랜 두려움을 쉽게 떨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건우는 황궁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자동 회복이 좀 진행됐나?’
섭취형 아이템인 고대 히드라의 꼬리 고기가 열일하는 중이었다.
바닥을 찍을 뻔했던 MP가 어느 정도 올라온 걸 확인하고, 한건우가 하늘을 향해 창을 쳐들었다.
[특성 발동 : 인드라의 뇌전]
우르르르르···.
콰르릉-
구름도 없이 마른 하늘이었다.
푸른 스파크가 번쩍 튀었다.
“으아악!”
“저게 뭐야?”
바깥에는 혼란이 벌어졌다.
파지지직··· 콰앙!
황궁의 지붕 위로 벼락이 꽂혔다.
반쯤 부서졌던 지붕이 내려앉았다.
우르르···. 콰르릉!
벼락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무칸의 황궁은 폭풍 한가운데 선 등대처럼 무수한 벼락을 맞았다.
굵은 기둥이 옆으로 쓰러지고, 지지대를 잃은 화려한 벽은 통째로 넘어갔다.
영원할 것 같던 무칸의 황궁이 무너지고 있었다.
화르르르···.
푸른 마력 불꽃이 무너진 황궁을 집어삼켰다.
건물의 잔해 곳곳에서 작은 폭발도 일어났다.
할 말을 잃은 군중들은 입을 떡 벌렸다.
마치 무칸의 황궁이 신의 진노를 산 듯했다.
신화의 한 장면 같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황궁이 무너진다.”
“무칸은 어떻게 된 거지.”
무칸의 황궁이었던 건물이 소멸되어 가고, 흥분과 불안이 퍼질 무렵.
차라라라-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 결정이 공중에 흩뿌려졌다.
사람들의 손이 닿을 수 없는 하늘 높은 곳이었다.
“어억!”
“위를 봐!”
다이아몬드의 광채는 찬란했다.
염동력으로 제어되는 다이아몬드 결정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무칸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다만 그걸 겉으로 내뱉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군중 속의 고요가 흐를 때.
로지 마소크가 군중을 돌아보며 힘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무칸은 죽었습니다!”
“...!”
로지 마소크는 군중의 검은 눈동자를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동자에 불타서 무너지는 무칸의 황궁이 비쳤다.
로지 마소크가 주먹을 들어올렸다.
뼈마디가 튀어나온 작은 주먹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확신에 차 보였다.
“오늘부터, 우리는 새로운 날을 맞이할 겁니다!”
“우와아아!”
“무칸이 죽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순간 모두의 귀가 먹먹해졌다.
온 수도가 끓어넘치듯이 환호성이 터져나온 것이다.
군중이 무너지는 황궁을 보며 뜨겁게 환호하는 동안.
로지 마소크의 눈은 바쁘게 사람들 사이를 살폈다.
“!”
로지 마소크는 군중 사이에서 뒤를 돌아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만 드러낸 채로 복면을 하고 있었다.
눌러쓴 망토 후드 사이로, 구릿빛 피부와 검고 강렬한 눈동자가 보였다.
‘저 동양인 각성자.’
남자의 뒤를 몸집이 작은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다.
온몸을 망토로 꽁꽁 가리고 있었지만, 로지 마소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처형장에서 나를 구해준··· 아니, 우리 나라를 구해준 사람들이야!’
로지 마소크는 그들을 붙잡으려는 듯 손을 들었다.
한건우와 이비현은 미련없이 고개를 돌리고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로지 마소크는 조용히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곧 자신을 기다리는 시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그건 놓고 오는 건가요?”
“뭘?”
“하늘에 뿌린 다이아몬드요.”
이비현은 그게 못내 아까운 모양인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새 나라에 주는 선물이야.”
한건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다이아몬드뿐일까.
황궁 지하를 파보면 감옥뿐 아니라 무칸이 모은 보물 창고도 있을 것이다.
한건우는 그걸 챙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착취당하는 모습을 똑똑히 봤으니까.
그 보물이 어디서 나왔을지는 뻔했다.
무엇보다 이번에 자신의 목표는 다 이루었다.
다섯 주인 중에서 가장 약해 보이던 무칸이지만, 어쨌든 아르고스의 주인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했다.
그의 신화급 특성도 흡수했다.
또다른 소득도 있었다.
‘아르고스의 주인이더라도, 서로의 생존 여부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군.’
모용황이 정말 죽었는지, 집요하게 캐묻던 무칸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이었다.
‘잠깐의 여유 정도는 있겠어.’
다른 주인들이 대응하기 전에 곧바로 몰아칠까 했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한건우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고, 이비현이 물었다.
“이제 이곳도 달라지겠죠?”
“글쎄.”
진심으로 그러길 바라지만, 모를 일이었다.
“분명히 전보다는 나을 거예요. 건우 씨 덕분에 이 땅의 역사가 바뀐 거라구요.”
이비현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벅찬 마음이 드러났다.
한건우가 한 행동을 순수한 정의감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아직 한건우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아르고스나 모용황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특수안보부 같은 조직을 뒤에서 조종하던 비밀 결사 정도로 설명하면 바로 알아듣겠지만.
자세한 건 최대한 늦게 알리는 게 나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자.”
“네, 좀 회복도 하고 쉬셔야죠.”
돌아간다는 말에 이비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니, 가볼 데가 있어서.”
잠깐의 여유가 생겼다지만 쉴 틈은 없었다.
한건우는 아공간 주머니 속, <언어의 석판>을 움켜쥐었다.